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이레사 공녀가 분명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착각한 건가.’
괜히 부끄러워졌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듯 나는 더더욱 고개를 낮게 숙였다.
반면 훈련관은 두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저어, 공녀님. 병사를 백조궁으로 보내라니, 어찌하여 그런 명령을…….”
“내가 굳이 그대에게 내 머릿속의 생각과 의도를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하나?”
이레사 공녀의 입술에서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에 훈련관은 더는 질문을 덧붙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공녀님의 마차를 뒤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나는 지금 라이렌 전하를 보러 가는 중이다. 그러니 오후 3시까지 백조궁에 오도록 하여라.”
그 말을 남긴 이레사 공녀는 고개를 휙 돌린 뒤 다시 마차 안에 올라탔다.
탁, 소리와 함께 마차가 닫혔다.
그 뒤로 마차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여유롭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레사 공녀를 태운 마차는 그렇게 유유히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멀리 떠나간 마차가 작은 점처럼 보일 때쯤.
현장에 남은 사람들이 전부 키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키오를 주시하고 있는 눈빛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키오에게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묻고 있다는 것.
“저, 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키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떡하니 벌어진 그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기어 나오지 못했다.
훈련관이 키오에게 물었다.
“방금 이레사 공녀님에게 무슨 무례한 짓을 저지른 건가?”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머리 숙인……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전 잘못 없습니다! 아, 아무것도……!”
어버버, 하고 말을 쏟아내는 키오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키오의 어리바리한 항변에 훈련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인가? 혹시 공녀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무례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게 아닌가? 아니면 공녀님을 구경하듯이 빤히 쳐다보았다던가? 그러지 않았나?”
“저, 전혀 아닙니다! 제가 왜 그런…… 아니에요, 저는 안 그랬어요!”
“그럼 자네, 혹시…… 이레사 공녀님과 아는 사이인가?”
“모, 모르는…… 저, 저는 그냥 평민…… 그래서, 귀, 귀족은…….”
훈련관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훈련관 역시 이레사 공녀가 왜 키오를 지목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었다.
“……일단 이동하도록 하지.”
훈련관은 모든 부대원에게 손짓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키오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얼이 빠진 키오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이레사 공녀는 도대체 왜 키오 오빠를 부른 거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레사 공녀는 이미 라이렌 왕자와 약혼한 사이일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왕궁 안을 활보하고 다니지 못하지.
그녀는 왕자의 약혼녀로서 이미 많은 시선을 받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왕자를 비롯한 모든 왕족의 귀에 흘러 들어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레사 공녀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것도 모자라 대뜸 키오 오빠를 자신의 궁에 데리고 오라고 했다.
‘아, 혹시.’
설마…… 그런 건가?
이레사 공녀는 제 약혼자인 라이렌 왕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는 약한 표현이었다.
이레사 공녀는 라이렌 왕자를 혐오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을 위한 계약 약혼이었다.
라이렌 왕자에게는 강력한 귀족 가문의 후원이 필요했고, 이레사 공작은 자신의 입김이 잘 닿을 수 있는 왕족이 필요했다.
이런 이해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약혼이었으니,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에게 잘해 줄 리가 없다.
그는 이레사 공녀를 트로피처럼 다뤘다.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 꼭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반짝거리는 보석.
그게 이레사 공녀가 받는 취급이었다.
그러니 이레사 공녀가 그에게 반항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왕궁 안에서 보란 듯이 외간 남자를 궁에 들여서 라이렌 왕자에게 엿 먹이려는 건가?’
들어보니 그럴싸했다.
왕권 싸움으로 왕세자와 라이렌 왕자의 대결 구도가 더더욱 대두되는 시기.
지금 이때 라이렌 왕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었다.
그런데 만일 이 상황에서 자기 약혼녀인 이레사 공녀가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할 법한 일을 한다?
그렇게 되면 라이렌 왕자의 속이 터질 게 분명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어쩌면 이레사 공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키오를 자신의 궁으로 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키오를 흘끔 바라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가게 된 키오는 아직도 시무룩한 상태였다.
“저기. 키오 오빠.”
“네에, 사샤 누님…….”
“이따가 백조궁에 가서 정신 바짝 차리세요.”
“……네?”
내 말에 키오는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에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고했다.
“이레사 공녀님은 라이렌 왕자님과 약혼한 사이시잖아요. 잘못해서 라이렌 왕자님에게 찍히면 오빠만 손해겠죠?”
내 입장으로선 키오를 돕기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내 말을 들은 키오는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 한 방울 떨어졌다.
어?
“키, 키오 오빠?”
“저 그럼 이제 죽는 거예요……?”
또르륵.
키오의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어어?
“아니, 죽는다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세요?”
“제 입으로 스스로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렇지만, 저 정말 열심히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이제 죽는다고요? 이렇게 허무하게요……?”
키오는 이제 왈칵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 사이로 크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기야 키오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내가 급히 말했다.
“아니, 안 죽는다니까요! 그냥 조심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건 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공녀님과 너무 가까이 붙지 말라고요!”
그러나 키오의 두 귀는 이미 막혀있었다.
“센레이나 마을에 두고 온 애인에게 분명히 이 전쟁이 끝나면 청혼하려고 했…….”
“그그그그만! 거기까지! 그 문장에 온점을 찍지 마요!”
이 인간이 정말! 자꾸만 제 명을 재촉하는 금기의 대사를 내뱉으려고 하다니!
나는 키오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내 앞으로 걸어가던 다른 부대원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여긴 어디지?’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어제 개고생을 했던 훈련장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왕궁 안 깊숙한 곳에 있는 위치였다.
‘또 무슨 무시무시한 훈련을 시키려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훈련관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선 훈련관이 우리를 향해 선포했다.
“오늘은 훈련 대신 신체검사가 있겠다.”
신체검사?
그제야 나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거대한 대리석으로 장식된 은빛의 건물.
이곳은 왕실 마법사들이 지내는 의원이었다.
‘신체검사는 이제 와서 왜 하는 거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훈련관이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앞으로 왕족분들을 섬길 병사들이다. 혹시나 숨기고 있는 지병이나 마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다.”
그러니까 얼마나 건강한지 보고 싶다 이거지?
훈련관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키가 너무 작다고 트집을 잡아 날 쫓아내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다!
* * *
인페르나 영지는 오늘도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인페르나 남작의 집무실.
누군가가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집무실 안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던 남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들어오너라.”
“어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로지에였다.
제 아들의 얼굴을 본 인페르나 남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간밤에 잠은 잘 잤느냐.”
“예, 어머니도 잘 주무셨는지요.”
“오냐.”
남작은 로지에에게 자리를 권했다.
“실은 어제 회의 때 나왔던 내용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로지에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무엇이냐.”
“왕국과 황국 간에 평화 협정이 세워지려면, 왕족 한 명이 황국으로 보내져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렇다.”
인페르나 남작은 어제 다른 영지의 영주들과의 회의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말을 하면서 영주들은 하나같이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제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국왕이 제 아들 중 한 명이라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왕족 중 한 명을 볼모로 황국에 보내는 일은 없을 테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전쟁이 날 판이었다.
“그 외에는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그래.”
인페르나 남작의 확고한 대답은 로지에에게 절망처럼 다가왔다.
최근 로지에는 전쟁을 대비해 영지를 관리하고 순찰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데클란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전쟁이 터진다면, 대부분 피해는 영지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물론 영지민들이 도피할 수 있는 피난로와 비상식량은 다 확보해 두었지만…… 문제는 수확을 앞둔 밭과 농원이야.’
전쟁이 터지면 병사들이 밭을 밟고 불을 지를 테다.
몇 달 뒤가 바로 수확 철이었다.
일 년 내내 일군 작물들을 수확하지 못하고 잃게 된다면, 영지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로지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다가오는 파멸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수도로 가겠습니다.”
“뭐?”
로지에의 말에 인페르나 남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도로 가서 뭘 하겠단 거냐? 용병이라도 고용하겠다는 뜻이냐?”
돌아오는 대답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국왕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이에 남작은 어이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