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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22)화 (122/177)

122화

“키오 오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키오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됐어요? 이레사 공녀님이 뭐래요?”

이는 나만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부대원들도 키오를 향해 몰려들었다.

“이레사 공녀님을 직접 만나본 거예요?”

“어땠습니까? 혹시 라이렌 왕자 전하도 같이 보셨습니까?”

“그 이레사 공녀님이란 분은 도대체 키오 씨를 왜 불러간 겁니까?”

“으음, 그게 말이죠……!”

키오는 난처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레사 공녀님은 저를 찾으신 게 아니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키오의 말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특히 나는 더더욱 그랬다.

이레사 공녀는 분명히 키오를 콕 집어서 지명했는데.

그를 찾는 게 아니었다고?

키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급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게 그러니까…… 공녀님이 훈련관님에게 ‘맨 뒤에 있는 남자’를 보내라고 하셨잖아요. 기억나시나요?”

“그랬죠.”

“그때 공녀님이 뜻한 건 제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맨 뒷줄에 있던 남자는 키오 오빠였잖아요?”

내가 키오에게 반문했다.

이에 키오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변해갔다.

“그게…… 이레사 공녀님이 사샤 누님을 남자로 착각하신 것 같아요.”

“응?”

“엥?”

“네?”

키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여있던 부대원들의 입에서 혼란스러움을 대변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요?”

나는 입을 ‘O’자로 벌린 채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당혹스러웠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잠깐만요, 키오 오빠. 저는 남자가 아닌데요?”

“알아요. 그런데 이레사 공녀님이 절 보자마자 왜 제가 왔냐고 화를 내시더라고요. 제가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 남자를 데리고 오라면서…….”

키오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내가 이레사 공녀에게 남자로 착각 당했다는 사실을 전달해주기가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불쾌하기보다는 그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요? 제가 어딜 봐서 남자 같다는 거예요? 딱 봐도 여자잖아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

내 말에 부대원들이 슬그머니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째선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반응은?

나는 키오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에게 저는 여자라고 말씀드렸나요?”

“당연히 했죠. 그런데 안 믿으시더라고요.”

키오가 연기처럼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공녀님은 저에게 사샤 누님에 대해 질문을 했어요.”

“네? 무슨 질문을요?”

“사샤 누님에 대해 아는 건 다 말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거의 심문 당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리고 조금 전에야 풀려났어요.”

“…….”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왜?

이레사 공녀는 왜 나에 관해서 물어본 거지?

‘혹시 내가 마차 지나갈 때 고개 똑바로 안 숙였다고 화난 건가?’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에 대해 이렇게 집요한 관심을 보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키오의 말이 이어졌다.

“당장 내일 직접 사람을 보내서 사샤 누님을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어요.”

세상에…….

키오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 설마 이레사 공녀에게 찍힌 건가?’

“저기, 사샤 누님?”

“……저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그 말을 남긴 나는 터벅터벅 2층으로 올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눈을 감았다.

당장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레사 공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레사 공녀는 나를 볼 때 어떠한 시선을 하고 있었더라.

‘…….’

잠시 곰곰이 회상에 잠겼던 나는 곧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딱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망한 건가.’

여주의 호감을 사긴커녕 시원하게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건가…….

눈가가 퀭하게 무거워졌다.

나는 멍한 표정을 한 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가 느릿느릿 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자주색과 주홍색이 뒤섞인 오묘한 빛의 노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 풍경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클란…… 나 내일 네 미래 아내한테 혼나러 간다…….’

침울해진 나는 턱을 괸 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데클란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로지에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 * *

인페르나 영지를 떠난 데클란과 로지에는 온종일 전력을 다해 말을 몰고 달렸다.

영지 밖으로 장거리 주행을 해본 적이 없는 말들은 신이 났다. 새로운 길을 보고 흥분한 녀석들은 제멋대로 질주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을까.

해가 지면서 어둑어둑 땅거미도 지기 시작했다.

말들도 제법 지쳤는지 점차 속도가 느려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동하도록 할까?”

“그게 좋겠네요. 어두워지면 말들도 달리기 힘들어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데클란과 로지에는 말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숲 한복판이었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가까운 마을까지 한 시간은 더 걸렸다.

로지에를 흘끔 쳐다본 데클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혹시 침대 아닌 곳에서도 주무실 줄 아세요?”

“음?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밖에서 노숙하면 도련님의 여린 살갗이 까진다거나 하는 거 아니죠?”

“데클란 군을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공주님?”

이에 데클란은 정색했다.

“징그러운 말 좀 하지 마세요. 그냥 확인차 물어본 겁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숲에서 야영하기로 결정했다.

제법 평탄한 지대를 찾은 데클란은 텐트를 칠 장비를 꺼냈다.

“난 가서 말들에게 꼴을 먹이고 올게.”

그 말을 남긴 로지에는 두 마리의 말을 이끌고 수풀 안을 헤쳐 들어갔다.

나무에 두 말을 묶어둔 로지에는 그들에게 미리 챙겨온 건량을 먹였다.

“많이 먹으렴. 내일도 열심히 달려야지.”

로지에의 말을 알아듣는지, 말들은 그가 내민 건량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말들에게 물까지 제대로 먹인 로지에는 말들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는 들짐승이나 마물들이 행여나 야밤에 말들을 공격할까 봐 보호 마법이 걸려있는 마력석을 땅에 박아두었다.

그 사이에 데클란은 미리 챙겨 온 텐트 장비를 꺼내두고 로지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에 도착했으면 로지에 저놈이랑 다른 방에서 잘 수 있었는데…….’

로지에 바로 옆에서 붙어 자야 한다는 게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데클란은 텐트를 최대한 넓게 펴서 공간을 확보하고자 다짐했다.

그렇게 로지에가 돌아와 같이 텐트를 설치하려고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로지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나, 싶어서 로지에를 찾으러 갔던 데클란은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발견했다.

로지에는 바위 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데클란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거지, 이 인간?

데클란은 로지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하늘에 뭔가 신기한 게 있는 건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 위에는 오로지 갖가지 색으로 물든 노을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노을을 구경하고 있는 건가…….’

과연 곱상한 귀족 영식다운 취미다. 노을 감상이라니.

데클란은 어서 텐트를 설치하고 저녁 식사를 할 생각에 로지에를 불렀다.

“도련님.”

“…….”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로지에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로지에를 향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데클란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도련님!”

“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지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데클란이 서 있었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으신 겁니까?”

“미안……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어.”

로지에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상이라도 하고 계셨던 모양이죠? 다 좋은데, 저희 텐트 먼저 설치하고 하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서 데클란은 자신의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곳에는 텐트 천막과 고정 장치들이 놓여 있었다.

데클란과 함께 텐트 천막을 펼치며, 로지에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날 불렀을 때 바로 대답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데클란 군. 노을의 빛깔이 고와서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어.”

안 물어봤는데, 하고 데클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샤 양이 있는 곳에도 이런 노을이 펼쳐지고 있겠지?”

그런 데클란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로지에는 말을 이어갔다.

“뭐…… 그러겠죠. 같은 하늘이니까요.”

데클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천막을 평평해지도록 잡아당겼다.

반대편에 선 로지에도 그를 도와 천막을 펼쳐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사샤 양과 함께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

텐트의 틀을 고정하기 위해 핀을 설치하던 데클란의 손이 멈칫거렸다.

“뭐라고요?”

이 망할 도련님이 지금 누구 앞에서 사샤 얘기를 꺼내는 거지.

“사샤 양이랑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

로지에는 그저 몽상에 잠긴 소년처럼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데클란은 나무망치를 주먹으로 꽉 움켜쥐었다.

“사샤가 도련님이랑 노을 같이 보고 싶어 한대요? 누가 그래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을이 이렇게나 아름다운걸. 사샤 양의 눈동자에 아름다운 것만 비쳤으면 좋겠어.”

쾅, 쾅, 쾅!

귀청을 때리는 소음이 숲에 울렸다.

로지에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음, 데클란 군. 그렇게 세게 내리치지 않아도 핀이 고정될 것 같은데.”

“알아요. 그냥 조금 거슬려서.”

그러면서 데클란은 다시 한번 나무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머리 위까지 높여서 말이다.

쾅, 쾅, 쾅!

“음, 데클란 군. 어째선지 일부러 화풀이를 하기 위해 그렇게 세게 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네, 도련님 착각입니다. 무식하시네요.”

“무식하다니, 나 그래도 아카데미 수석 졸업인데…… 어라. 따지고 보면 데클란 군은 무학력이잖아?”

“입 좀 닫아 주실래요? 귀청이 따가워서 텐트 고정 작업에 지장이 가네요.”

쾅, 쾅, 쾅!

나무망치가 또다시 무자비하게 텐트 고정핀을 내리쳤다.

핀은 숨어드는 두더지처럼 완전히 땅 아래로 박혀버렸다.

“아!”

잠시 데클란의 텐트를 고정하는 걸 구경하던 로지에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데클란 군 혹시 지금 삐진 거야?”

“아닙니다.”

데클란이 질색하며 로지에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로지에는 데클란의 속마음을 파악했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알겠다! 데클란 군도 나랑 사샤 양이랑 노을 보러 갈 때 같이 가고 싶었구나. 그럼 같이 오면 되잖아.”

“하하, 그거 참 좋네요. 다 좋은데 도련님만 없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데클란이 웃음기 없는 웃음을 뱉어내며 로지에를 노려보았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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