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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16)화 (116/177)

116화

“국왕 그 새…… 아니, 그 인간은 만나서 뭐 하게?”

“변방 영지의 백성들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하여 달라고 간청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지에의 두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순간 남작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본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다.

“……네 생각은 잘 알겠다. 그런데 국왕은 무슨 재주로 만나려고?”

“왕국의 귀족들이라면 일 년에 한 번씩 국왕을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로지에의 말이 맞긴 했다. 왕국의 귀족들은 법률상 국왕에게 일 년에 한 번 특별 접견을 청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귀족으로서의 특권이었다.

문제는 그건 어디까지나 법률상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법을 사용하는 귀족들은 없었다.

대부분 귀족은 국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껍데기만 있는, 달리 말하자면 오로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로지에를 주시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국왕의 미움을 사게 될 테다.”

“알고 있습니다.”

“국왕이 네 행동을 트집 잡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어쩌면 널 전쟁터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그 점도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겠다는 것이냐?”

“네.”

“내 아들이 이렇게 우매할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앞에 앉은 로지에를 빤히 바라보며, 인페르나 남작이 중얼거렸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우매한 자만이 용기를 낼 수 있는 법입니다.”

“겁이 없는 자는 지혜가 부족한 자다.”

“지나치게 지혜로운 자는 도리어 현실에 순응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 백성들을 위하여 기꺼이 백치가 되겠습니다.”

“……명색이 아카데미 수석 졸업 아니랄까 봐, 혓바닥은 잘 놀리는구나.”

남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 네 말대로 국왕을 만났다고 치자. 뭐라고 말할 것이냐?”

“만일 전쟁이 터진다면 인페르나 남작령을 비롯한 변방 영지에 사는 백성들이 대대로 희생할 것을 강조할 것입니다.”

로지에의 말에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국왕이 그걸 듣고 갑자기 감동하여 삐뚤어진 마음을 고쳐먹을 것 같으냐? 그 늙은 여우 같은 놈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국왕을 접견하는 자리에는 다른 귀족들도 있을 것입니다.”

로지에가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현재 귀족들은 두 가지 파로 나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국과 전쟁을 어떻게서든 피하고 싶은 평화파와, 황국에게 이대로 끌려다닐 수 없으니 차라리 전쟁을 선포하자는 전쟁파.”

국왕이 로지에의 말을 흘려 넘겨 들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평화파 귀족들은 분명히 로지에의 말을 귀담아들을 것이다.

어떻게든 전쟁파 귀족들의 의견을 밀어내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평화파 귀족에게 로지에의 방문은 더 없는 희소식일 테다.

로지에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평화파 귀족들은 제 발언을 가지고 국왕에게 청원할 것입니다. ‘부디 변방의 백성들을 살펴봐 주십시오’라고.”

다수의 귀족이 그렇게 나서면, 국왕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의견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되면 귀족들끼리 싸움이 나겠지요.”

전쟁파 귀족들이 평화파 귀족의 말에 신경을 쓰는 국왕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전쟁파와 평화파 귀족들끼리 서로 신나게 언쟁을 벌이겠지.

귀족들 간에 갈등이 고조될수록 초조해지는 건 국왕이다.

욕심 많기로 소문난 국왕은 전쟁파와 평화파 귀족들의 지지를 모두 차지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마 타협안을 내겠지.

“최근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와 약혼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인페르나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몇 년 전 있었던 일들이 단번에 떠올랐다.

자신의 딸을 잃고 반쯤 미쳐버린 이레사 공작. 아무런 죄 없는 사샤를 납치해 제 딸로 삼았던 악한.

이레사 공작의 사람들은 도망친 사샤를 어떻게든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해 이곳 영지까지 쳐들어왔었지.

사샤를 남자아이처럼 꾸며 아카데미로 보내고, 이레사 공작이 보낸 듯한 사제를 쫓아내고 난 뒤, 모든 게 한동안 잠잠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 뒤, 이레사 공녀가 또다시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집 딸을 훔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겁도 없군.’

인페르나 남작은 그 사실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이레사 공작에게는 자신의 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딸’이란 존재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제 생각에는 국왕이 이레사 공녀를 ‘왕족’이라고 칭하고선 그녀를 황국으로 보낼 것 같습니다.”

로지에의 말을 들은 남작은 잠시 멈칫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에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남작은 잘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왕세자를 황국으로 보내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2왕자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제2왕자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발하고, 자칫하면 국가 내부 분열이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넌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대신 보내자고 주장할 셈이냐?”

“네.”

“허.”

로지에의 말에 인페르나 남작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여러모로 좋은 제안이었다.

왕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레사 공작가는 국가의 안보를 위해 큰 희생을 한 고결한 귀족으로 추앙받을 것이다.

물론 타지로 끌려가게 된 이레사 공녀는 안타까웠지만…….

그녀 혼자만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시나리오였다.

그렇지만.

이건 로지에의 사고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남작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선하고 고운 마음씨의 아이였다. 그는 소유하는 법보다 나누고 베푸는 법을 더 선호했다.

자신이 더 손해를 볼지언정, 다른 이에게 결코 상처를 주지 않는 그런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런 로지에가 지금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는 방안을 꺼내다니.

“……이레사 공녀를 희생하는 방법이 정말 바르다고 생각하느냐?”

인페르나 남작이 로지에를 떠보듯이 반문했다.

로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래, 너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런데 왜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냐?”

“이레사 공녀가 황국으로 도착하지 못하게 방해하면 됩니다.”

“로지에!”

남작은 그제야 로지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깨달았다.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바치는 척하다가, 그녀가 황국에 도착하기 전에 빼돌리자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빼돌리는 방법은 아마도…….

“황국으로 가려면 인페르나 영지를 지나야 합니다. 그러니 이레사 공녀가 황국에 도착하기 전 빼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페르나 영지에서 그녀를 보호하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그녀를 다시 이레사 공작가로 돌려보내……,”

“그만.”

인페르나 남작은 로지에를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사실 로지에의 계획은 꽤 그럴싸했다. 결국 이레사 공녀가 황국으로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너무나 위험했다.

“그러다가 이레사 공녀가 인페르나 영지에 있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넌 국왕의 뜻을 거스르고 황국으로 바쳐지는 공녀를 빼돌린 반역자가 되는 거다.”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말이라고 쉽게 하는구나.”

남작은 혀를 찼다.

“로지에, 난 네 어미로서 네 계획에 반대한다. 국왕의 눈 밖에 나서 처벌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남작의 반대에도 로지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 스스로의 신변을 구할 정도의 언변 실력은 됩니다.”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구나.”

“저 스스로가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저를 신뢰하겠습니까?”

“망할 것.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인페르나 남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끝까지 제 어미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구나. 누굴 닮아 저리 고집이 센지.”

로지에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제 고집이 어머니를 닮아 센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오냐. 잘 안다. 그리고 너도 내 고집이 얼마나 센 줄 알겠지.”

“어머니…….”

“네가 지금까지 했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그러니 더 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

남작의 굳건한 목소리가 잇따랐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예 로지에로부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

잠시 머뭇거리던 로지에는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어머니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지도 없이 한 번에 단칼로 자신의 제안을 내처 버릴 줄은 몰랐다.

비록 남작이 자신의 계획을 반대했지만, 로지에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밤새 두 눈을 뜬 채 생각한 결과, 이 방법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가장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로지에는 어떻게 해서든 수도로 가서 국왕을 만날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어머니의 승인을 받고 가면 좋았지만…… 그녀가 허락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마구간에 가서 말 한 마리를 훔쳐다가…….’

“혹시나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집무실의 문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던 로지에의 뒤통수를 향해 남작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혹시나 마구간에 가서 말을 훔쳐다가 뒷문으로 도망치는 짓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하인들이 다 지키고 있으니.”

“…….”

정곡이 제대로 찔린 로지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남작은 그런 로지에를 보며 ‘넌 내 손바닥 위다’라고 말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어서 나가보거라.”

“……네.”

기운 없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로지에를 집무실 밖으로 내보낸 인페르나 남작은 곧바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부르셨습니까.”

남작의 호출을 들은 집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데클란은 어디에 있나?”

“곡물 창고에서 재고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당장 불러오너라.”

집사는 남작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다.

약 반 시간 뒤, 데클란이 남작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그래.”

남작은 데클란을 데리고 온 집사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집사는 곧바로 집무실 문을 닫고 퇴장했다.

이제 집무실 안에는 남작과 데클란 단둘만 있었다.

집사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더는 들려오지 않을 무렵, 인페르나 남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긴히 부탁할 게 있다, 데클란.”

“무엇입니까.”

데클란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간 데클란은 남작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마을 순찰은 기본이고, 영지 내부에 있는 지명 수배자를 뒤쫓거나 범죄 현장에 나가 사람들을 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지 관리에 중요한 여러 기관을 관리하곤 했다.

그래서 데클란은.

‘전쟁 대비한다고 또 일을 시키려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남작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남작의 명령이 조금 이상했다.

“로지에와 함께 마구간에 가서 말을 훔친 다음, 뒷문으로 도망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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