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그러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로지에는 자신이 데클란에게 견제당한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셋이서 가면 좋을 것 같아. 노을 같이 구경하면 재밌겠다.”
“도련님이나 노을 실컷 구경하세요.”
“응? 데클란 군은 노을 안 볼 거야?”
‘전 노을 보는 사샤를 볼 겁니다.’
그 말을 삼킨 데클란은 망치를 내던졌다.
“텐트 다 지었고요. 전 가서 씻고 올 테니까, 도련님이 저녁밥 지으세요.”
“알았어. 데클란 군은 뭐 좋아해? 버섯?”
“사샤요.”
데클란은 그대로 겉옷을 벗어다가 텐트 안으로 던져넣었다.
빛이 나는 마력석이 든 등불과 함께 데클란은 근처에 있는 강가로 걸어갔다.
웃옷을 벗은 데클란은 그대로 강바닥까지 푹 잠수했다 나왔다.
시원한 물이 피부에 닿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하아…….”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데클란은 큰 숨을 내쉬었다.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데클란은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말을 훔쳐서 로지에와 함께 왕국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들은 뒤, 데클란은 잠시 고민했다.
데클란이 수도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의 어머니는 분명 반대할 것이다.
데클란의 어머니는 평소에도 그에게 수도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다른 사람이 네가 국왕 폐하의 아들이라는 걸 알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어머니는 행여나 데클란이 왕족과 귀족들의 정치적 세력 싸움에 휘말려 죽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데클란은 차마 자신이 수도로 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마력만 잘 숨기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데클란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수도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남작님이 도련님을 데리고 북부로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어머니에게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본래 북부 출신이니, 로지에가 북부로 가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어머니는 데클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뿐만 아니라 데클란이 짐을 챙기는 것까지 도와주었고, 가는 길에 먹을 식량도 넉넉히 챙겨주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데클란은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로지에의 계획은 무모해 보였지만, 그래도 완전히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로지에의 계획이 먹힐지도 몰랐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로지에는 제법 머리가 좋은 녀석이다. 게다가 언변 실력도 뛰어나다.
그러니 로지에가 국왕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클란은 사샤와 함께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올 수 있게 될 테고…….
‘……고백의 답은 언제 들을 수 있을까.’
데클란은 한 손으로 물살을 흔들었다.
참방.
물방울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강 위로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왕국 수도까지 닷새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데클란은 오늘 말을 타고 이동한 거리를 생각해보았다.
데클란이 고른 말은 과연 인페르나 남작의 애마다웠다. 뛰어다니는 힘이 남달랐다.
로지에의 말도 그보다는 못했지만 제법 건장한 말이었다.
말이 크게 다치지 않는 이상, 예정대로 순탄하게 왕국 수도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로지에가 어떻게 해서든 왕궁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지.
‘……사샤는 왕궁 안에 있겠지?’
그리운 사람이 떠올랐다.
사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그곳에서도 어둠이 찾아왔을 테다.
특수 부대에 들어갔으니, 고된 훈련을 하고 있진 않을까.
어쩌면 오늘도 종일 훈련을 하다가 지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피곤해하는 사샤를 위해 어깨 안마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따뜻한 물로 발을 씻겨줄 수 있는데. 오늘도 수고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데.
그리고 그대로 그녀가 곤히 잠들 때까지 곁에서 지켜줄 수 있는데…….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에 데클란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샤는 나 없이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었지.’
그럴 게 분명했다. 그 아이는 씩씩하고 기운이 넘쳐서 어딜 가든 잘 적응할 아이니까.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섭섭함이 찾아왔다.
……어라?
섭섭함……?
데클란은 순간 자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흠칫 놀랐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사샤가 혼자서도 잘 지낸다고 생각하니까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니.
참으로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그건 마치 사샤가 자신 없이 잘 지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나 참…….’
데클란은 속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기도 했다.
사샤가 왕국 수도로 떠난 이후, 데클란은 매일 밤 침대 위에 누워 사샤에 대해 생각했다.
사샤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을까.
특수부대에선 잘 적응하고 있을까.
밤에 잠은 잘 자고 있을까.
그리고 사샤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너도 나를 보고 싶어 할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샤가 나를 찾아줬으면 좋겠다.
사샤가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사샤에게 내가 필요했으면 좋겠다.
사샤가 나 없이 살 수 없으면 좋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정말 미쳐가는구나, 데클란…….”
“데클란 군 미쳤어?”
등 뒤에서 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데클란이 고개를 획 돌렸다.
“미쳐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곳에는 등불을 든 로지에가 강가에 서서 데클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젠장. 내 혼잣말을 들은 건가.
혀를 찬 데클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광기를 유발하는 독초라도 잘못 먹은 거 아니지?”
“저에게는 풀 뜯어 먹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쌀쌀맞게 대꾸한 데클란은 미리 챙겨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로지에는 등불을 든 채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로지에의 시선이 불편해진 데클란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니, 별것 아니고…… 데클란 군은 몸이 참 건강하구나, 생각이 들어서.”
데클란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수건으로 제 상반신을 홱 가렸다.
“도련님 보라고 만든 몸 아니니까 신경 끄세요.”
“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저녁밥은 다 만드셨나요, 도련님?”
“응. 식기 전에 어서 가서 먹자.”
로지에가 저녁 식사로 준비한 건 버섯 수프였다.
인페르나 영지를 떠날 때 챙겨온 말린 버섯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었다.
‘그래도 요리는 할 줄 아네.’
평생 사용인들이 요리한 음식만 넙죽넙죽 받아먹어 온 귀족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생활력이 있구나.
데클란은 속으로 감탄하며 수프를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데클란은 로지에를 칭찬했던 자신을 비웃고 싶어졌다.
“……도련님.”
“응? 왜?”
“소금…… 간 안 하셨어요?”
데클란이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휘 내저으며 물었다.
그랬다.
로지에가 만든 수프는 밍밍한 것이 맹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버섯 향이 나는 따뜻한 물처럼 느껴졌다.
로지에는 활짝 웃었다.
“응, 소금 하나도 안 넣었어!”
뭘 잘했다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야?
“소금을 왜 안 넣었어요? 그냥 맹탕이잖아요!”
“그야 소금을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뭐요?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해요?”
데클란의 추궁에 로지에는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샤가 그랬는데…….”
“천재들은 종종 바보라고 오해받곤 하죠. 사샤가 참 총명한 발언을 했네요.”
데클란은 뻔뻔스럽게 말을 에둘렀다.
그러면서 그는 남은 수프가 끓고 있는 냄비 안에 소금으로 절인 훈제 소시지를 몇 가닥 잘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집에서 챙겨온 향신료도 몇 줌 흩뿌려 넣었다.
그 뒤로 버섯 물은 비로소 진정한 버섯 수프로 거듭났다.
그렇게 조촐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내일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대로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붙어서 자는 거 같네.”
침낭 안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간 로지에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 발언에 데클란은 어둠 속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도련님과 붙어서 잔 기억이 없습니다.”
“으음? 기억 안 나? 데클란 군이랑 사샤 양이랑 어렸을 때 검술 훈련하고 나랑 같이 낮잠 잤잖아.”
그런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 데클란은 사샤를 데리고 일부러 로지에와 제일 떨어진 곳을 골랐다. 그리고 사샤 옆에 딱 붙어서 낮잠을 자곤 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심한 기억이라 억눌러버린 모양이네요.”
제법 가시 돋친 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사샤 얘기만 나오면 데클란의 어투가 거칠어졌으니까.
그러나 로지에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하, 데클란 군 말 너무 재치 있게 한다. 나도 데클란 군처럼 입담이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재밌다고 느껴지는 도련님의 강한 정신력을 본받고 싶은데요, 하고 데클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자, 데클란 군.”
“……도련님도요.”
마지못해 잘 자라는 말을 돌려서 말한 데클란은 로지에로부터 등을 돌렸다.
곧 참기 힘든 졸음이 밀려왔다.
온종일 말을 타고 이동하느라 온몸이 쑤셨다. 게다가 로지에를 상대하느라 정신력도 털린 상태였다.
눈꺼풀은 무거운 철문처럼 그대로 닫혀 버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데클란 군…… 혹시 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데클란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원래 얕게 자는 데클란이었다. 거기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자고 있던 터라 더더욱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다.
“내가 깨운 거야? 미안해.”
로지에의 목소리였다.
“왜 부르셨어요, 도련님? 화장실 정도는 혼자 가주세요.”
그대로 몸을 일으킨 데클란이 중얼거렸다.
“아니, 화장실이 아니라. 그게…… 방금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이상한 소리요?”
“응. 뭔가 으적으적 씹는 소리였는데…… 나도 뭔지 잘 모르겠어.”
“…….”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의 눈썹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