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다음 날.
나는 이레사 공녀가 지내는 백조궁을 찾아갔다.
“따라오십시오.”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백조궁의 하인이 내게 턱짓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 하인의 뒤를 따라갔다.
‘나 진짜 어떻게 되는 거야?’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사실 어젯밤에 계속 걱정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백조궁에 한 번 갔는데, 그때는 이레사 공녀가 취침 중이라고 해서 문전박대당했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니 훈련관이 나를 연무장으로 보냈다.
덕분에 오전 훈련은 또 오전 훈련대로 제대로 달렸다.
점심 식사를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넘긴 나는 숙소로 돌아가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백조궁으로 향했다.
수면 부족에다가 과한 신체 활동, 그리고 긴장감으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함.
덕분에 내 상태는 완전히 형편없었다.
‘이러다가 실수로 공녀 앞에서 이성의 끈을 놓고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하인의 뒤를 따랐다.
이레사 공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조금 긴장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300명의 관객 앞에서 졸업 논문 발표를 하는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빙의 전에도 찾은 적이 없던 청심환이 간절해졌다.
이런 내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인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어떤 방 앞에 멈춰 섰다.
똑똑—.
하인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들어오도록.”
여자의 고상한 음색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이 방 안에 이레사 공녀가 있다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하인은 내게 눈짓을 했다.
“들어가십시오. 이레사 공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름을 직접 들으니, 심장이 수면 아래 철렁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나 정말 이 소설의 여주를 드디어 만나는 거야?’
살다 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실제로 독대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 긴장하지 말자! 일생에 이런 기회가 얼마나 많이 있겠어!’
생각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꾼 나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가자, 김사샤!
문을 밀어젖힌 나는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섰다.
방 안으로 입장하기가 무섭게 나는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 위에 한 손을 올렸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내려진 시야에 드레스 자락이 얼핏 보였다.
“고개를 들어라.”
공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얌전히 그 명령에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으로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세, 세상에!’
순간 숨이 턱 하니 막히는 줄 알았다.
저번에 봤을 때도 차림이 화려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오늘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녀의 붉은 머리카락 위로 얇은 은색 실이 휘감겨 있었다. 덕분에 그녀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저번보다 훨씬 더 보석 알이 커진 귀걸이며 목걸이며 온갖 액세서리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다니.
오늘 아주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날이 분명했다.
그렇게 나름 머리를 굴려 가며 추리하고 있는데, 이레사 공녀가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앉도록.”
“앗, 네.”
넋을 잃고 공녀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도로 차렸다.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냉큼 걸어가 앉았다.
이레사 공녀의 반대편에 있는 소파 위에 앉은 나는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데클란이 왜 반했는지 알 것 같아.’
이레사 공녀는 확실히 미인이었다.
그녀가 몸 위에 걸치고 있는 호화로운 드레스나 보석들은 그녀의 고고한 용모를 더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에 불과했다.
이런 아름다운 여자에게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침에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공녀가 내게 대뜸 먼저 말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대화 시작에 나는 속으로 흠칫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네, 그랬습니다.”
“어제 밤새 잠을 조금 설쳐서 그런지 늦잠을 잤어.”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나는 공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충 이해했다.
아마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은 것이겠지.
하지만 이레사 공녀는 귀족이고 나는 평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당장 왕자비가 될 고귀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평민에게 솔직하게 사과하기에는 이 상황을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느끼는 게 어디야.’
이레사 공녀는 생각보다 마음씨가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공녀에게 쓴소리를 듣거나 처벌을 받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이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일은 없을 테다.
조금 마음을 풀고 안심한 나는 그녀에게 화답했다.
“죄송합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제 불찰이 큽니다.”
“흐음.”
이레사 공녀는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과를 준비하던 시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으니, 나가보도록 해.”
시녀들이 차를 내기가 무섭게 공녀가 그들에게 지시했다.
시녀들은 고분고분하게 방을 떠나갔다.
탁, 소리를 뒤로 방문이 굳건히 닫혔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이레사 공녀밖에 없었다.
“…….”
이레사 공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날 쳐다보는 거지?’
그 노골적인 시선에 기분이 묘해졌다.
도대체 왜 저런 시선을 내게 보내는 건지.
애매한 건 싫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공녀에게 왜 나를 지목해서 불렀는지 묻기로 했다.
“공녀님, 어째서 저를 오늘 이곳에 부르셨—”
“엔리 님.”
이레사 공녀의 입에서 그런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공녀가 날 뭐라고 부른 거지?
뒤통수를 머리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고, 공녀니므. 저를 지금 뭐라고 부르셨어야?”
당황한 나머지 말이 꼬였다.
이런 내 실례에도 이레사 공녀는 꿋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엔리 님.”
이 이름을 이레사 공녀가 어떻게……?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공녀를 정시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공녀가 말을 이어갔다.
“기억나지 않는 건가요?”
“저를…… 아세요?”
내 입에서 이런 멍청한 말만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요.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다니던 엔리 님이잖아요.”
오스첸스 아카데미.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로지에와 열심히 공부하던 세월이 엊그저께 일 같은데.
아니, 그건 둘째치고.
“왜 제게 존댓말을 쓰시는 거예요……?”
내가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지금 이레사 공녀가 무려 내게 존경의 뜻을 담아 존댓말을 하고 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더더욱 믿을 수 없는 말이 이레사 공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야 엔리 님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시니까요.”
“……네?”
너무나 예상 밖에 일이었다.
머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피로와 긴장감에 찌들어 힘들게 돌아가던 두뇌였는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자, 자, 잠깐만요. 공녀님. 지금 모든 게 당황스럽습니다만.”
“이해해요.”
이레사 공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역시 이곳에서 엔리 님을 만나리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스르륵.
그녀의 긴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나를 향해 이동했다.
공녀는 내 옆에 다가와 사뿐히 앉았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요!
“공녀님, 이건 도대체…….”
“유리나.”
이레사 공녀의 우아한 음성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공녀님이라 부르지 말고, 유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유리나?
어디선가 들어봤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지?
‘일해라, 내 두뇌야!’
나는 필사적으로 과거 기억들을 훑으며 이 여자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이레사 공녀가 내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고혹적인 장미 향이 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헉.’
내 허리춤으로 향하는 공녀의 손동작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미인이 대낮에 나를 유혹한다는 발상을 할 정도로 내 상상력이 발달해 있지 않았다.
그때, 공녀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여전히 지니고 계시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렸다.
이레사 공녀의 손은 내 허리춤에 매달아 둔 작은 가죽 가방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총이 들어 있었다.
호신용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그때 절 도와주실 때도 실력이 좋으셨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좋아지셨을까요.”
이레사 공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내가 이레사 공녀를 도와준 적이 있다고?’
혼란스러웠다. 거친 파도에 휘말린 작은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도로 바닥 사이에 낀 제 어머니의 반지를 꺼내주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
여러 가지 단서들이 모여들자,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단번에 선명해졌다.
모든 톱니바퀴가 맞아 들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번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
로지에와 함께 외출했던 나는 마차에 치일 뻔했던 여자아이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맞아. 그때 난 그 애가 소설 여주랑 판박이처럼 닮았다고 생각했었지…….’
그 아이는 자신의 반지가 돌 틈새에 껴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도와 총으로 틈새를 넓혀 그 안에 있는 반지를 꺼내주었지.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 있는 이레사 공녀가 싱긋 미소를 선보였다.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유리나……?”
“네.”
이레사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어서 내보였다.
“처음부터 유리나라고 말했잖아요, 엔리 님. 이제야 기억나신 건가요?”
세상에.
내가 아카데미 다닐 때 우연히 도와줬던 아이가 이레사 공녀라고?
뭐 이딴 소설 같은 전개가 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