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훈련관의 명령에 나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과연 어디선가 달그락달그락 마차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훈련관의 말대로 우리 쪽으로 마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왕궁 안이어서 그런지 마부가 마차를 아주 천천히 몰고 있었다.
‘저게 정말 이레사 공작가의 마차란 말이야?’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저 멀리서 청록색의 벨벳 깃발을 단 마차가 보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차였다. 내 부모님이 옥수수를 옮기기 위해 사용하는 ‘마차’를 아기 장난감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웅장한 마차.
풍향에 따라 힘차게 흔들리고 있는 깃발 아래로는 별 무늬와 물방울 모양이 섞인 문양이 보였다.
커다란 은판 위에 세공한 것처럼 보이는 문양은 온갖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딱 봐도 높으신 분이 타고 있는 마차처럼 보였다.
나는 넋을 잃고 마차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게 이레사 공작가를 상징하는 가문 문장인가 보네?’
원작 소설에서는 공작가의 문장이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처음으로 이레사 공작가 가문의 문장을 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명히 오늘 처음 보는 건데, 어째 낯이 익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모르게 내적 친밀감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문양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머리를 굴렸지만, 어디서 저 문양을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잘못 기억한 걸지도 모르겠네.’
별 모양이나 물방울 모양이나 흔한 심볼이다. 그러니 내가 착각한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차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안에 이레사 공녀가 타고 있는 건가?’
아니지. 이레사 공작가의 마차이니, 반드시 이레사 공녀가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레사 공작이 대신 마차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마차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두근두근.
나는 떨려 오는 심장을 억누르며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내 앞에 있는 다른 부대원들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납작하게 몸을 숙인 상태였다.
아무래도 처음 뵙는 고위 귀족 때문에 긴장한 듯했다.
덕분에 나는 더욱더 수월하게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는 마차를 관찰할 수 있었다.
마차는 우리 쪽으로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온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마차를 주시했다.
다행히 마차의 창문은 탁 트여 있었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투명한 창문 너머로 마차 안이 훤히 보였다.
마차 안에는 딱 한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헉!’
마차 안에 앉은 여자를 본 나는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 엄청난 미인이다!’
창문 너머로 비친 여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고혹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여자였다.
긴 속눈썹이 늘어진 눈가에는 진하지만 과하지 않은 화장이 돋보였고, 탐스럽게 익은 석류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저 여자가 이레사 공녀겠지?’
그럴 게 분명했다.
이레사 공작가 마차 위에 탄 여자. 그리고 이레사 공작가의 핏줄로 이어진다는 붉은 머리카락.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여자가 바로 이 세계의 여자주인공인 이레사 공녀!
순간,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지?’
여자의 미모가 내 심장을 자극했다.
‘사람마다 다 눈 코 입 있는 건 똑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 있는 거냐고!’
나는 희귀한 보석에 끌린 것처럼 정신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쳤다, 미쳤어! 저 얼굴이 이 왕국의 최종 병기다! 저 얼굴을 황국 병사들에게 내보이면 다들 눈이 멀어서 우리 왕국이 이길 수 있어!’
하도 흥분한 나머지 나 자신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를 수준이었다.
“…….”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차 안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자세가 느슨해질 법도 한데, 이 여자는 달랐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녀는 단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장식장 위에 놓인 비스크 인형을 연상시켰다.
‘고고해! 기품있어! 카리스마 넘쳐!’
역시 귀족은 다르구나!
여자의 미모에 현혹된 나는 속으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런 아름다운 외모를 영접하고 죽을 수 있다니, 이번 인생은 헛되게 살지 않았어…….
‘데클란, 네가 부럽다! 저런 얼굴을 매일 보며 살 수 있다니! 반찬 없이도 밥이 꿀떡꿀떡 넘어가겠구나!’
나는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나란히 붙여놓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 합은 민트와 초콜릿의 만남보다 더더욱 완벽했다.
참고로 방금 그 발언에 대해선 결코 반박을 받지 않겠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울고불고 난리 치고 있는 때였다.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라?’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여자가 예고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다른 부대원들처럼 땅에 이마를 박고 몸을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어째선지 굳어버린 몸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
입을 꾹 다문 여자는 천천히 마차의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마차 밖에 모인 우리 부대원들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마차가 우리가 있던 곳 바로 앞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어? 나랑 똑같이 녹안이네?’
무심한 듯 바깥 세계를 흘겨보고 있는 여자의 눈동자는 선명한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 똑같은 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여자주인공이랑 똑같은 눈동자 색깔을 가지고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저 아름다운 여주님과 무언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두근거렸다.
그렇게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헤벌쭉거리고 있던 찰나.
여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순간 혹시 내가 착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마차 안에 앉아 계신 고귀한 이레사 공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니. 말이 되지 않잖아.
하지만 수 초가 흘러도 여자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내 얼굴을 자세히 관찰이라도 하듯, 그녀는 줄곧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지?’
나랑 눈이 마주쳐서 기분이 나빠진 건가? 감히 평민 주제에 자길 쳐다봤다고?
‘누, 눈 깔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그 순간, 마차를 몰던 마부가 말고삐를 홱 잡아당겼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깼다. 그 뒤로 푸르릉거리던 말은 그대로 멈춰 섰다.
‘뭐야?’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나는 또다시 호기심을 참지 못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믿기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마차의 문이 그대로 열린 것이다.
“……?”
뭐야, 마차가 왜 여기서 정차해?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맨 앞에 서 있던 훈련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당황한 건 훈련관도 마찬가지였다.
훈련관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마부가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여인에게 발디딤 장치를 깔아주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각, 또각.
이윽고 굽 높은 구두의 굽이 도로를 찧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마차에서 내린 여자가 훈련관을 향해 다가갔다.
“이, 이레사 공녀님……!”
훈련관은 급히 자리에서 한 무릎을 꿇고 여자에게 예를 표했다.
‘정말로 이레사 공녀였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햇빛 아래 선 이레사 공녀는 더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도도하게 훈련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대는 누구지?”
이레사 공녀가 자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훈련관에게 물었다.
“저는 왕궁 병사들을 관리하는 훈련관입니다.”
훈련관이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뒤편에 억눌린 당혹감이 고스란히 내 귓가에 들려왔다.
그의 심장은 지금 아마 인생 최대의 속도로 날뛰고 있을 테다.
그럴 만했다. 자기 갈 길 알아서 잘 가고 있던 귀족이 갑자기 마차에서 내려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꼴이라니.
“훈련관이라…… 그럼, 이들은 왕궁의 병사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래? 못 보던 얼굴들인데.”
그러면서 이레사 공녀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의 양쪽 귀에 달려있던 화려한 보석 귀걸이가 찰랑거리며 빛을 발휘했다. 커다란 크기의 값비싼 보석들은 마치 공녀의 지위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 기에 눌린 훈련관이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예, 왕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들입니다.”
“이 시국에 신병들을 들였다.”
“그러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왕족분들을 위해 특별히 편성한 특수 부대의 부대원들입니다.”
“흐음.”
훈련관의 말을 들은 이레사 공녀는 자신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부대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곧 맨 뒤에 있던 내게 와닿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보내는 시선은 어쩌다가 닿게 된 우연의 시선이 아닌, 아주 의도적인 시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호, 혹시 내가 눈 안 깔아서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그래서 가던 길 안 가고 일부러 내린 건가?’
나는 놀란 달팽이처럼 잽싸게 머리를 푹 숙였다.
괜히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날뛰기 시작했다.
그때, 내 머리 위로 이레사 공녀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저 맨 뒤쪽에 있는 남자.”
“예?”
“저 남자를 내가 지내고 있는 백조궁으로 보내도록 하여라.”
공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맨 뒤쪽에 있는 남자라면…….
나는 슬쩍 내 옆에 있는 키오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지명된 키오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 나를 찾는 거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