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티엔리사?’
키오의 말을 들은 나는 빠르게 두 눈을 껌뻑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역시 내가 아닌가 보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하튼, 앞으로 혹시나 힘든 게 있으면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하도록 해요.”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키오가 정리하듯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앞으로 전쟁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 지내보도록 해요.”
“그래요.”
굳이 잘 지내자는데 성격 파탄자처럼 꺼지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흔쾌히 키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키오의 얼굴 위로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고마워요, 사샤 누님. 그러면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부탁이요?”
그 말에 나는 어정쩡하게 굳어버렸다.
뭐야. 이렇게 친구 먹고 난 뒤에 즉시 부려 먹겠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지려던 그 순간.
키오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나 말이에요…… 혹시나, 제가 먼저 죽게 되면, 고향에 기다리고 있는 애인에게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전해 줄 수 있나요?”
“…….”
키오에게 한 마디 핀잔을 주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정말 전쟁이 내일모레 터질 줄 알고 있겠구나.
그래서 키오는 어쩌면 전쟁 때문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구나…….
문득 든 생각에 나는 키오에게 물었다.
“키오 오빠,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키오 오빠는 왜 마을 대표로 나오게 됐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마을 대표로 뽑히게 된 거예요?”
궁금했다.
나의 경우, 데클란이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동요된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나를 떠밀어서 마을 대표가 되었다.
정말이지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에 반해 키오는 어쩌다가 마을 대표가 된 걸까?
“마을마다 대표를 뽑는 방법이 똑같지 않았나요? 마을 사람들끼리 의논해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정해서 서기관님에게 추천하는 식이었잖아요.”
“물론 그건 똑같았죠. 제 말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키오 오빠를 추천한 거예요?”
내 말에 키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처음에 저희 마을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제 형을 추천했습니다.”
“형이요?”
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형은 센레이나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거든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 제 형이 마을 대표로 가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키오 오빠가 대신 오게 된 거예요?”
“형은 재작년에 결혼했거든요. 형과 형수님에게는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있어요.”
키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 형을 이곳 먼 수도까지 보낼 수는 없었어요. 만일 형이 죽기라도 한다면…… 형수님과 아이가 너무 가엽잖아요.”
그런 말을 하면서 키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제가 대신 가겠다고 자원했고, 그 결과 제가 여기에 있네요.”
키오의 눈가가 천천히 붉게 물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마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홀로 남겨 두고 온 애인이 생각나서?
어느 쪽이든지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키오가 전혀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나처럼 억지로 떠밀려 온 것도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그 사실을 깨닫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 혼자서만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상황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양쪽 나라 간에 정치적인 암투가 계속되고 있다.
‘아, 그런데.’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내가 원작 소설 줄거리를 비틀어 버려서 앞으로 미래도 달라지는 거 아니야? 이대로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원작 소설에서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전쟁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쯤이면 이 나라의 국왕은 황국의 황제와 은밀하게 전쟁을 피하고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다.
‘그리고 황제가 국왕에게 왕족 중 한 명을 황국으로 보내라고 명령할 테지.’
그리고 이 못돼먹은 국왕은 죽어도 자신의 친자식을 황국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억지를 부릴 예정이다.
결국 국왕은 제2왕자의 약혼녀인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는 조건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데클란은 바로 그 이레사 공녀를 호위하던 과정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레사 공녀와 눈이 마주쳐야 할 데클란은 정작 인페르나 영지에 있고…….’
그럼…… 도대체 이레사 공녀를 누가 호위한단 말인가?
‘이러다가 원작 커플링 파탄 나는 거 아냐?’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개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 친 대가가 다름 아닌 원작 파괴라니!
‘내 목숨값이 참으로 귀했던 모양이구나!’
그 와중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습관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좋아졌다.
‘그래, 이왕 여기 오게 된 거, 열심히 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일단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지금까지 나는 내가 아니라 데클란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데클란이 아니라 나다.
이곳에 없는 데클란을 생각하며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지금 나는 왕실 특수 부대에 있다.
왕족들을 호위하는 부대이니, 어쩌면 이레사 공녀와 접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점을 장점으로 삼도록 하자.
‘좋았어. 이레사 공녀가 데클란과 만날 때까지 무사하도록 지켜내자!’
나는 아무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기다려, 데클란! 네 미래 부인은 내가 잘 지켜줄게!
* * *
“데클란 군.”
“…….”
“데클란 군!”
“……아, 죄송합니다.”
데클란은 그제야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야에 로지에의 굳은 얼굴이 들어왔다.
“회의할 때는 제대로 집중해주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데클란은 다른 설명 없이 그저 사과만 계속 올렸다.
로지에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을 쓱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인페르나 영지의 파수꾼들이 긴 테이블을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순찰 임무에서 돌아온 이들을 곧바로 회의 자리로 끌어들인 건 무리였나.
속으로 혀를 찬 로지에는 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10분간 쉬었다가 회의를 계속하도록 하지.”
로지에의 선포에 방 안에 있던 파수꾼들은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핀 그들은 잠시 방을 떠나 바람을 쐬러 나갔다.
“너도 올 테냐, 데클란?”
다른 파수꾼이 데클란에게 물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확실히 평소와 달라 보였다.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데클란 군?”
모든 파수꾼이 방을 나선 뒤, 로지에가 방에 홀로 남은 데클란에게 다가섰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니. 아까부터 회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요즘 무슨 걱정거리 있어?”
“없습니다.”
“정말로?”
“네.”
“데클란 군.”
반복되는 데클란의 부정에 로지에가 그의 이름을 또렷이 불렀다.
그제야 데클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처럼 굳은 얼굴의 로지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클란 군, 지금 인페르나 남작님은 여기에 안 계셔. 이야기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변방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과 함께 회의하러 가셨거든.”
“그래서요?”
“남작님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고민거리라면, 나한테는 말해도 좋아.”
“뭘 믿고요?”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데클란은 자신의 말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도련님. 제 말은…….”
“괜찮아.”
로지에가 데클란의 말을 일부러 가로막았다.
“사과할 필요 없어. 분명 데클란 군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렇지만 난 데클란 군을 내 친구로 보고 있어.”
로지에가 데클란을 향해 진솔한 목소리로 고했다.
“마음에 있는 고민거리가 있다면 내게 말해줘.”
“……말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데클란이 이번에는 제법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지에는 빙긋 웃었다.
“고민이 있다는 거네?”
“네.”
“그게 뭔데?”
“말할 수 없어요.”
데클란이 딱 잘라 대꾸했다.
그러자 로지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단정하지 마.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잖아?”
“그건…… 절대 아닌데요.”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게 바로 혈연이라고 했다.
로지에가 무슨 수로 혈연관계를 바꿀 수 있을까?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맙기는 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로지에는 데클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데클란의 답을 들은 로지에는 살짝 실망한 듯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흐음…… 그럼 꽤 복잡한 문제인가 보네.”
“네.”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데클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데클란의 복잡한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로지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말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나누면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지잖아?”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더 많은 사람이 제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면 마음이 오히려 더 무거워질 것 같은데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데클란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데클란을 보며 로지에는 더더욱 답답해졌다.
“데클란 군, 정말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야?”
“그게…….”
집요히 질문을 이어가는 로지에 때문에 데클란은 난처해졌다.
여기서 정말 아니라고 잡아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다. 로지에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었으니까.
항상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선의로 가득 찬 남자.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인페르나 남작님에게 뭐라고 말 올릴 것 같은데…….’
한참을 고민하던 데클란은 결국 조심스럽게 로지에에게 물었다.
“도련님은…… 국왕 폐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국왕?”
“네. 사실은 국왕 폐하가 평화 협상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너무 걱정돼서요.”
데클란이 재빨리 말을 둘러댔다.
순진한 로지에는 그의 말을 냉큼 믿어버렸다.
“국왕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 도련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그대로 말해주세요.”
“으음…….”
로지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한참이 지나서야 로지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너무 잔인할 것 같은데?”
“네?”
도대체 왜? 뭐가 잔인한 건데요?
로지에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데클란 군의 순수한 귀를 보호하기 위해 자세한 과정은 생략하고 말할게. 난 국왕 그놈을 족치고 싶…… 아니, 크게 혼쭐내주고 싶어.”
“그냥 말을 맙시다.”
데클란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인페르나 남작가와 국왕 사이가 좋지 않은 건 길을 지나가던 지렁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괜히 불편한 화제를 꺼냈어.’
그렇게 생각한 데클란이 급히 대화를 끊어내려던 순간이었다.
“방금 누가 국왕 어쩌고 소리를 냈나?”
쾅!
방문이 거칠게 휘둘렸다.
데클란은 그 자리에 굳어서고 말았다.
“……남작님.”
영주 회의에 나갔던 인페르나 남작이 때마침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