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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30)화 (130/177)

130화

기운 없는 키오를 계속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홧김에 한 말이었지만…….

나는 실제로는 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키오가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지 못해서이다.

편지를 보내려면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을 고용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왕궁 안에 있었다.

왕궁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돈을 받고 편지를 배달해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왕궁에 필요한 일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용인들이니까.

‘그냥 왕궁 밖으로 나가서 이 편지를 인페르나 영지까지 배달해 줄 사람을 구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오후 훈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하는 대신 숙소로 튀었다.

훈련관들은 훈련이 끝나면 우리가 무얼 하든 더는 상관하지 않는 터였다.

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훈련복을 벗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지급 받은 평상복을 입었다.

사실 말이 평상복이지, 하녀나 하인들이 입는 옷과 비슷하게 생긴 평범한 작업복이었다.

‘머리카락도 말아 올리면 제법 하녀처럼 보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내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렸다.

원래 어깨 밑까지 내려오는 짧은 머리카락 길이였다. 그래서 묶는 게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찌 잘 해결했다.

‘그럴싸해 보이네.’

거울 안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키오 오빠, 꼭 유부남이 되도록 응원할게요!’

나는 허리춤에 찬 가죽 가방 안에 키오의 편지와 은화 몇 닢을 넣었다.

혹시나 몰라서 총에 탄알을 완전히 장착했다.

‘이제 문제는 왕궁 밖으로 어떻게 빠져나가는 거냐인데…….’

숙소에서 빠져나온 나는 왕궁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저 문으로 그냥 걸어 나갈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문제는 내가 이곳에 특수 부대 부대원 신분으로 와 있다는 것이다.

앞서 키오가 말했다시피, 부대원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었다.

당장 저쪽으로 걸어 나가려고 하면 문지기들이 출입 허가증을 내보이라고 요구할 테다.

하지만 내겐 출입 허가증은 막론하고 제대로 된 신분증조차 없다.

‘아주 수상해 보이겠지?’

아주 영창 가기 딱 좋은 상황이다.

키오를 돕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감옥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왕궁의 대문으로 출입하는 방법을 과감히 포기했다.

‘벽을 타고 넘는 방법도 위험할 것 같고…….’

나는 왕궁의 벽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 왕궁의 벽은 마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온통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은은 귀하다.

그러니 이 벽에 달린 은을 긁어다가 팔아먹으려고 하는 좀도둑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왕궁 내에서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벽 앞으로 곳곳에 경비를 맡은 병사들이 서 있었다.

저들이 있는 한, 내가 유유히 벽을 넘어가는 건 불가능할 테다.

그래서 나는 발상을 전환하기로 했다.

‘아무리 돈이 썩어 넘치는 국왕이라도, 설마 왕궁의 모든 벽에 은을 바르지는 못했을 테지.’

분명히 은 칠이 되어있지 않은 벽면이 있을 것이다.

그쪽 벽에는 경비가 없을 터.

‘경비가 없는 벽을 찾아서 담을 넘어 왕궁 밖으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왕궁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순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왕궁 내부를 활보하고 다니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어디서 온 누구입니까? 왜 수상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까?’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왕궁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는 하녀와 하인들은 각기 할 일에 정신이 팔려 내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는 벽을 지키며 서 있는 경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사람이 없는 쪽으로 이동해보도록 하자.’

건물이 들어선 곳은 십중팔구로 경비가 있을 테다.

그러니 나무가 짙고 수풀이 많은 으슥한 곳으로 가도록 하자.

그렇게 경비가 없는 곳을 찾아 헤매기를 한 시간.

나는 인적이 드문 정원에 도착했다.

왕궁의 사용인들이 모여 사는 숙소 뒤편에 있는 공간이었다.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다니는 구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정원이 대충 가꾸어져 있었다.

잔디들은 오랫동안 정돈을 하지 않은 것처럼 길게 축 늘어져 있었고, 나무들은 잔가지가 창문의 창살처럼 촘촘하게 늘어져 있었다.

찾았다!

‘이런 곳에는 분명히 사람이 없을 거야!’

한 시간 동안 헤매다가 드디어 찾게 된 돌파구에 나는 신이 났다.

나는 미리 챙겨온 밧줄을 꺼내 인근에 있는 나무에 묶으려고 했다.

그대로 나무 위에 올라가 밧줄을 타고 담장을 뛰어넘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인적이 드문 이곳의 분위기를 보자 드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개구멍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행여나 하인들이 장난으로 파놓은 통로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굳이 나무 위를 올라가 밧줄을 설치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들킬 위험도 줄어들 텐데.

그 생각에 벽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던 그때였다.

“나 참,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예에?”

바로 앞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설마 이런 곳에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와중에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전쟁이니 뭐니 해서 다들 공황 구매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하나에 동화 다섯 닢이 말이 돼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키오와 대략 비슷한 나이대 같았다.

남자 목소리 너머로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벽 너머로, 혹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성이었다.

“어허, 왜 이러시나? 이거 요즘 구하기 힘들어! 밖에선 부르는 게 값이야!”

“그럼 밖에서 파시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장사하세요? 야, 얘들아. 우리 그냥 가자.”

그 말을 뒤로 여러 소음이 들려왔다.

쿵, 쿵! 하는 발소리. 그리고 끼이익, 하고 무언가가 벽면을 긁는 소리.

‘도대체 뭐야?’

혼란스러워진 나는 급기야 근처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급히 그를 붙잡으려 했다.

“자, 잠깐만! 그냥 가지 마! 동화 세 닢!”

끼익, 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세 닢이요?”

“그래! 후후, 이 가격이면 아주 합리적이지 않아?”

“아뇨. 저흰 두 닢 생각하고 온 사람들이라.”

끼익, 끼이익—!

알 수 없는 그 소음이 더더욱 커졌다.

점점 굵어지는 소음에 중년 여자가 다급히 외쳤다.

“알았어, 알았어! 원래대로 동화 두 닢에 줄게! 그 대신 한 사람당 꼭 두 개씩 사!”

“진작 그러셨어야죠! 헤헤, 감사합니다! 얘들아, 돈 들고 줄 서라!”

남자의 목소리 뒤로 젊은 남녀 목소리가 수 가지 섞여 들려왔다.

“와아, 감사합니다!”

“저희 이거 먹으려고 하루 종일 기다렸어요!”

가만히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의 맞은편에서는 한 중년의 여자가 남자에게 솜사탕을 건네고 있었다.

“……?”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끼익 소리가 뭔가 했는데, 벽면에 사다리 옮기면서 긁는 소리였어?

더 기가 막힌 것은 바로 사다리 아래의 상황이었다.

남자가 올라타 있는 사다리 아래에는 스무 명은 족히 되는 하녀와 하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 같이 사이좋게 양손에 솜사탕을 든 채 냠냠 먹고 있었다.

“……??”

뭐야, 이 솜사탕 암매매 현장은?

내 두 눈이 물음표로 바뀔 것만 같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하녀와 하인들은 신나게 솜사탕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으음, 바로 이 맛이야! 이 끊을 수 없는 설탕 맛!”

“역시 고된 노동 이후 섭취하는 당류가 최고지!”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여기 이 사람들 다 이상해…….

조금 무서워진 나는 다시 나무 뒤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 숨었다.

그 와중에도 사다리 위에 올라탄 여자와 남자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요즘 왕궁 안에서 설탕 규제가 심해져서 군것질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요, 아주머니.”

중년의 여자에게 동화를 내밀며, 사다리에 올라탄 남자가 투덜거렸다.

여자는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겠어.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끊기는 게 우리 평민들 밥인데.”

“그러니까요. 제발 전쟁이 안 나야 하는데…….”

“듣자 하니 국왕 폐하께서 왕족을 황국으로 보내려고 한다면서? 그러면 황국이 우리 왕국을 침략하지 않겠다면서?”

여자의 말에 나는 귀가 절로 쫑긋 섰다.

과연 왕국 수도의 시민들. 소문이 참 빠르구나!

남자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문제예요. 국왕 폐하께서 두 왕자님 모두 아끼시는데, 어떻게 하실지…….”

“그러게. 어휴, 난 이런 복잡한 정치 얘기 정말 싫어. 난 그냥 솜사탕 만들어서 파는 게 제일 좋더라.”

“저희도 아주머니 만드시는 솜사탕 먹는 게 제일 좋아요. 다음번에 또 언제 오세요?”

“으음, 내일 또 올까?”

중년 여자의 말에 솜사탕을 먹고 있던 사람들 모두 고개를 신나게 끄덕였다.

“네, 저희 또 돈 들고 올게요!”

“그래! 그럼, 여기에 사다리 두고 가도 되겠지?”

여자의 말에 남자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네, 이쪽은 사용인들 구역이라 기사님들이 잘 안 돌아요. 저희 자체로 방범을 돌아서 왕성 기사님들이 일을 대충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난 총각 말만 믿고 사다리 여기에 두고 간다.”

그 말을 뒤로 여자는 사다리 아래로 스르르 사라졌다.

꿀꺽.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나는 마른침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그래, 바로 저거다!

* * *

한 시간 뒤.

풀밭에 앉아 솜사탕을 먹으며 즐겁게 웃고 떠들던 하녀와 하인들이 모두 제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날도 제법 어둑어둑해진 상황.

나는 조심스럽게 벽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에 사다리를 원래 그냥 두는 모양이네.’

나는 하인이 벽 너머의 여자에게서 솜사탕을 구매하기 위해 썼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지난 훈련 때 몸을 하도 굴렸던 터라 근육이 아파졌지만, 그래도 재빨리 벽면 위로 올라탔다.

벽의 반대편에는 솜사탕 판매자 아주머니가 사용하던 사다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건 하늘이 키오 오빠의 재결합을 돕는 거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그대로 그 사다리를 타고 살금살금 내려갔다.

이렇게 쉽게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줄이야.

그렇게 싱글벙글 웃으며 왕성 밖 땅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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