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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17)화 (117/177)

117화

“……예?”

데클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인페르나 남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데클란이 생전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로지에와 함께 마구간에 가서 말을 훔치라니. 그러고 나선 뒷문을 이용해 도망치라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명령을…….

“남작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데.”

“보통 훔친다는 건…… 다른 사람이 가진 물건을 그 사람 몰래 가지고 가는 것을 뜻하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남작님은 어째서 저더러 자신의 소유인 말을 훔치라고…….”

인페르나 남작이 혀를 차며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데클란 넌 참 눈치가 없구나.”

도대체 왜? 어째서?

데클란은 더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데클란에게 남작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네가 파수꾼들 중에 마력이 가장 강해서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너 빼고 마력을 제대로 쓰는 놈이 없긴 하지만…… 너라면 내 아들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구나.”

“……도련님을 왜 제게 맡기시는 거죠?”

“데클란, 로지에를 잘 지켜라. 그리고 한 달 뒤에 로지에를 데리고 인페르나 영지로 다시 돌아오거라.”

“도련님을 지키라고요? 무엇으로부터요? 그리고 한 달 뒤라니, 도대체 저와 로지에 도련님을 어디로 보내시려고요?”

데클란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지금 인페르나 남작이 왜 자신을 불러서 이런 말을 해주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작은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딱 한 시간 준다.”

인페르나 남작이 바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한 시간 후에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전까지 이 저택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태엽이 감긴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데클란은 그녀의 손에 들린 시계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남작님, 지금 하시는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

“내 명령을 잘 수행하면 훔친 말은 네게 포상으로 주마.”

남작이 데클란의 말을 뚝 끊었다.

순간 남작의 말을 들은 데클란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남작은 데클란의 황금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똑똑이 목격했다.

넘어오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 제가 고작 말 한 마리에 목적도 불분명한 수상한 명령을 따를 것 같습니까?”

데클란이 얕게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말을 하는 목청이 떨리는 것 같다.

음, 흔들리고 있구나.

남작은 포상을 조금 더 높이기로 했다.

“새 마차도 한 대 주마.”

흠칫.

데클란의 두 눈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게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데클란은 생각보다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하, 남작님. 저를 우습게 보시는군요. 저를 아무리 물량 공세로 유혹하시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놈 봐라?

남작은 두 눈을 번뜩 뜨며 데클란을 흘겨보았다.

말 한 마리와 신형 마차 한 대로도 안 된다는 건가?

‘다 컸구나, 이 자식.’

제 앞에 선 데클란을 흘끔 쳐다본 인페르나 남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 포상이면 데클란이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자리에 철퍼덕 넘어질 줄 알았는데.

안 되겠다.

‘결국 ‘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

남작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데클란을 올려다보았다.

“마차도 말도 싫다고 하니, 나도 하는 수 없구나. 그럼 그 마차는 로지에에게 대신 주는 걸로 하지.”

순간 데클란의 눈썹이 뒤틀리듯 움찔거렸다.

남작은 그 미묘한 변화를 일부러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덤덤한 어조로 데클란에게 고했다.

“로지에가 그 마차를 끌고 사샤를 데리러 가면 참 좋아하겠구나.”

“…….”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내 아들도 사샤도 이제 딱 결혼 적령기구나.”

“…….”

데클란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 데클란의 인상을 계속 살피며, 남작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요즘 젊은이들은 마차를 타고 데이트를 즐긴다고 하던데…….”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남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클란의 발이 집무실 바닥에서 떨어졌다.

‘아들 키우는 거나 저놈 다루는 거나 다 똑같구먼.’

순식간에 사라진 데클란을 떠올리며, 인페르나 남작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다루기 쉬워서 다행이었다.

“그럼, 나는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남작은 자신의 회중시계를 얌전히 덮었다.

“로지에 도련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남작의 집무실을 벗어난 데클란은 지나가던 하녀를 한 명 냉큼 잡고 물었다.

이름이 아메룬이었나, 사샤와 꽤 친하게 지내던 하녀였다.

하녀 아메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아까 정원으로 가셨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데클란은 창문을 드르륵 열더니, 창틀 위로 대뜸 올라섰다.

하녀 아메룬은 기겁했다.

“데, 데클란! 여기서 뛰어내리시면 어쩌려고!”

그러나 데클란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데클란은 창문 밖으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꺄악!”

놀라 비명은 내지른 하녀 아메룬은 황급히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메룬이 예상했던 끔찍한 장면은 없었다.

저택 밖에는 데클란이 멀쩡히 서 있었다. 그의 주변에 푸른 빛이 스스스 피어나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력을 운용해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것 같았다.

잠시 멍하니 데클란을 내려다보던 하녀 아메룬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쳤다.

“데클란, 이 바보! 마력 쓸 거면 쓴다고 말을 해! 놀라서 수명이 10년이나 줄어들었잖아!”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미안해요. 그런데 전 바빠서 이만!”

그 말을 남긴 데클란은 쏜살같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데클란이 서 있던 곳을 가만히 내려다본 아메룬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자기가 하던 일을 하러 다시 돌아갔다.

정원에 도착한 데클란은 손쉽게 로지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정원 한복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데클란은 로지에를 향해 다가갔다.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아, 데클란 군…….”

데클란의 목소리를 들은 로지에가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로지에의 얼굴을 본 데클란은 흠칫 몸을 떨었다.

“도련님, 울어요?”

그랬다.

로지에의 두 눈동자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처럼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는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지에는 급히 손등으로 제 눈가를 닦아냈다.

“괜찮아. 이제 다 울었어.”

그 말을 하는 로지에의 한쪽 눈에서 눈물 줄기가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데클란은 혀를 찼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왜 그렇게 울고 계세요.”

“다 큰 성인 남성이라도 눈물샘 달린 건 똑같은데 왜?”

로지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로지에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클란은 자신의 겉옷 호주머니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마침 안에 들어있던 손수건이 손에 닿았다. 어머니가 땀을 닦을 때 쓰라고 만들어주신 물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데클란은 로지에에게 그 손수건을 내밀었다.

“눈물 닦으세요.”

로지에는 데클란이 건넨 손수건을 순순히 받았다.

“고마워, 데클란 군. 나중에 꼭 돌려줄게.”

“아뇨, 돌려주지 말아 주세요. 왠지 기분이 찝찝해질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데클란은 로지에를 향해 눈짓했다.

“다 울었죠? 이제 할 일 하러 갑시다.”

“음? 무슨 할 일?”

돌아오는 로지에의 반문에 데클란은 그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모르겠어요. 전 그냥 남작님이 도련님 도와주라고 하셔서 온 것뿐인데요.”

그 말을 들은 로지에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데클란을 빤히 주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지에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좋아! 10분 뒤에 마구간 근처에 있는 헛간 뒤에서 만나자!”

로지에는 그대로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그는 굴속으로 파고드는 다람쥐처럼 그 안으로 쏙 사라졌다.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는 데클란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근데 나랑 도련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나 다름이 없었지만, 데클란은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만일 데클란이 이번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로지에에게 새 마차를 주겠다는 인페르나 남작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남작은 쉽게 말을 내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데클란이 남작이 준 임무를 잘 수행해내지 못하면, 그녀는 정말 로지에에게 새로운 마차를 선물할지도 몰랐다.

두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로지에가 신형 마차를 끌고 사샤를 데리러 가는 꼴은 결코 볼 수 없었다.

벌써부터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눈에 선했다.

새 마차를 탄 로지에는 사샤를 찾아갈 게 분명하다. 그놈은 불쌍하게도 달리 새 마차를 자랑할 친구가 없으니까.

로지에는 ‘사샤 양! 어머니가 새로 사주신 마차야! 어서 올라타!’라고 외치겠지.

그러면 마음 착한 사샤는 로지에의 말대로 그 마차 위에 잘도 올라탈 테다.

로지에 그 얄미운 눈치 없는 놈은 또 ‘데클란 군도 같이 타!’라고 하겠지.

하지만 데클란은 죽어도 그 마차에 올라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했다간 결국 로지에의 새 마차 자랑에 들러리가 되는 꼴 아닌가. 생각만 해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결국 사샤는 로지에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닐 테고…….

‘……난 혼자 집에 앉아서 사샤가 언제 돌아오나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다가 로지에 그 새끼가 사샤에게 수작을 걸기라도 하면…….

‘안 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로지에 놈에게 결코 사샤를 빼앗길 수 없다!

그렇게 다짐한 데클란은 반드시 이번 일을 잘 처리하리라 다짐했다.

로지에의 말을 따라 마구간 인근에 있는 헛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나 왔어, 데클란 군!”

다시 나타난 로지에는 묵직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뭐가 그리 많이 들었는지 가방이 당장 터질 것처럼 빵빵했다.

그제야 데클란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 그 가방은…….”

“아, 이거?”

로지에가 밝은 목소리로 씩씩하게 말했다.

“수도까지 가는 길이 일주일은 걸리잖아.”

“수도요? 저희 수도로 가요?”

흠칫 놀란 데클란이 되물었다.

“응?”

“어?”

로지에와 데클란은 서로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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