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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09)화 (109/177)

109화

데클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신 거지?

이 편지가 수도로 가지 않도록, 일부러 우체국에 가서 자신의 편지를 빼내 왔다고?

하지만, 어머니가 왜 그런 일을?

“어머니, 어째서—”

“어째서 그런 일을 한 거냐고?”

데클란의 어머니가 그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았다.

“데클란, 부탁이다. 수도로 편지를 보내지 마렴.”

이건 도대체…….

데클란은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앞에서 화가 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데클란은 녹아내리는 밀랍 인형처럼 그대로 통제를 잃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째서요? 제가 사샤에게 편지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데클란…….”

“어머니는 사샤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지금껏 별말씀 없으셨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거예요?”

데클란의 안에서 감정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는 여태껏 줄곧 사샤의 답장만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수도까지 편지가 가는 데 일주일은 족히 넘게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데클란은 매일 사샤의 편지를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간 데클란이 고된 하루의 일과를 버틸 수 있었던 건 집에 돌아가면 사샤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인페르나 영지 밖으로 아예 나간 적이 없다고?

게다가 그 이유는 어머니가 우체국에 가서 이 편지를 몰래 빼돌려서?

‘그럼 나는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허탈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뒤따랐다.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한 것 같았다.

부엌 앞에 오도카니 굳어 서 있던 데클란의 어머니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데클란, 난 네가 사샤에게 편지하는 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럼요? 그럼 도대체 왜 제 편지를 빼내서 감추신 건데요?”

“이 편지는 왕궁 안에 있는 기관으로 가는 것 아니니. 나는 네 편지가 왕궁 안으로 가는 게 싫어서 그렇다.”

침착함을 되찾은 데클란의 어머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러나 데클란은 제 어머니의 의도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머니. 왕궁 안으로 편지가 가는 게 도대체 왜요?”

“왕궁 안으로 가는 편지는 모두 다 검사를 받게 되어 있단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전부 다 기록된단다.”

“그걸 어머니가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 아니, 그건 둘째치고. 제 이름과 주소가 기록되는 게 뭐 어때서요?”

어머니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데클란은 더더욱 답답해졌다.

어머니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런 데클란의 갑갑한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어머니는 계속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았다.

“데클란, 왕궁 사람들은 너의 존재에 대해 몰라야 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실마리가 될 만한 건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왕궁 사람들이 내 존재에 대해 몰라야 한다…….

그 미묘한 표현에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어째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 그 말씀은 설마…….”

“데클란.”

데클란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추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데클란, 사실 서기관이 와서 마을 대표를 뽑는다고 했을 때, 나는 네가 아닌 사샤가 뽑혀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데클란의 어머니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데클란 네가 왕국 수도에 갈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왕 폐하를 볼 이유가 없겠구나, 싶어서.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아니?”

“어머니…….”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말해도 괜찮겠지.”

데클란의 어머니는 그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올렸다.

데클란의 어깨 위에 닿은 두 손은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제 음성을 끊지 않았다.

“데클란, 사실 네 아버지는…….”

* * *

늦은 밤.

왕국의 수도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잠겨져 있었다.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수도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사람들은 전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그리고 왕궁에 붙어 있는 군사 훈련소도 같은 상황이었다.

온종일 진행된 고된 훈련을 마친 특수부대의 부대원들은 하나 같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깜깜하던 숙소 1층에 있는 어떤 방 안에서 순간 팟! 하고 작은 불이 일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 어디 있지?”

“쉿, 조용히 해. 다른 방에 있는 놈들 깨면 어쩌려고?”

한 방에서 두 남자가 소곤소곤 귓속말하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몇 시간 전 2층 전체를 사샤에게 내어줄 수 없다며 반발하던 이들이었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고 통성명을 하고 말을 놓은 상태였다.

“쟝, 그 여자 어느 방에 있는지 알아?”

두 남자 중 칙칙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물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베센. 왕국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작령에서 온 남자였다.

쟝이라고 불린 흑발의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른다. 올라가서 살펴보면 되지 않겠어?”

“문을 하나하나 열자고? 그러다 그 여자가 깨면 어떡할 건데?”

“문 안 열고도 살펴보는 방법이 있어.”

쟝의 말에 베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수로?”

“내가 귀가 엄청 밝거든? 방 안에 사람 숨 쉬는 소리 있는지 들을 수 있어.”

작은 초를 든 쟝이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쟝의 호언장담에 자신감을 얻은 베센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로 흘러나오는 불빛 하나 없었다.

여자도 1층에 있는 사람들처럼 잠든 게 분명했다.

“어디 있는 거냐…….”

쟝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문 앞으로 슬쩍 다가갔다.

무언가 귀를 기울이는 듯이 두 눈을 감은 쟝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이 방이 아니야?”

베센이 속삭이듯 되물었다.

쟝은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음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쟝은 각 방을 지나가며 청력에 집중하듯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은 공용 욕실 바로 옆에 있는 방 앞에 섰다.

잠시 문 앞에 서 있던 쟝은 이내 베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그는 한쪽 엄지를 세우며 방문을 툭툭 가리켰다.

‘이 방이구나.’

이 방 안에 아까 그 건방진 여자가 자고 있겠구나.

베센은 숨을 죽이며 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건방진 여자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기회였다.

마을 대표로 뽑혀 이곳 수도로 오게 된 것을 보면 그 여자도 아마 힘을 꽤나 쓰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그 혹독한 훈련까지 다 마친 것을 보면 완전히 초보자는 아닐 터.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야밤에 기습을 당하면 당해낼 수 있겠어?’

베센은 속으로 큭큭 웃었다.

여자를 어떻게 할지는 아까 방에서 쟝과 말을 맞춰둔 상황이었다.

베센과 쟝은 여자를 방에 아예 가둬둘 생각이었다.

이 숙소에 있는 방들은 모두 잠금장치가 없었다. 그러니 방으로 들어가는 데엔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방으로 들이닥치자마자 두 사람은 여자를 제압한 뒤, 미리 챙겨온 노끈으로 여자를 꽁꽁 묶어서 방구석에 던져놓을 생각이었다.

행여나 여자가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니, 입을 틀어막을 헝겊도 챙겨왔다.

‘그러면 내일 아침 훈련에도 참석하지 못하겠지.’

베센은 혼자 흐흐 웃음을 흘렸다.

여자가 훈련이 나오지 않은 걸 훈련관이 알게 되면 크게 화를 낼 테다. 그러면 이 여자는 그 자리에서 퇴출당하게 되겠지.

베센은 이미 머리를 굴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했다.

만일 1층에 있는 남자들이 여자가 없는 걸 보고 그녀를 데리러 가자고 하면, ‘여자가 욕실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냐’며 핀잔을 줄 생각이었다.

놈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고소했다.

나중에 뒤늦게 발견되어 풀려난 여자가 ‘누군가 밤에 나를 공격했다’라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늦은 밤이라 여자는 누가 자신의 방에 쳐들어왔는지 모를 테다. 게다가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여자를 포박할 자신이 있었다.

‘이 여자 때문에 괜히 우리만 피해를 볼 수는 없지.’

애초에 2인실은 두 사람이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방이었지만, 베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샤는 혼자 불공평하게 한 층을 전부 다 차지한 민폐 덩어리로 보였다.

“준비됐지?”

노끈을 든 베센이 쟝에게 눈짓을 했다.

한 손에 헝겊을 든 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촛불을 후, 불어서 껐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서로 눈치를 교환한 두 사람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탕!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아악!”

따끔한 무언가가 베센의 팔을 정확히 강타했다.

순간 힘이 풀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노끈을 놓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방 안에 불이 환히 밝혀졌다.

‘부, 불이……?’

베센은 다급히 고개를 들어 빛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가 위에 등불용 마력석이 올려져 있었다. 모포로 덮어두고 있던 걸 걷어낸 것이다.

“뭔 쥐새끼들이 소곤거리고 있나 했더니…….”

마력석의 빛이 비친 곳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들이 아니라 그냥 개새끼들이었네?”

당황한 베센은 팔에 난 상처의 아픔도 잊고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뭐긴 뭐야. 니네 이제 주옥된 거지.”

잠옷 차림의 사샤가 쟝과 베센에게 고했다.

그녀의 손에는 탄총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쟝과 베센은 순간 느꼈다.

사샤로부터 내뿜어지는 강력한 살기를.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끔찍하고도 처참한 미래의 기운을.

‘도망쳐야 한다!’

베센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발이 땅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온몸은 만년설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물론 이런 베센의 사정은 사샤가 알 바가 아니었다.

—탕! 탕탕!

요란한 총탄 소리가 사샤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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