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의원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로 나누어 줄을 서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인들은 신체검사를 전담하는 사람들인지,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섯 명씩 나뉜 우리는 각기 다른 방에 넣어졌다.
나는 키오를 비롯한 다른 세 명의 남자들과 함께 한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안에는 로브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로브 위에는 갖가지 색깔과 형태의 보석 브로치가 늘어져 있었다.
행색을 보아 왕실에서 일하는 마법사가 분명했다.
‘마법사니까 귀족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사를 흘끔 살펴보고 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체검사는 다들 처음인가?”
깃털 펜을 든 마법사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았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의원은커녕 의술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어디가 아플 때마다 그냥 침대에 누워 아픔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구술로 전해지는 약초를 쓰곤 했다.
그러다가 부상이나 병환이 정말 심각한 경우에는 인페르나 남작가로 찾아가 의사인 딘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곤 했지.
이런 열약한 상황에서 자라났으니, 신체검사를 받아봤을 리가 없다.
우리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마법사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평민이면 굳이 신체검사를 받을 이유가 없지.”
깃털 펜을 내려놓은 마법사는 우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 그리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다.”
몸의 건강 상태를 살핀다는 첫 번째 부분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분은 나로 하여금 머리를 갸웃거리게 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검사를 한다니, 굳이?
‘우리가 평민인 거 다 알면서 왜 저런 검사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마법사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나 지금이라도 마력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 있으면 자수하도록. 검사하면 다 나온다.”
그러면서 마법사는 조금 전보다 날카로워진 시선으로 우리의 얼굴을 다시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
방 안에 모인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마법사의 시선을 받았다.
그렇게 차가운 침묵이 돌고 난 뒤.
“아무도 없다는 거지? 그럼 다들 웃통 벗어.”
마법사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대뜸 선포했다.
내 입이 절로 멍하니 벌어졌다.
“뭐, 뭐라고요?”
“으음? 웃통 벗으라고 했는데.”
지금? 여기서요? 이렇게요?
당혹스러웠다.
나는 내 옆에 쭉 서 있는 키오와 다른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지금 이 마법사가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느리게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어떻게 나보고 다른 남자들 앞에서 상의를 벗으라고 말할 수 있어?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나는 급기야 마법사에게 항의했다.
“못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되돌아왔다.
“왜 못해? 어차피 남자끼린데 뭐가 부끄럽다고?”
어?
나는 마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법사 역시 나를 지긋이 주시했다. 마치 내게 ‘뭐가 문제인데?’라고 되묻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제야 나는 서로의 오해를 깨달았다.
“저기요, 마법사님. 저는 여자인데요.”
그러자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 그만하고, 어서 웃통이나 벗어라.”
“농담 아닌데요. 저는 초면에 농담 던질 정도로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나는 나와 같이 이 방에 들어온 동료 부대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자 키오를 비롯한 다른 부대원들이 분분히 내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사샤 누님은 여자입니다.”
“스스로 여자라고 했고, 숙소도 혼자 단층 씁니다.”
“저렇게 생겼지만, 일단 여자랍니다.”
“믿기지 않으시죠? 저도 처음에 믿기 힘들었어요.”
부대원들 중 주홍 머리 남자가 그렇게 덧붙였다.
이 인간들이?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다른 부대원들을 쳐다보았다.
내 편을 들어주는 건 좋았는데 어째선지 자신들도 의심하는 눈치였다.
우리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법사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 맞아?”
“맞다니까요!”
이제는 황당함보다는 억울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왜 여자라는 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거야!
‘내가 아무리 남학교 다니던 5년 내내 남장 안 들켰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이제는 머리카락도 제법 길게 길렀는데!
원래 귀밑까지만 오던 게 지금은 어깨 위까지 내려오는데!
“잠깐만 기다려라.”
마법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 위에는 반신반의하는 듯한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잠시 방 밖으로 나갔던 마법사는 이내 다시 방문을 열고 내게 손짓했다.
“너는 저 방으로 가서 검사를 받도록 해라.”
마법사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한 여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간만에 여자가 와서 행복하네! 어서 들어오렴! 여기 앉아!”
열렬한 환영에 얼떨떨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난 왕궁에 일하러 온 하녀들만 신체검사하는데! 너 같은 병사의 신체검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신기해라!”
그런 말을 하면서 나를 반기는 여자는 조금 전 내가 만났던 마법사와 같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 위에는 온갖 보석 브로치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왕실 마법사들은 다 저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자들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분이시라는 거죠?”
여자 앞에 앉은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여자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응응, 내 이름은 로레론치! 아슈린 백작가 출신이고, 직업은 보시다시피 왕실 마법사야!”
역시나, 내 생각대로 귀족이었다.
‘마력을 쓸 수 있는 마법사라면 마력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일 테니까, 당연히 귀족이겠지.’
나는 로레론치를 흘끔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더 많이 보이는 여자였다. 키오와 비슷한 나이대로 추정된다.
로레론치는 강렬한 황금빛의 허니 블론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인페르나 영지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머리카락 색이어서 눈에 자꾸만 들어왔다.
“넌 이름이 뭐니?”
깃털 펜을 든 로레론치가 내게 불쑥 물었다.
“사샤인데요.”
“아하, 사샤! 이름 귀엽다! 평민들은 이름이 다 동글동글한 게 귀엽더라! 나처럼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서 이상하게 긴 이름이 없어!”
참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절로 빠졌다.
“너 몇 살이니?”
양피지 위에 펜으로 내 이름을 적은 로레론치가 계속해서 물었다.
“전 올해 18살이에요.”
“오호, 18세! 꽃다운 나이지! 방년의 18세인 사샤로구나!”
꺄르르 웃음을 내뱉은 로레론치는 그대로 종이 위에 내 나이를 받아 적었다.
아무래도 신체검사를 할 때 작성하는 서류를 적는 것 같았다.
“사샤 어느 마을 출신이니?”
“인페르나 영지요.”
“엥? 그게 어디야? 그 영지 관리하는 귀족 작위가 뭔지 알아?”
그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인페르나 영지가 이렇게나 인지도가 없는 곳이었나?
“인페르나 남작가……가 다스리는 곳인데요.”
“인페르나 남작…… 아! 그 인페르나 남작!”
로레론치는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이 손뼉을 짝짝 쳤다. 요란하게 반응하는 것이 극장 연극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인페르나 남작이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네, 남작님은 아주 건강하신데요.”
“그래? 그럼 인페르나 남작은 병이 치유된 거야?”
“네?”
그 말에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뿅 뿅 피어났다.
인페르나 남작이 병에 걸렸었나?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뵐 때부터 아주 건강하셨어요.”
“그렇구나. 하긴, 그쪽은 남작 부인이 북부 지방 출신이라 약초를 잘 쓸 것 같았어!”
으음?
남작 부인이라니. 인페르나 남작이 여자인데 어떻게 남작 부인이 있을 수…….
‘아.’
로레론치의 말에 나는 그제야 그녀가 뜻하는 ‘인페르나 남작’과 내가 생각하는 ‘인페르나 남작’이 서로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전 인페르나 남작님은 돌아가셨어요. 지금 남작님은 그 부인 분이세요.”
“헉, 정말? 남작 부인이 작위를 물려받은 거구나!”
로레론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그 동작이 하나하나 과장된 것 같아서 로레론치가 정말 놀라고 있는 건지, 아니면 놀라는 척하며 나를 놀리고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냥 전자라고 생각하도록 하자.
“내가 열 살 때인가, 그때 마탑에 수련하러 들어간 이후로 사교계 소식을 전혀 못 들었거든. 그래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내 표정을 본 로레론치가 하하, 웃으며 설명했다.
“여기서 일하는 남자 마법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다른 모임에 가는데, 나는 안 끼워주더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로레론치의 말을 듣자 그녀가 왜 현 인페르나 남작에 대해 몰랐는지 이해가 되었다.
왕궁 안에서 일하느라 바깥 귀족들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듣지 못한 모양이다.
“어쨌든,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인페르나 영지에서 온 18세의 사샤! 저기 가서 옷부터 갈아입으렴!”
로레론치가 씩씩하게 외치며 내게 손짓을 했다.
로레론치가 가리킨 곳으로 들어가자, 얇은 민소매 셔츠와 짧은 바지 한 벌이 놓여 있었다. 검사할 때 옷이 걸리적거릴 수 있으니 이렇게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다.
“일단 키부터 재도록 하자!”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자, 로레론치가 내게 벽면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순순히 벽 쪽에 등을 딱 붙이고 섰다.
“자, 내가 자를 사용하는 동안 움직이면 안 돼!”
로레론치는 막대기 자를 들고 내 키를 쟀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꾹 눌렀다.
그러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발디딤 하면 안 돼! 그러면 재미없어!”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로레론치가 내 키를 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음, 넌 키가 정말 작구나! 또래 평균 키에도 미치지 못하다니, 이런 케이스는 처음 본다!”
키를 측정한 로레론치가 호쾌하게 외쳤다.
“그, 그렇게 심각한 건가요?”
당황한 내가 급히 반문했다.
나도 내 키가 제법 작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면전에서 ‘평균보다 훨씬 작다’라는 평을 들으니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로레론치는 아주 친절하게 하하 웃으며 확인 사살을 해주었다.
“응응, 엄청 작아! 내가 여기 왕궁에서 일하는 하녀들 신체검사를 다 한다고 했잖아? 너랑 나이 같은 하녀들 중에 너처럼 이렇게 작은 애는 없어!”
“…….”
두 번씩이나 키 작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귀족인지라 달리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키가 작은 게 뭐 어때서! 키 크다고 위쪽 공기가 더 맑은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는데, 로레론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 누가 어린 나이에 마력으로 성형을 하래?”
성형?
기묘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 반응을 본 로레론치가 또다시 깔깔 웃었다.
“왜 그래?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말했잖아. 여기 왕궁에 일하는 하녀들 전부 다 내가 검사한다고!”
로레론치는 자신이 세기의 미스터리 사건을 해결한 명탐정이라도 되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아하하, 웃음만 남겼다.
“저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성형 마법이라니.
일단 이름을 들으니 대충 그게 무슨 마법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내가 그런 마법을 사용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그러나 로레론치는 막무가내였다.
“아하, 시치미 떼기야? 부끄러워서 그래? 그래그래, 나도 이해 해. 성형한 사실을 들키는 게 부끄러운 사람이 있긴 하겠지!”
로레론치는 내게 무언가를 쓱 내밀었다.
“하지만! 자, 이거 봐! 네가 마력으로 성형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