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혼란감에 휩싸인 나는 애먼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버벅거렸다.
“자, 잠깐만, 유리나. 아니, 아니. 이레사 공녀님.”
“그냥 유리나면 돼요.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이레사 공녀가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천천히 몸을 기대왔다.
내가 의식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왜 이렇게 친밀감을 나타내는 거지?
당혹감을 억지로 삼킨 나는 옆으로 몸을 슬쩍 옮겼다.
“저, 제가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요.”
“제가 왜 이레사 공녀가 되었는지 궁금하신 건가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무작정 끄덕였다.
그래. 지금 내가 제일 궁금해하는 건 바로 이거다.
“엔리 님이 절 구해주시고 난 뒤,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서 사람을 보내왔어요.”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서요?”
내 반문에 이레사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담 쟈니에트가 제게 이레사 공녀가 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마담 쟈니에트가요?”
나는 그저 앵무새처럼 이레사 공녀가 하는 말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마담 쟈니에트는 저를 이레사 공작가로 보냈어요. 그곳에서 저는 공녀가 되기 위해 귀족 자제가 받아야 할 교육을 받고, 사교계 규칙과 예법을 익히고, 또 다른 귀족들과 인맥을 쌓아나갔지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잠깐만요. 그럼 원래 이레사 공녀님은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이레사 공녀는 진짜 공녀가 아니었다.
유리나라는 이름의 평민 소녀가 공녀의 대역을 맡고 있을 뿐.
그렇다면 진짜 이레사 공녀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내 의문에 이런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없어요.”
“네……?”
“진짜 이레사 공녀는 어렸을 때 실종됐어요. 지난 수년간 수색이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을 수 없었지요.”
이레사 공녀는 마치 오래전에 벌어진 역사를 서술하듯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생사를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그녀는 이미 죽은 게 분명해요.”
“…….”
말문이 막힌 나는 가만히 이레사 공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신체검사 때, 로레론치라는 마법사가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레사 공작이 자기 딸 잃어버린 거!’
‘이레사 공작에겐 외동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
그 뒤로 로레론치가 뭐라고 덧붙였었더라.
‘그래서 공작은 자기 딸을 찾으려고 너처럼 빨간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아이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아.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담 쟈니에트가 유리나를 이레사 공작에게 데리고 갔고.
유리나는 그날로 이레사 공작의 딸 노릇을 하게 됐다는 거지?
“……이레사 공작은요?”
“네?”
“이레사 공작도…… 공녀님이 자신의 진짜 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요?”
이레사 공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으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주먹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 흔들리며 찻물이 튀었다.
“에, 엔리 님?”
당황한 이레사 공녀가 옆에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그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은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처럼 날뛰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마담 쟈니에트! 정신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
‘도대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그대로 내 옆에 앉은 이레사 공녀의 두 어깨를 꽉 잡았다.
“에, 엔리 님, 왜 이러—”
“유리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이에 안절부절못하던 이레사 공녀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나는 그녀를 반듯이 바라보았다.
“유리나, 네 이모는 어떻게 됐어?”
내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유리나는 분명히 부모님을 잃고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오스첸스 아카데미 근처의 상가에서 채소 가게를 운영한다고 했던가.
“잘 모르겠어요.”
“이모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어?”
“연락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레사 공작가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어요.”
“아…….”
마음속으로 불같은 감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편했다.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혹은 돌부리가 만연한 길 위를 걷는 것처럼.
가슴 깊숙한 곳이 콕콕 아파왔다.
용서할 수 없었다.
엄연히 가족이 있는 아이를 제멋대로 빼앗아, 다른 사람의 딸 노릇을 시키다니.
이건 도대체…….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엔리 님…….”
“유리나, 이건 잘못된 거야.”
이레사 공녀의 어깨 위로 올라간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시선을 아래로 낮춘 나는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일이 마치 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상할 노릇이었다.
이레사 공녀는, 그러니까 유리나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일 텐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이 상황에 한 번 놓여본 것 같았다.
그 순간.
낯선 기억들이 떠올랐다.
‘뭐야, 이건…….’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혼란스러웠다.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직감적으로는 알았다.
이건, 내 기억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빙의하기 전의 사샤의 기억…….’
마치 내 머릿속에 웅크린 채 숨어 지내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 같았다.
기억의 단편과도 같은 장면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기억 속의 사샤는 화려한 저택 안에 서 있었다.
‘공녀님은 앞으로 여기서 지내게 될 겁니다.’
머리를 말아 올린 하녀장이 사샤에게 말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사나운 얼굴에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렸다.
무서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말했다.
‘여긴 우리 집이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시지요? 이곳은 이레사 공작가. 공녀님의 집입니다.’
‘저, 저는 공녀님이 아니라 티엔리사…….’
철썩, 소리와 함께 사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하녀장이 사샤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
‘입 다무세요!’
하녀장이 사샤에게 다그쳤다.
‘그런 천박한 이름은 다시 입에 담지 마십시오. 공녀님은 공녀님입니다.’
그곳에서 사샤는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난생처음 보는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사샤를 괴롭혔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돌아오는 싸늘한 시선과 노골적인 외면.
부모님을 보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돌아오는 회초리와 손찌검.
이런 간단한 것도 못 하느냐며 돌아오는 폭언과 조롱.
‘여, 여기서 자기 싫어요!’
‘억지 부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사샤가 억지로 지내게 된 방은 하염없이 컸다. 어딘가에 꼭 괴물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뾰족한 장식들이 가득한 방은 마물의 소굴처럼 느껴졌다.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곳은 장식장 옆에 난 작은 구석이었다.
겁에 질린 사샤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등을 꼭 대고 앉아 있으면, 아무도 자신을 해치러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 같았다.
‘엄마, 아빠…….’
사샤가 그렇게 구석에 숨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하녀장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얼굴이 부으면 공작님이 싫어하세요! 그리고 귀족답지 못하게 쥐새끼처럼 앉아서 뭐 하시는 겁니까!’
하녀장 뒤로 몰려온 하녀들이 얼음물로 사샤의 얼굴을 씻겨 내렸다.
차갑고 얼얼한 감각은 곧 사샤의 슬픔을 무디게 만들었다.
사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러다가 슬플 때 울지도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릴까 봐.
그때 사샤는 다짐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 이레사 공작가를 도망쳐서, 다시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개자식들.”
내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이레사 공녀는 당황한 듯이 얼어붙었다.
“엔리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정말 모르겠어, 유리나?”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너는, 너는 어떻게 이 상황을 가만히 수긍하고 있을 수 있어? 널 네 가족에게서 빼앗아 간 거잖아. 마담 쟈니에트는, 그리고 이레사 공작은…….”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그대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지.
생각해보면, 단순히 두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유리나는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레사 공작가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전부 다 묵인했다는 것 아닌가.
이 사실을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오스첸스 아카데미 사람들도, 그리고 가만히 넘어간 이레사 공작가 사람들도, 모두 다…….
“저는 괜찮아요.”
차분하고도 우아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뭐?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얕은 미소를 띤 이레사 공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모는 제가 없어져서 기뻐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전 이모를 불행하게 만든 아이였어요.”
이레사 공녀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쓸모없는 아이였던 저를 이레사 공작가는 받아주었어요. 저는 지금 제가 있는 이 자리가 행복해요.”
“유리나……?”
“그런데 엔리 님은 왜 저를 위해 울어주시는 건가요?”
이레사 공녀가 한 손을 들어 뻗었다.
부드럽지만 차가운 손끝이 내 눈가를 쓸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나, 이건…….”
“엔리 님은 제가 생각한 대로 정말 다정하신 분이에요.”
내 눈가의 눈물을 훔쳐낸 이레사 공녀가 싱긋 웃었다.
“이레사 공작가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로, 저는 엔리 님을 줄곧 찾고 있었어요.”
뭐라고?
이레사 공녀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째서, 나를…….”
“저는 마담 쟈니에트를 통해 엔리 님이 섬기던 도련님이 인페르나 남작가의 장남이란 것을 알아냈어요. 그리고 정보를 취급하는 길드의 사람을 고용해, 인페르나 영지에 사는 ‘엔리’라는 남자를 찾으려고 했어요.”
“아…….”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레사 공녀가 설마 내 뒷조사를 했을 줄이야.
“그런데 어째선지 저는 당신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야 내 진짜 이름은 엔리가 아니고, 남자도 아니니까…….
“그 와중에 저는 정치적인 이유로 라이렌 왕자님과 약혼을 하게 되었고, 왕자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찾는 걸 그만두었지요.”
이레사 공녀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설령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설마 이곳 왕궁에서 당신을 다시 만날 줄은.”
“유리나…….”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날 찾은 거야?”
내가 그녀를 만난 건 그때 딱 한 번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녀를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이모가 주인이라는 채소 가게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어째선지 가게 주인이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사를 하였나 보다, 하고 잊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녀는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단지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녀의 소중한 반지를 되찾아주어서?
아니면,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어서?
그러나 그녀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그 세 가지 이유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레사 공녀는 내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랑하고 있어요, 엔리 님.”
모두를 속이며 줄곧 숨겨왔던 마음을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