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여기 가만히 계세요. 제가 가서 살펴보고 올게요.”
데클란은 베개 밑에 미리 두었던 자신의 검을 쥐었다.
마력석이 담긴 등불을 든 데클란은 텐트의 잠금장치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정말로 밖에 나가려고?”
“그럼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눈 감고 쿨쿨 주무시려고요?”
“맹수면 어떡해?”
“죽여야죠.”
데클란이 짤막이 대꾸했다.
“뭐어? 안 돼! 불쌍하잖아!”
“그 맹수에게 물어뜯길 전 안 불쌍해요?”
“앗, 그런 발상은…….”
그 말을 들은 로지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검을 잡았다.
“같이 가자.”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됐어요. 도련님 다치면 저 남작님에게 깨져요.”
애초에 인페르나 남작이 데클란을 보낸 건 로지에의 호위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하여 데클란은 최대한 로지에가 안전한 곳에 빠져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데클란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로지에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데클란 군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거야? 왠지 기쁜데.”
“그런 거 전혀 아닙니다. 전 그저 받아먹은 대로 토할 뿐이에요.”
“응? 뭘 받아먹어?”
“그런 게 있어요. 따라오시려면 제 뒤에 딱 달라붙어 계세요.”
그 말과 동시에 데클란은 텐트의 천막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팟!
당황한 로지에는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기, 기다려! 데클란 군…… 어?”
텐트 밖에서는 진기한 풍경이 데클란과 로지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인장 다섯 개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어?
데클란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선인장이…… 걸어 다녀?”
선인장은 식물이 아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혹여나 잠결에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데클란은 급히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떠도 보이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선인장 다섯 개…… 아니, 다섯 마리가 텐트 앞을 누비고 있었다.
놈들은 물을 잔뜩 먹은 것처럼 토실토실했다. 움직일 때마다 삐죽 튀어나온 가시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데클란은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뭐야, 저것들은?
“마물인 몬테스라야.”
데클란 뒤에 서 있던 로지에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몬테스라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설마 모르는 거야? 우리 인페르나 영지의 특산품 중에 몬테스라로 만든 술이 있잖아.”
“파수꾼은 술 안 마십니다.”
그렇게 답한 데클란은 자신 앞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저 선인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로지에의 말대로 저것들은 마물, 그러니까 마왕의 저주를 받아 탄생한 생명체였다.
인간들을 무서워해서 늦은 밤에 몰래 나와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겁도 없이 우리 텐트 앞까지 오다니.’
데클란은 다시 몬테스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들은 그제야 데클란과 로지에를 발견했는지 깜짝 놀란 것처럼 펄쩍펄쩍 날뛰기 시작했다.
“근데 아까 도련님이 들었다는 소리는 뭘까요?”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물었다.
로지에는 분명히 무언가 우적우적 씹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저걸 먹었던 것 같은데.”
로지에가 꺼진 모닥불을 슬쩍 가리켰다.
로지에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피웠던 모닥불 위에는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밤새 말리려고 일부러 뚜껑을 열어 뒀는데…….
“……냄비 상태가 왜 저래요?”
데클란은 어안이 벙벙했다.
타다 남은 나무 위에 남겨진 건 한때 냄비였던 흔적밖에 없었다. 냄비의 절반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몬테스라들이 먹은 것 같아.”
데클란은 그저 기가 막혔다.
“저것들의 주식은 냄비입니까?”
“으음, 꼭 냄비를 먹는다기보단…… 딱딱한 건 다 잘 먹더라고.”
로지에가 그런 설명을 하던 그때였다.
—꺼억!
몬테스라들 사이로 깜찍한 트림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무언가 땅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데클란과 로지에 모두 두 눈을 크게 떴다.
몬테스라가 뱉어낸 것은…… 한때 냄비의 일부였던 조각 하나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
스르릉—.
가만히 냄비 조각을 내려다보던 데클란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데, 데클란 군?”
그러나 데클란은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편, 몬테스라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데클란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이다.
“안 돼, 죽이지 마! 귀엽잖아!”
로지에의 외침에도 데클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몬테스라들이 모여있는 냄비 절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지체없이 검을 휘둘렀다.
“데클란 군!”
로지에가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비명을 내질렀다.
쩍, 하는 요란한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데클란 군……?”
로지에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데클란이 베어버렸다고 생각한 몬테스라들은 멀쩡했다.
그들은 로지에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 당황했는지 굳어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반면 몬테스라 앞에 있던 냄비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신경에 안 거슬리게 조용히 꼭꼭 잘 씹어 먹어라.”
검을 거둔 데클란은 몬테스라들로부터 등을 휙 돌렸다.
데클란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몬테스라들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날뛰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상황 파악을 한 로지에는 데클란에게 급히 고개를 돌렸다.
“데클란 군, 왜 안 죽인 거야?”
“귀여우니까 죽이지 말라며요?”
텐트 안으로 들어간 데클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지에는 급히 그의 뒤를 따라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내가 죽이지 말라고 해서 안 죽인 거야?”
“그래요.”
“데클란 군…….”
큰 감동을 받은 건지 로지에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데클란 군…… 혹시 나 좋아해?”
염병할.
데클란은 당장 로지에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인페르나 남작으로부터 이미 받은 게 있는지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대신 데클란은 아주 고상하게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반문을 내뱉었다.
“돌으셨어요?”
“음? 아니, 난 제정신인데.”
“그럼 제정신인 사람답게 미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제가 왜 도련님을 좋아해요.”
침낭 안으로 들어간 데클란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에 로지에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만약에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 난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난 사샤 양을 좋아해서…….”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요.”
두 눈을 감은 데클란은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마력석이 든 등잔을 천으로 덮으려고 손을 뻗는데, 옆에서 로지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데클란 군도 사샤 양 좋아해?”
데클란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제가 지금까지 한 말 안 들으셨어요?”
“아니, 다 들었어. 그냥…… 뭔가 신기해서.”
그 말이 데클란의 신경을 건드렸다.
“뭐가요?”
이 도련님은 무슨 의도로 ‘신기하다’라는 표현을 쓴 건가? 나 따위는 사샤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건가?
만일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라면, 당장 텐트를 찢어서라도 로지에를 밖으로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지에의 입에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클란 군이랑 나랑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신기해.”
그 말을 들은 데클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신기한데요.”
“데클란 군은 사샤 양의 어떤 점을 좋아해?”
로지에가 불쑥 물었다.
데클란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차분히 대꾸했다.
“멍청한 질문에는 대답 안 합니다.”
“내 질문이 왜 멍청해?”
“사샤의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사샤니까…… 사샤라서…… 그러니까, 사샤라는 사람이 좋은 거예요.”
나는 지금 도대체 왜 로지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혀를 찬 데클란은 그대로 잠을 청하려고 했다.
내일 갈 길이 멀었다. 로지에가 왕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국왕이 전쟁이라도 선포해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이런 데클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지에가 또 입을 열었다.
“만약에 사샤 양이 날 고르면 어떻게 할 거야?”
데클란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로지에는 침낭 안에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시비를 걸려고 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주먹을 꽉 쥔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사샤에게 도련님보다 제가 더 멋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줄 거예요.”
데클란은 도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사샤가 절 좋아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렇지만 데클란 군은 이미 멋진 사람인걸. 난 데클란 군이 너무나도 부러워.”
등불에 비친 로지에의 입가에는 얕은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로지에는 데클란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듯했다.
그 반응을 본 데클란은 얼이 빠졌다.
그저 곤혹스러웠다.
“……도련님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으음? 뭐가?”
“반대로 하나 물어보죠. 제가 사샤와 결혼하면, 도련님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데클란의 질문에 로지에는 흐음, 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곤 잠시 뒤.
“……슬프겠지?”
“그게 끝이에요?”
데클란이 되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법 구체적인 답이 돌아왔다.
“사흘 내내 아무것도 안 먹고 울 거야. 그러다가 탈진해서 기절할 것 같은데.”
“절 미워하지 않으실 거예요?”
“내가 데클란 군을 왜 미워해?”
“그러니까,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저에게 뺏긴 셈이잖아요.”
데클란은 그런 껄끄러운 말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나 로지에는 여전히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사샤 양을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지. 사샤 양이 데클란 군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녀의 마음이고.”
“그래서요?”
“남의 마음을 날 위해 억지로 바꾸고 싶지 않아.”
로지에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그리고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약 사샤 양이 데클란 군과 같이 있어서 행복할 수 있더라면, 난 그걸로 족해.”
“……도련님 정말 사샤를 좋아하는 거 맞아요?”
데클란은 로지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절대로 저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만일 사샤가 자신 대신 로지에를 고른다고 한다면…….
사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낼 것이다.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필사적으로 어필할 것이다.
그녀를 죄책감으로 죄어두든, 아니면 동정심으로 묶어두든, 혹은 무기력함으로 사로잡든, 뭐든지 다 좋았다.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불순한 감정이라도,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데클란은 사샤를 사랑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녀를 행복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일 자신의 미래에 그녀가 없더라면…….
그런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면, 차라리…….
“좋아해.”
옆에서 로지에의 음성이 데클란의 생각을 끊었다.
“사샤 양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가끔 걱정돼.”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데클란이 로지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지에의 두 눈은 이미 감겨있었다.
“만약 내가 사샤 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어떡하지? 사샤 양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들어.”
“…….”
난생처음 듣는 로지에의 속마음에 데클란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왜 인페르나 남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걸까…….”
잠기운이 돌기 시작한 건지, 로지에의 목소리가 점점 수면 아래로 잠기듯 낮아지기 시작했다.
“나나 사샤 양이나 차라리 한 쌍의 백조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
“온종일 아무런 걱정도 없이 잔잔한 호숫가에서 놀다가, 배고프면 갈대 뿌리를 베어다 먹고, 그러다가 피곤하면 둥지로 돌아가서 서로 부대껴서 자고…….”
“…….”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외아들로 태어나버렸어.”
로지에의 식어버린 웃음소리가 텐트 안에 조용히 퍼졌다.
“미안해, 데클란 군…….”
데클란 군을 부러워해서, 정말로 미안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로지에는 입을 닫았다.
그의 말을 귀담아듣던 데클란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처음 알았다.
사샤와의 미래를 그리는 로지에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잠식하고 있었는지.
데클란은 처음으로 로지에를 미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