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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27)화 (127/177)

127화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속의 피가 전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지금 내가 이레사 공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걸까?

연속으로 닥쳐오는 당혹감과 곤혹감에 나는 제대로 말을 구사할 수 없었다.

“유리나. 아니, 이레사 공녀님, 저는…….”

“제가 아까 말했었죠?”

이레사 공녀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제가 길드 사람을 고용해서 엔리 님을 찾으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줄곧 당신을 찾을 수 없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겠네요.”

여전히 내 두 손을 꼭 쥔 이레사 공녀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여자였군요.”

“…….”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마 나를 만난 이후로 줄곧 내가 남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엔리라는 이름도, 아마 가짜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이레사 공녀는 씁쓸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 어째선지 마음 한구석이 콕콕 쑤셨다.

“……널 속일 생각은 없었어, 유리나. 거기엔 사정이 있어.”

“알아요.”

공녀는 여전히 미소를 억지로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엔리 님…… 아니, 사샤 님도 사샤 님만의 사정이 있었던 거겠죠.”

“…….”

이번에도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몰랐다.

내 머리는 지금 완전한 백지상태였다.

내가 왜 남장을 하고 아카데미로 가게 되었는가에 관해 설명하려면…….

내가 어렸을 때 이레사 공녀로 오인당하였다는 설명을 해야 한다.

내 원래 머리카락이 붉은색인데다가 눈동자도 녹색이라, 이레사 공녀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이상한 사람들이 날 잡아가려고 했다는 것도…….

‘잠깐만.’

무언가 내 머리를 세차게 강타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미로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간 줄곧 이해할 수 없던 사실들이 하나하나의 단서가 되어 돌아왔다.

내 머리카락이 원래 붉은색이었던 것도.

내 방에 수상해 보이는 보석 브로치가 있었던 것도.

내 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없는 것도.

데클란이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드레스 차림이었다는 것도.

인페르나 남작이 내 이름을 듣고 ‘진짜 이름이 맞느냐’라고 물었던 것도.

수상한 사람들이 나를 이레사 공녀라고 부르며 납치해가려고 했던 것도.

로레론치가 나더러 이레사 공녀를 닮았다고 말한 것도.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진짜 사샤의 기억도.

전부 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유리나 이전의 이레사 공녀의 대역이었어.’

드디어 미로의 끝이 보였다.

모든 게 다 완성된 퍼즐처럼 딱 맞아떨어졌다.

“유리나, 말해야 할 게 있어.”

나는 다급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뭐라고?”

“당신이 여자라도, 그리고 진짜 이름이 ‘엔리’가 아니라도, 저에겐 다 상관없어요.”

이레사 공녀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려요. 전 당신을 제 연인으로 두고 싶은 게 아니에요.”

“아니, 그런 건 나도 생각한 적 없는데.”

당황한 내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어째선지 고백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 미리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레사 공녀는 쿡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목소리가 정말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저는, 당신이 제 오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빠?”

“네. 제가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외롭고 괴로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항상 저를 응원하고 믿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이레사 공녀의 말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소리를 내비치고 말았다.

어떡해…….

미안하지만 현실에 그런 오빠가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내 손을 잡은 이레사 공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당신이 제 언니였으면 좋겠어요. 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지켜줄, 그런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레사 공녀가 내게 어떠한 감정을 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부모님을 잃은 고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짐짝 취급당하던 아이.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대역으로, 가짜인 존재로 살아온 사람.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줄 가족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샤 님.”

이레사 공녀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는 잔잔한 안정감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있어서,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 이 은혜는 평생을 다 해도 갚지 못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니야. 마차가 오는 길가에 있었잖아. 누구라도 널 구해줬을 거야.”

“사샤 님이 절 달려오는 마차로부터 구해줘서,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리고 앞으로 도로 한복판에 서 있지 않도록 해. 그러다 다치면 내가 슬플 것 같으니까.’”

“뭐?”

“당신이 그렇게 말했어요.”

이레사 공녀가 나를 직시했다.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이에요. ‘그러다 다치면 내가 슬플 것 같으니까.’”

이레사 공녀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취색의 녹음을 담은 듯한 두 눈동자는 잔물결이 치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녀가 내게 들려주는 말은,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꼭꼭 숨겨두었던 진심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는 부모님 외에도 제가 다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걸. 그러니, 나는 죽으면 안 된다고…….”

이레사 공녀는 천천히 제 손을 거둬드렸다. 

“고마워요, 사샤 님.”

그녀는 대신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당신 덕분에, 제가 아직도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나는 어정쩡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내가 이 사람에게, 이렇게나…… 중요한 존재였다니.

상상치도 못한 공로의 휘장을 하사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정당하게 얻지 못한 칭찬을 억지로 갈취한 것 같았다.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감동보다 죄책감이 먼저 선수를 쳤다.

“유리나, 나는…… 너에 대해 잊고 있었어.”

내게 무게를 쌓은 그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나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난 솔직히, 네가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채소 가게로 너를 몇 번 찾으러 간 적은 있지만, 그 뒤로 너에 대해 그다지 생각한 적이 없어. 그런데도…….”

그런데도, 넌 나를 너의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너에 대해서 무엇도 모르는데.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난 너의 감정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런데도, 넌…….

“괜찮아요.”

귓가에 이레사 공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모른다고 해서, 당신이 내게 남긴 희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

“포옹할 때는 두 팔이 필요해요, 사샤 님.”

그 말을 듣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레사 공녀의 말이 옳았다.

내가 아무리 잊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심은 꽃이 싹트지 않는 건 아니다.

그녀는 내가 과거에 우연히 베푼 친절을 붙잡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만나서 정말로 반가워, 유리나.”

“이곳에서 사샤 님을 만나게 되어 기뻐요.”

내게서 떨어진 이레사 공녀가 배시시 웃으며 고했다.

그녀는 그제야 내게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를 권했다.

“사샤 님은 지금 특수 부대에 배치되어 있으시죠?”

“응, 맞아.”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들며, 내가 대꾸했다.

“잘됐네요.”

역시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이레사 공녀가 고했다.

뭐가 잘됐다는 거지?

차갑게 식은 찻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내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런 이레사 공녀의 말이 되돌아왔다.

“사샤 님, 부디 제 호위 기사가 되어주세요.”

—풉!

나는 기어코 마시던 찻물을 뿜어내고 말았다.

“사, 사샤 님?”

화들짝 놀란 이레사 공녀는 허둥지둥 자신의 손수건을 꺼냈다.

“이, 이걸로 닦으세요!”

“아, 아니야! 손수건 아껴! 괜찮아!”

찻물에 사레가 들린 나는 콜록콜록 헛기침하며 그녀의 손수건을 거절했다.

괜히 그녀의 손수건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막무가내였다.

“입가가 다 젖으셨어요! 제가 닦아드릴게요!”

나는 두 팔을 휘휘 내저으며 거절의 의미를 밝혔다.

“아니, 정말 괜찮다니…… 앗!”

내 팔이 하필이면 테이블의 끝자락을 쳐버렸다.

참고로 실용성보다는 미적 감각을 추구하며 만들어진 테이블은 매우 허접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콰쾅! 쾅! 쨍그랑!

일렬의 소음이 방 안에 터져 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티팟과 찻잔, 그리고 온갖 케이크가 놓여 있던 트레이가 전부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졌다.

유리는 산산조각이 났고, 세라믹은 파편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유리나를 뒤로 확 잡아당겼다.

“유리나, 조심해! 조각에 손 베여!”

그때였다.

“공녀님, 무슨 일이세…… 꺄악!”

“어머나, 세상에!”

소란을 듣고 방 안으로 벌컥 들어온 시녀들은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들은 이레사 공녀와 딱 달라붙어 있는 나를 도끼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감히 왕자비가 되실 분에게……!”

“고, 공녀님에게서 떨어지세요, 이 파렴치한 색마!”

시녀들이 각기 들고 있던 물건들을 들고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가드를 들며 외쳤다.

“아니, 잠깐만요! 오해입니다!”

뒤늦게 이레사 공녀가 상황을 설명하고 오해는 풀었다만…… 먼지떨이와 행주, 그리고 트레이로 동시로 얻어맞는 건 그다지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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