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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19)화 (119/177)

119화

로레론치의 손에는 길쭉한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새하얀 종이는 끝자락만 자주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데요?”

“이건 특수한 마법 검사지야! 네 신체에 마법이 걸려있는지 확인하는 용도지!”

그러면서 로레론치는 ‘사실 아까 네 목덜미를 만진 건 이 검사지를 사용하기 위해서지!’라고 말을 추가했다.

로레론치의 말에 의하면, 이 마법 검사지는 사람의 몸에 남아 있는 마력 흔적을 검출해 낸다고 한다.

예전에 데클란과 로지에와 함께 마도구 상점으로 가서 사용했던 마력 검사지와는 달랐다.

그때 데클란이 마력 검사를 받았을 때는 피를 검사지에 묻혀서 검사지가 반응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로레론치가 사용한 이 마법 검사지는 사람의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당장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이 종이가 자주색으로 변한 건 네 몸에 마법에 걸려있다는 뜻이지!”

다시 자리로 돌아간 로레론치는 싱글벙글 웃으며 깃털 펜을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렸다.

“게다가 사샤 넌 키도 작잖아. 아주 결정적인 증거지.”

“제 키가 어때서요?”

“어릴 때부터 신체에 마법을 사용하면 부작용으로 성장이 더뎌진단다. 너한테 마법을 걸어준 마법사가 그 얘기 해 주지 않았던?”

아뇨, 금시초문인데요?

나는 그야말로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 어서 밝히렴. 도대체 너한테는 어떤 마법이 걸려있는 거야?”

이어지는 로레론치의 추궁에 나는 억울했다.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 참! 검사지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내가 마법 풀어버리기 전에 어서 말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레론치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나머지 미처 도망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로레론치에게 붙들렸다.

“너 설마 귀족의 사생아라던가 그런 거 아니지? 그러지 않고서야 일부러 성형 마법을 쓸 리가 없잖아?”

로레론치가 싱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녀의 입가는 웃음기가 만연했지만, 두 눈은 그렇지 않았다.

뭐야, 이 사람?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

싸늘한 그 눈길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내가 수상한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건가?’

하긴, 지금 나는 이곳에 왕족을 호위하기 위한 병사로 와 있었다.

그러한 병사에 신체에 마법이 걸려있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정당했다.

그런데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나는 로레론치에게 고했다.

“마법 풀어보세요.”

“음?”

“전 마법사님이 말하는 마법이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마법을 풀 수 있으면 한 번 풀어보세요!”

그러니까 배 째보라는 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로레론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레론치의 입가에 또다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너 참 재밌는 아이로구나! 그래, 어디 한 번 네 본모습이 어떤 건지 구경 좀 해볼까!”

그와 동시에 로레론치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순간 강력한 섬광과도 같은 무언가가 내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심장이 찌리찌릿 저렸다. 마치 커다란 바늘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간 것과도 같았다.

“윽!”

순식간에 지나간 감각이었지만, 그에 동반하는 고통은 상당했다.

쿵!

몸의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바닥 위로 떨어졌다.

“헉! 어머, 얘! 왜 갑자기 쓰러지고 그래!”

숨을 거꾸로 삼킨 로레론치가 급히 내 어깨를 붙잡았다.

“너 왜 그러는 거야?”

“아, 아프잖아요!”

나는 로레론치의 팔을 꽉 붙들었다.

“저한테 도대체 뭘 하신 거예요? 심장에 뭐가 뚫고 지나간 것처럼 아팠다고요!”

로레론치는 도리어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마법에 얼마나 오래 걸려있었으면 그렇게 아파해?”

“네?”

“오래된 마법일수록 해제할 때 더 아프다고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너, 머리카락!”

“네?”

“너, 마법으로 머리카락 색깔을 염색했었구나.”

로레론치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에 붙들린 머리카락이 내 시야에 포착되었다.

“헉.”

숨이 절로 거꾸로 넘어갔다.

뭐야, 내 머리카락 색이 왜 이래?

까마귀 깃털처럼 까맸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나불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변한 머리카락 색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이, 이게 뭐예요? 제 머리카락이 왜 갑자기 빨갛게 변한 거예요?”

화들짝 놀란 나는 로레론치의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벽면에 거울이 걸려있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거울 앞으로 뛰어갔다.

“말도 안 돼…….”

거울 속에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비쳐 있었다.

이게 나라고?

한참 동안 할 말을 잃고 거울을 보던 내 머릿속에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이 왕국에서 이런 조합을 가진 자가 많지 않았다.

예컨대 이곳에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던 이레사 공녀라던가…….

‘나 지금 이레사 공녀랑 완전 비슷하게 생겼잖아?’

나는 다급히 로레론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제 원래 머리카락 다시 돌려주세요!”

“으, 으응?”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어서 제 원래 머리카락 색 돌려주세요!”

괜히 질투심 나서 여자주인공 따라 하는 엑스트라 악역 같아 보이잖아요!

만일 나중에 이레사 공녀와 사랑에 빠진 데클란이 지금 내 꼴을 봤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자기 관심을 끌기 위해 이레사 공녀를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난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다고!

“자, 잠깐만. 진정해. 이건 네 원래 머리카락 색이야.”

“이게요?”

낯선 빨간색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잡은 내가 반문했다.

“그래. 아까 내가 말했잖아. 네 몸에는 성형 마법…… 그러니까, 신체 변형 마법이 걸려있다고. 난 방금 네 몸에 걸린 마법을 해제했을 뿐이야.”

거기다가 대놓고 ‘거짓말!’이라고 외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로레론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부모님은 둘 다 검은색 머리카락인데……!

‘아니지, 잠깐만.’

그때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내 부모님은 진짜 친부모님이 아니라는 사실.

내 친아빠는 지금 엄마의 사촌 오빠라고 했다.

엄마는 검은 머리니까 아마 내 친아빠도 검은 머리였겠지.

그 말은 즉…….

‘혹시 내 친엄마가 빨간 머리였나?’

그럴싸한 설명이었다.

나를 입양한 뒤, 내 현재 부모님이 내 머리카락을 어느 마법사에게 부탁해 검은색으로 바꾼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내가 아빠와 엄마랑 전혀 다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걸 보고 쑥덕거릴까 봐?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내가 부모님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내 머리카락 색을 마법으로 바꿀 이유는 없을 텐데…….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너 그 애 닮았다!”

고민에 빠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로레론치가 갑자기 짝, 하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이레사 공녀!”

젠장!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당장 가시밭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요동했다간 더 수상한 사람으로 보일 게 뻔했다.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한 나는 로레론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 이레사 공녀님을 닮았다니요?”

“으음, 넌 먼 곳에서 온 애라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레사 공작이 자기 딸 잃어버린 거!”

응?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항 안에 갇힌 멍청한 금붕어처럼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로레론치가 수다스럽게 입을 놀렸다.

“이레사 공작에겐 외동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 그래서 공작은 자기 딸을 찾으려고 너처럼 빨간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아이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거기서 로레론치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뚝 끊겼다.

그녀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눈시울을 치떴다.

“잠깐만. 너, 설마…….” 

“아니에요! 이레사 공녀님은 라이렌 왕자님과 약혼하셨다고요! 지금 왕궁에 계세요!”

조금 전 이레사 공녀를 직접 만나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이런 신빙성 높은 발언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 말을 들은 로레론치는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난 또 네가 그 이레사 공작이 잃어버렸다는 딸인 줄 알고! 그나저나, 이레사 공작은 도대체 언제 자기 딸을 찾은 거래?”

“차, 찾은 지 오래됐을걸요?”

“그렇구나! 내가 마탑에 들어가고 난 뒤에 사교계 소식을 하나도 못 들은 게 죄구나!”

그러면서 로레론치는 발랄한 웃음을 쏟아냈다.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그나저나, 네 반응을 보니까 너도 너 자신이 성형 마법에 걸렸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은데…….”

“그게…….”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사실 검은 머리가 아니라 붉은 머리라는 사실을 대외에 들켜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나는 이레사 공녀와 똑같은 외모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하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이상한 사람들이 나더러 이레사 공녀라고 부르면서 찾아왔던 거였어!’

이제야 어렸을 때 있었던 일렬의 기묘한 사건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부모님은 내가 이레사 공녀와 닮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 머리카락 색을 일부러 마법으로 바꿔두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로레론치가 검사 보고서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나는 로레론치의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흘끔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지 로레론치가 내 진짜 머리카락 색이 실은 붉은 색이라는 사실을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을까?

뭐라고 혓바닥을 놀려야 할까? 뭐라고 변명을 지어내야 할까?

정확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

“저…… 마법사님.”

나는 최대한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사실…… 제 친아버지가 아니에요.”

사실 내 어머니도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굳이 그 사실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

내가 일부러 한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발언을 들은 로레론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헉! 뭐라고! 그렇다면 넌 불륜의 산물이구나! 불쌍해!”

이봐요, 너무 대놓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재빨리 로레론치의 눈치를 살핀 나는 말을 이어갔다.

“제 머리카락 색이 이렇게 된 건…… 아마 제 어머니가 일부러 하신 것 같아요.”

“아하, 알겠다! 네 어머니는 자기가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어린 너에게 성형 마법을 걸었던 거구나!”

로레론치는 이미 제멋대로 막장극 한 편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그러니까 혹시 검사지에 제 진짜 머리카락 색에 대해 안 써주시면 안 돼요? 그러다가 나중에 제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응응, 알았어! 어차피 머리카락 색깔 정도 바꾸는 마법은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서 기록할 생각 없었어!”

다행히도 로레론치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내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색이었던 내 머리카락이 도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이 언니 엄청 착하잖아!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이번에 로레론치가 다른 검사지를 꺼내왔다.

“자, 그럼 이번에는 마력 검사를 해보도록 하자! 이 검사를 통해 네 어머니가 혹시 귀족이랑 바람이 났던 건지 알 수 있을 거야!”

……이 언니, 착하다는 말 취소다.

사회화가 덜 됐는지, 아니면 그냥 무례한 건지.

말을 너무나도 거리낌 없이 하는 로레론치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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