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데클란이 두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아직도 어둑어둑했다.
‘몇 시지…….’
데클란은 자신의 품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꺼냈다.
마력석이 새겨진 시계는 희미한 빛을 뿜어내며 시곗바늘을 밝혔다.
새벽 4시 반.
아직 해가 뜨려면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 얼추 해가 뜰 테다.
그렇게 생각한 데클란은 로지에를 깨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이제 슬슬 일어나셔서…….”
거기까지 말하던 데클란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옆에 누워 자고 있어야 할 로지에가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데클란은 등불을 덮어 두었던 천을 걷어냈다.
없었다.
로지에는 텐트 안에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데클란은 걱정하는 대신 그렇게 대충 생각했다.
‘어제 저녁 식사는 로지에가 준비했으니, 아침 식사는 내가 해야지.’
어젯밤에 미리 챙겨 둔 로브를 걸친 데클란은 텐트 밖으로 나갔다.
텐트의 잠금장치를 풀고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밝은 모닥불이 그의 두 눈을 확 밝혔다.
“잘 잤어, 데클란 군?”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지에였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텐트 밖으로 나온 데클란이 그에게 다가갔다.
“한 30분 전에?”
“뭐하러 그렇게 빨리 일어나셨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데클란은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사샤에게서 들은바, 로지에는 아침에 침대 밖으로 나오는 걸 매우 힘들어했다고 했다.
그래서 데클란은 줄곧 로지에가 늦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아카데미 졸업하고 철이 드신 건가.’
데클란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는 몰랐다.
로지에가 빨리 일어나게 된 건 사실 사샤가 더 이상 자신을 깨우러 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침 식사해.”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무언가를 담은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 위에는 녹은 버터가 발라진 따끈따끈한 빵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특이하게도 빵은 나무 꼬치로 찔러져 있었다.
“불 위에다가 바로 구운 거예요?”
“응. 냄비가 없어졌잖아.”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모닥불 주변을 살펴보았다.
로지에의 말이 맞았다.
어제 분명히 내놓고 잤던 냄비는 온데간데없었다.
몬테스라인가 하는 마물 놈들 먹으라고 조각낸 냄비 파편들도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놈들이 냄비를 다 먹었나 보네요.”
식성 한번 특이한 놈들이네.
데클란이 빵을 한 입 베어먹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앞으로 수프 만들어 먹기는 글렀군.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냄비를 하나 사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로지에가 말했다.
“그래도 데클란 군에게 고마웠던지 선물을 주고 갔어.”
“선물이요?”
물병 안에 든 물을 마시던 데클란은 로지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이거 봐. 모닥불 앞에 놓여 있던 거야.”
데클란을 향해 뻗어진 로지에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보라색 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반들반들한 한쪽과 달리 다른 부분은 금이 가서 깨진 것처럼 보였다.
원래 하나였던 게 둘로 갈라진 모양이다.
“뭐에요. 자수정, 뭐 그런 보석이에요?”
로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마력석이야.”
물병을 내려놓은 데클란은 입가의 물기를 쓱 닦았다.
마력석은 마물들이 지니고 다니는 특별한 돌이었다.
마물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데클란은 마력석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데클란이 사용하는 마력석은 자체 발광하는 특징을 가진 마력석이었다.
그는 그것을 주로 촛불 대용으로 사용했다.
“뭐 하는 마력석인데요? 그것도 빛나는 마력석이에요?”
로지에의 손 위에 놓인 보라색 마력석을 흘끔 바라본 데클란이 물었다.
“음, 비슷해. 하지만 보이다시피 스스로 빛을 내는 건 아니야.”
“그럼요?”
“상대의 마력에 반응하는 마력석이야.”
“마력 감정하는 마력석, 뭐 그런 거예요?”
“으음, 그건 아니야.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사용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로지에는 두 마력석 중 하나를 데클란에게 휙 던졌다.
데클란은 접시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마력석을 받아냈다.
로지에가 줄곧 들고 있어서일까, 조금은 따스한 온기가 묻어 있는 마력석이었다.
진한 자주색이란 사실을 제외하면 흔히 강가에 볼 수 있는 조약돌과 같이 생긴 돌이었다.
스스로 빛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광택이 있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투박한 돌.
두 손가락으로 돌을 집어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는데, 모닥불 너머로 로지에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지금 내가 마력석에 마력을 불어넣을 거야.”
데클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로지에가 자신의 마력석을 꽉 쥐었다. 그와 동시에 팟, 하고 밝은 빛이 작은 폭죽처럼 그의 손에 터져 나왔다.
그러자 데클란의 손에 들린 마력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잉, 지잉.
데클란의 마력석이 손바닥 위에서 툭툭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말이다.
‘이건 좀 신기하네.’
평소 로지에가 보여주는 거라면 시큰둥했던 데클란이었으나, 이번에는 흥미가 생겼다.
“지금 데클란 군이 가지고 있는 마력석과 내 마력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로지에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내가 가진 마력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데클란 군이 가진 마력석이 절로 반응하는 거야.”
“연인들이 좋아할 법한 마력석이네요.”
그런 말과 함께 데클란은 로지에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마력석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로지에는 두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 그것을 받지 않았다.
“왜? 데클란 군이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요.”
“내가 숲에서 길을 잃어서 헤매고 있으면, 이걸로 데클란 군에게 신호를 줄게.”
로지에가 활짝 웃으며 제 손에 들린 마력석을 선보였다.
데클란은 정색했다.
“그냥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길 안 잃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러면 제일 좋겠지만,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거잖아.”
“말씀하시는 게 점점 인페르나 남작님을 닮아가시네요……. 그런데 이걸로 제가 길 잃은 도련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
“두 마력석이 가까울수록 더 격렬하게 반응하거든.”
로지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로지에의 말이 맞았다. 그가 데클란과 멀어질수록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마력석이 덜 날뛰는 게 느껴졌다.
“어때, 꽤 쓸만하지 않겠어?”
“뭐…… 그렇긴 하겠네요.”
어쩌면 나중에 로지에와 엇갈리게 되었을 때 이걸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일단 로지에 도련님의 호위로 따라 나온 거니까…… 가지고 있어는 보자.’
데클란은 가방의 가죽끈을 조금 잘라다가 마력석을 자신의 검 손잡이에 묶어두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데클란과 로지에는 텐트를 비롯해 주변을 정리했다.
말에게 꼴을 먹이고 나자 해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할까요?”
모든 장비를 다 챙긴 뒤 말 위에 짐 가방에 매달아 둔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물었다.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최대한 갈 수 있는 만큼 가보도록 하자.”
“좋습니다. 길 잃지 말고 제 뒤를 제대로 따라오세요.”
지도로 방향을 확인한 데클란은 그대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또 그렇게 왕국 수도로 향했다.
* * *
이레사 공녀와 헤어진 나는 그대로 백조궁을 떠났다.
“조만간 사샤 님을 제 전속 호위 기사로 부를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를 호위할 수 있다는 건 나도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으니까.
“난 유리나 널 처음 보는 걸로 할게. 괜히 일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아.”
“물론이죠. 사샤 님이라면 입이 무거우시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나는 이레사 공녀가 사실 가짜 대역이라는 사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이건 물론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과거의 내가 설마 이레사 공녀의 대역이었다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럼…… 난 이레사 공작가에서 어떻게 도망쳐 나온 거지?
내 친부모님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어떻게 지금 부모님이 계신 마을에 살게 된 거지?
머릿속은 고양이가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 버린 실타래처럼 완전히 꼬여버렸다.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물어봐야겠어.’
나는 이내 생각하는 걸 잠시 그만두기로 했다.
어떻게 되었든.
지금 내가 사샤이며 그리고 내게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잠시 발걸음을 멈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인페르나 영지를 떠나온 지 벌써 2주가 넘었다.
다들 아무런 일도 없이 평안한 하루를 보냈을까.
엄마와 아빠가 생각났다. 나 없이 옥수수밭을 가꾸느라 꽤 바쁘실 텐데.
데클란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내가 가끔 옥수수나 다른 농작물을 전해드리러 갈 때마다 항상 반갑게 맞이해 주셨는데.
로지에가 생각났다. 차기 인페르나 남작이 되기 위해 여러 공부도 하고 공무도 봐야 하고, 이래저래 분주할 텐데.
데클란도 생각났다. 파수꾼이라서 전쟁을 대비한다고 일감이 배는 늘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인페르나 남작령으로 돌아가면, 나는 데클란과 로지에의 질문에 답을 주어야겠지.
두 사람 모두 내게 이성적인 호감을 표했었지.
그리고 난 참 교활하게도 2년 뒤에 답을 주겠다고 했었고…….
‘……원래 데클란이 나 대신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가 돼야 했는데.’
사람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거구나.
원작 파괴의 힘이 이렇게나 무섭구나!
그와 동시에 문득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깐만. 이러다가 데클란이랑 이레사 공녀랑 안 이어지면 어떡하지……?’
그럼 내가 이레사 공녀 대신 데클란이랑……?
‘아니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정색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감히 원래 임자 있는 남자를 홀라당 빼앗겠다는 치졸한 생각을 하다니!
‘그냥 차라리 로지에랑 같이 살래! 데클란을 남편으로 두면 걔를 볼 때마다 원작의 19금 외전만 생각날 것 같아!’
데클란이 이미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사는 원작의 미래를 알고 있어서일까.
내가 데클란과 사귀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됐다, 박사샤! 이상한 생각 그만하자!’
괜히 머리카락을 벅벅 긁은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노을이 하늘을 뒤덮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벌써 다 먹었겠지?’
나는 식당으로 가려던 생각을 접고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어차피 이레사 공녀가 내게 이것저것 간식을 먹여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자, 상상치도 못한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헝헝! 흐엉엉!”
숙소 1층에서…… 키오가 대성통곡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