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국왕 얘기 꺼낸 게 너로구나, 데클란.”
인페르나 남작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파수꾼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들은 밖에서 쉬던 중에 인페르나 남작과 딱 마주친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때…….’
데클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본래 국왕이라면 지긋지긋해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민감한 시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보다 몇 배는 신경이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괜히 입을 놀렸다.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어.’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인페르나 남작은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아랫사람에게 화풀이하는 부류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페르나 남작은 화가 날수록 잔소리가 더 많아졌다.
잘못하면 오늘 회의가 늦은 밤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왕 새끼가 뭐 어쨌는데?”
인페르나 남작은 회의실의 상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페르나 남작을 보좌하듯 옆에 선 로지에는 데클란을 향해 흘끗 눈길을 보냈다.
데클란은 괜히 남작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국왕이 참 무능하다고 로지에 도련님과 말을 나누던 참이었습니다.”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남작이 쾅! 하고 회의실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오냐, 어디 말 한번 잘했다. 내가 국왕한테 맺힌 게 너무 많아. 국왕 그 작자를 만나면 내가 아주 그냥—”
그 뒤로 남작의 입에서는 심각하게 거친 말들이 튀어나왔다.
데클란은 사람이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유창하게 욕설을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참고로 남작의 말을 대충 요약하자면 국왕을 매우 괴롭게 만들고 싶다—라는 요지의 말들이었다.
“…….”
데클란은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리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국왕이라지만, 일단은 제 친아버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제 친아버지의 욕을 바로 앞에서 들으니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그놈의 국왕 새끼, 생긴 건 씹다 뱉은 빵조각 같이 생겨선. 그러니까 지 아들놈들도 그 모양 그 꼴로 생겨 먹었지.”
“…….”
덩달아 욕을 먹게 되니 기분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그렇게 인페르나 남작은 속사포처럼 국왕에 대한 모독을 10분가량 뿜어냈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이 이 꼬라지로 돌아가게 된 건 다 국왕 탓이다. 알겠느냐?”
“예예.”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남작님이 다 맞습니다.”
자리에 모인 파수꾼들은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인페르나 남작을 섬겨온 이들은 그녀의 성격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남작의 말에 조건 없이 동의해주어야만 회의 시간이 짧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터득한 데클란과 로지에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내가 오기 전에 어떤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지?”
인페르나 남작이 집사가 새로 내온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로지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최근 여러 마을에서 약초값이 폭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영지 내 숲에 자라는 약초 채취를 임시로 금지하는 법을 발령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그리고 남작가가 보유하고 있는 약초들을 시장에 조금 풀도록 해라.”
“예.”
다시 시작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로지에가 준 약간의 휴식 시간과 인페르나 남작의 귀환이 회의실 안에 활기를 돌게 했다.
중요한 안건들의 토의가 끝난 건 대략 한 시간 뒤였다.
“그대들의 보고를 듣자 하니, 영지 전체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 같군.”
파수꾼들에게 새로운 차를 한 잔씩 돌린 인페르나 남작이 중얼거렸다.
데클란은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사실이었다.
최근 마을을 순찰하면서 느낀 점이었다. 마을마다 분위기가 너무나도 험악했다.
지난번에 국왕의 서기관이 마을 대표를 뽑아가고 난 뒤부터 더더욱 그러해졌다.
사람들은 보존이 가능한 감자 같은 식량을 대량 구매하기 시작했고, 약초들을 닥치는 대로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우물가에는 물을 길으러 온 사람들이 버글버글했으나, 정작 마을 공터에는 어린아이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전쟁이 정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있었다.
“저, 남작님. 혹시 오늘 영주님들 회의 때 관련해서 소식 들은 것이 있으십니까?”
파수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영주들끼리 모여서 전쟁이 날지 안 날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냐는 질문이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데클란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서 좋은 소식이라 함은 분명 평화 협정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나쁜 소식이라니. 그건 또 뭐람.
인페르나 남작이 회의실 안 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좋은 소식 먼저 듣고 싶은가?”
“예!”
데클란을 포함한 파수꾼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파수꾼들은 전부 한 마음이 되어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제발 평화 협정이 체결됐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남작님!’
‘전쟁만은 피할 수 있도록……!’
이는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나지 않아야지만 사샤를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이들의 간절한 소망에 보답이라도 하듯, 남작의 입술에서 긍정적인 답이 되돌아왔다.
“왕국과 황국 사이에 평화 협정을 맺을 것 같다고 한다.”
순간 회의장 안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저, 정말입니까?”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쁨과 흥분으로 물든 파수꾼들이 시끌시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 위로 남작의 차분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황국이 왕국으로부터 요구하는 평화 협정 조건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참지 못한 로지에가 불쑥 물었다.
남작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볼모.”
“예?”
“왕족 중 한 명을 볼모로 황국에 보내라고 한다.”
“…….”
회의실 안으로 순식간에 정적이 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데클란은 인페르나 남작이 왜 나쁜 소식이 있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네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국왕의 슬하에 두 아들이 있지.”
남작의 무거운 목소리가 잇따랐다.
“왕세자와 제2왕자 사이로 권력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몇몇 귀족들 사이로 현 왕세자를 폐위시키고 제2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남작의 말을 들은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변방에 사는 데클란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국왕의 두 아들은 허구한 날 누가 차기 국왕이 되느냐 따지며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국왕의 맏아들인 왕세자가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제2왕자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권력을 잡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제2왕자는 최근 이레사 공녀를 자신의 약혼녀로 맞아들여 이레사 공작가와 손을 잡았다.
이대로 가면 제2왕자가 정말 왕세자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왕국 수도에는 이러한 복잡한 정세 싸움이 계속되는 중이다.
이 와중에 국왕이 왕세자나 왕자 중 한 명을 황국으로 보내버린다?
그건 곧 한쪽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전부 저버린다는 뜻이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세력을 정리해버렸다간 귀족들이 크게 반발할 테고, 후폭풍이 몰려올 것이다.
국왕은 어떻게서든 귀족들의 반발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럼…… 국왕 폐하는 왕세자 전하도, 제2왕자 전하도 황국으로 보내지 않으실 계획인가요……?”
파수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인페르나 남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한 모금 홀짝 넘긴 남작은 안타깝다는 듯이 두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게, 국왕 그 작자는 도대체 왜 즉위하자마자 다른 왕족들을 전부 다 숙청해버렸을까. 뭐…… 전부 다 자업자득이지.”
“저, 남작님. 그, 그럼 평화 협정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모르겠다.”
여전히 두 눈을 감은 남작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이 젊었을 때 실수로 사생아를 한 명이라도 낳았길 기도하자꾸나. 아무리 사생아라도 왕족은 왕족이니, 황국도 그놈을 볼모로 쳐주겠지.”
남작의 말에 파수꾼들은 모두 축 늘어졌다.
정말이지 좋은 소식과 함께 찾아온 나쁜 소식이었다.
“…….”
데클란은 아무런 말 없이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주먹에 힘이 절로 꽉 들어갔다.
* * *
훈련관을 따라간 곳은 놀랍게도 훈련장이 아닌, 왕궁 안이었다.
‘우와아…….’
난생처음 보는 왕궁 내부 풍경에 눈이 절로 핑핑 돌아갔다.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왕궁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물들이 휘황찬란하게 서 있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로 이어진 통로로 온갖 인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갓 상경한 시골 청년처럼 고개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바로 왕성…….”
“이곳에 국왕 폐하와 왕자님들이 사시는구나!”
훈련관 뒤를 따라 걸어가던 부대원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귀족들과 달리, 대부분 평민들은 평생 왕궁 안에 발 한 번 내딛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왕성 안을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모두가 소풍을 나온 아이들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여기는 하인들도 옷이 번지르르한 게 귀티가 나네.”
“저기 화원의 꽃들 좀 봐. 색깔이 어떻게 저렇게 고울 수 있지?”
우리가 숙덕거리는 걸 들은 훈련관은 크흠! 하고 일부러 크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천박하게 굴지 말고, 조용히 해라!”
훈련관의 질타에 우리는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쁜 새끼, 우리는 행복하면 안 되는 건가…….’
속으로 훈련관을 욕한 나는 주변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왕궁의 벽은 온통 은장식으로 되어 있었다.
듣자 하니 마물들이 왕궁 안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은을 곳곳에 붙여두었다고 했다.
어찌나 철저하게 은칠을 해두었던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은장식이 번쩍거려 눈이 아파왔다.
‘황국이 쳐들어오려고 할 만하네.’
이렇게 왕궁을 은으로 꾸며놓는 건 그야말로 타국에게 ‘와서 우리 금은보화 좀 훔쳐 가쇼’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왕궁의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멈춰라!”
갑자기 앞쪽에서 훈련관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 외침에 걸어가던 부대원들이 모두 놀라 멈춰 섰다.
‘뭐야, 무슨 일이지?’
무리의 꽁무니에 선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훈련관이 외쳤다.
“이레사 공작가의 마차가 오고 있다.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도록!”
그 말에 내 입이 딱 벌어졌다.
뭐야, 갑자기 이렇게 여주 등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