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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29)화 (129/177)

129화

“……키오 오빠?”

뭐야, 이 오빠? 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그렇게 질질 짜고 있어?

“키오 오빠, 무슨 일이에요?”

당황한 나는 급히 키오를 향해 달려갔다.

“흑흑, 사샤 누님……!”

나를 발견한 키오가 내게 덥석 안겨 왔다.

덕분에 내 셔츠 위로 눈 코 입 모양의 눈물 자국이 그대로 찍혔다.

옷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므로 나는 신경 쓰지 않고 키오에게 물었다.

“왜 울어요? 누구 죽었어요?”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으허헝엉! 제 마음이!”

“네?”

“제 마음이…… 제 마음이 죽었어요!”

의미심장한 외침과 함께 키오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키오 오빠…… 왜 이래요?”

“그…… 결혼까지 약속했던 애인에게 차였답니다.”

주변에 서서 키오를 위로하고 있던 다른 부대원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헉, 하고 숨을 거꾸로 삼켰다.

“네? 애인 분 고향에 계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차여요?”

“그게…….”

부대원이 대답 대신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여전히 키오에게 붙들린 채, 나는 그것을 받았다.

정갈한 필체로 적힌 편지 한 장이었다.

무려 세 장이나 달하는 편지였다.

편지를 쓴 사람은 덤덤한 어투로 자신의 근황과 마을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의 뒤로 가면서 간절한 감정을 호소하고 있었다.

[……키오, 나는 네가 정말 좋아.

하지만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어.

난 이미 한 번 결혼한 적이 있고, 내게는 세 살이 된 아이가 있어.

네 부모님이 정말 이 모든 걸 받아줄 수 있을까?

며칠 전에 네 가족 분들이 찾아오셨어. 그때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

너는 다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어.

난 잘 모르겠어.

그러니 우리는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한때 너의 연인으로 지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네가 내게 준 기억을 소중히 여기며 내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록 할게.

항상 건강하고, 웃는 얼굴로 만나자.]

이별 편지였다.

“앗…….”

설마 고향에 두고 온 애인에게 편지로 이별을 통보받을 줄이야.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주변에 있는 부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 와중에 키오는 정말 억장이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평소 활발하고 쾌활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부대원들이 키오를 붙들었다.

“키오 씨, 이제 일어나세요.”

“그래요, 너무 울면 탈진해서 내일 훈련 못 가요.”

“엉덩이로 바닥 청소할 필요는 없잖아요. 방으로 들어갑시다.”

키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끅끅거리는 우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키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리세요, 키오 오빠. 다른 분들 말대로 일단 방으로 돌아가세요.”

“…….”

결국 키오는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복도에 남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편지는 언제 온 거예요?”

“오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니 숙소 앞에 놓여 있었답니다. 아마 편지 배달을 담당하는 하인이 놓고 간 것 같은데요.”

“…….”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올 때 챙겨왔는데.’

내 짐 가방을 뒤적거리던 나는 이내 내가 찾던 것을 꺼냈다.

편지 봉투와 종이 한 장, 그리고 펜이었다.

“키오 오빠.”

다시 1층으로 내려간 나는 키오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누님.”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키오가 답했다. 기운 하나 없는 약한 음성이었다.

키오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는 차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와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밖에 나간 것 같았다.

“물 좀 드세요.”

테이블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른 내가 키오에게 잔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된 키오는 훌쩍거리며 내가 내민 잔을 받았다.

물을 마시던 키오는 이내 또다시 흑흑 울기 시작했다.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 ‘뚝! 그쳐!’라고 잔인하게 외칠 수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에게 내가 챙겨온 것들을 내밀었다.

“……뭐에요, 이건?”

편지 봉투와 편지지를 본 키오가 되물었다.

“답장 쓰세요.”

“답장……이요?”

키오가 미약한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중얼거렸다.

그러던 그는 이내 피식 김이 빠진 비소를 흘렸다.

“아니요. 안 쓸 거예요.”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헤어지자고 마음먹고 이 멀리까지 길게 편지 보낸 사람인데, 뭘 잡아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내가 따끔하게 반문했다.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역시나.

키오는 아직 자신의 애인과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쏟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남자가 다른 남자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래 봬도 남학교 출신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기로 했었잖아요.”

“그랬었죠. 그런데…… 상대가 싫다잖아요.”

“안 잡을 거예요?”

“말했지만, 상대가 싫다고…….”

“키오 오빠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키오의 말을 끊었다.

“상대 여성분이 키오 오빠를 좋아한다고 하잖아요. 다만 오빠의 부모님이 자신을 받아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선다고 하잖아요. 모르겠어요?”

비록 키오와 그의 연인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러니까 키오는 이미 결혼 전적이 있는, 그리고 아이가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남의 아이까지 데리고 있는 여자를 남자 쪽 가족들이 곱게 볼 리가 없다.

‘아마 키오가 떠나고 없는 사이에 키오 쪽 가족들이 여자분에게 뭐라고 했겠지.’

그래서 여자는 이런 이별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만일 키오가 그녀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면.

그녀의 마음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이 비극으로 끝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좋아하면 잡아요. 놓치고 나서 후회하는 건 정말 꼴불견이니까.”

“…….”

내 말을 들은 키오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다 잠시 뒤.

“……빌려주세요.”

키오가 내 손에 들린 편지 봉투 등을 받았다.

나는 침묵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섰다.

방 밖으로 나가자, 문가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부대원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뭐 하세요?”

키오를 위해 문을 닫은 내가 물었다.

복도에 도미노처럼 주르르 넘어져 있던 부대원들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저희는, 그저 키오 씨가 걱정돼서…….”

“그래서…… 이대로 헤어진대요?”

그 핵심적인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 편지 답장은 보낸다고 하던데요.”

오오!

부대원들 모두가 주먹을 꽉 쥐며 무언의 함성을 내질렀다.

“사샤 씨 오기 전에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상대 여자분이 아이가 있는 연상의 여자래요.”

“키오 씨는 그 여자분 아이를 이미 자기 아이처럼 생각하고 있던 것 같은데요.”

“딱 봐도 상황이 그려지지 않아요? 분명히 키오 씨가 여기 온 동안 키오 씨 가족들이 여자분 찾아가서 설득하려고 했겠지.”

부대원들은 마치 치정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키오가 차분하게 편지를 작성할 수 있도록 숙소 밖으로 나갔다.

마침 카드를 챙겨온 사람이 있어서 카드놀이를 하기로 했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각자 동화 몇 개씩 걸어서 게임을 했다.

“근데 사샤 씨, 이레사 공녀가 왜 사샤 씨를 부른 거예요?”

카드를 섞던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제가 자기가 전에 알던 귀족 집의 시종처럼 생겼다나? 혹시나 해서 불러봤대요.”

나는 미리 준비해 온 거짓말을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아하, 그런 일이 있었어요?”

“신기하네요.”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다들 뭐하고 계세요?”

조금 핼쑥해 보이는 키오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우리는 카드 판을 버려두고 그에게 달려갔다.

“편지 다 썼어요?”

“…….”

키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음 질문이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그 여자분한테 헤어지지 말자고 한번 말해 볼 거예요?”

“…….”

키오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아아!”

“다행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숙소 앞에 모여있던 부대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누군가가 카드 판을 냅다 뒤집었다.

“어서 하인에게 부탁해서 편지 붙여요!”

나를 포함한 모든 부대원이 키오를 재촉했다.

우리는 우르르 모여 이 편지를 밖으로 배달해 줄 하인을 찾았다.

그러나 숙소 밖을 지나가던 하인들은 전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 음. 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저는 짐을 운반하는 하인이라 편지에 대해선 잘…….”

“부대 관리는 제 관할이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하인들은 전부 편지 배달은 자신의 담당이 아니라는 답을 내놓았다.

“……어떡하지.”

밤이 완전히 깜깜해진 뒤에야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모두 훈련 때문에 녹초가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한마음이 되어 키오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오후 훈련을 끝내고 오니까 편지가 숙소 앞에 놓여 있었다고 했었죠?”

내 질문에 부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키오 씨 편지뿐 아니라 다른 분들 편지도 같이 놓여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훈련할 때 편지 배달하는 하인이 찾아온다는 건데…….

“……이러면 제 답장 편지는 어떻게 전달하죠?”

키오가 암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숙소 앞에 똑같이 놔두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편지 배달할 때 필요한 비용을 지급해야 하잖아요.”

“그럼 필요한 돈까지 같이 편지 앞에 두면 되잖아요.”

우리는 그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어떻게 돈만 홀라당 들고 튀었냐…….”

키오의 편지는 그대로 숙소 대문 앞에 남아 있었고, 그가 올려둔 편지 배달 비용만 싹 사라져 있었다.

편지 배달 담당 하인이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던 이가 그런 건지.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인류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다시 편지와 돈을 내놓았다. 그러나 또다시 돈만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사흘이나 시간이 흘렀다.

키오는 이러다가 애인이 완전히 변심해서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흑, 불쌍한 키오 씨…….”

“어쩌면 좋아, 진정한 사랑이었는데…….”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람이 변하는 거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연에 부대원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키오 오빠.”

나는 망연자실 상태에 빠진 키오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가서 편지 보내고 올게요.”

“네? 사샤 누님이 무슨 수로…….”

“오늘 오후에 훈련 끝나자마자 제가 왕궁 밖으로 가서 편지 보내고 올게요.”

“어…… 그거 탈영 아니에요?”

키오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외출하는 건데요?”

“으음, 네. 허락 없이 부대 이탈하는 게 바로 탈영이에요.”

“아하…… 알겠어요! 그럼 저, 내일 탈영하고 올게요!”

나는 한 손으로 엄지를 척 올린 채 키오를 향해 상큼한 윙크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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