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끼익—.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문 여는 소리 뒤로 덤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니, 데클란?”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데클란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클란은 그녀에게 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로브를 벗었다.
“오늘은 별일 없으셨죠, 어머니? 아, 혹시 사샤한테서 편지 온 거 있어요?”
“오늘 별일 없었고, 편지는 온 게 없단다. 그나저나, 오늘도 늦게 돌아왔구나. 남작님을 만나고 온 거니?”
“네.”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솥 안에 담긴 스튜는 아직도 따뜻했다. 데클란이 언제 돌아올지 몰랐던 어머니가 계속 약한 불에 덥혀 놓은 것이다.
국자로 스튜를 한 국자 정도 퍼낸 데클란은 빳빳하게 마른 빵 한 조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데클란, 네가 보기에 어떠니?”
데클란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엇이요?”
“요새 이웃 황국과 전쟁이 날 거라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고 있잖니. 그게 사실이니? 남작님께서는 아무런 말씀 없으시고?”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 없어요, 어머니.”
데클란이 빵을 작은 크기로 북 찢어 스튜에 찍으며 고했다.
사실이었다.
황국이 왕국을 침략할지, 지금 이 상황으로선 그 누구도 확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황국과 왕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 소문은 완전히 근거 없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확실히 이웃 나라인 로판느 황국의 군사 움직임이 수상했다.
최근 황국은 대대로 병사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 따위의 자원들을 대거로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황국은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국왕은 인페르나 남작을 싫어했다.
그런 국왕이 인페르나 영지에 지원군을 보낼 리가 없다.
그 고집 센 국왕은 차라리 인페르나 영지를 포기하고 말지, 인페르나 남작을 도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인페르나 영지를 과감히 버리고 다른 영지에 요새를 세우는 방안을 채택하지 않을까.
‘황국은 우리보다 영토도 훨씬 넓고 군사력도 더 강해. 이대로 전쟁이 터지면 인페르나 영지는 그대로 짓밟힐 거야.’
데클란은 늦은 저녁 식사를 목구멍 너머로 꾸역꾸역 넘기며 생각했다.
머릿속에 복잡해서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를 따라 영지 곳곳을 순찰하느라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이곳저곳을 순찰해야 할 테다. 이 늦은 저녁 식사라도 하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절대 안 돼.’
지금은 일손이 하나라도 귀한 상황이다. 게다가 데클란처럼 마력을 쓸 수 있는 파수꾼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귀했다.
무너질 수 없다.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버텨야 한다.
불안감이 가득 찬 상황이었다. 평소 잘 웃던 로지에 놈도 오늘 미소 한 번 짓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는 거 빼고 잘하는 거 하나 없는 그놈이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걸 보면 상황이 제법 심각한 게 분명했다.
이렇게 앞이 어두컴컴한 상황에서도, 그나마 데클란을 안심시키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래도 사샤는 수도에서 안전하니 다행이야. 사샤를 왕국 수도로 보내길 잘했어.’
만에 하나 황국이 정말 왕국을 침략하게 되더라도, 황국 군사들이 수도까지 무너뜨릴 리는 없었다.
황국은 비록 일반 병사들로 만들어진 군사력이 강했지만, 마법사들이 거의 없었다.
반면 왕국의 귀족들은 마력 혈통을 이어받은 마법사들이었다.
최악의 경우 귀족들이 모두 힘을 합쳐 수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샤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아인 워낙 붙임성이 좋고 적응력이 강한 아이니 잘 지내고 있을 테다.
‘어서 사샤가 답장을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사샤가 인페르나 영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더 좋겠다.
‘국왕이 최대한 전쟁은 피하고 싶어서 황국에 평화 협상을 위해 외교관들을 보냈다고 하는데…….’
데클란은 오늘 인페르나 남작에게서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국왕이 먼저 황국에게 사람을 보낸 건 좋은 뉴스였다. 예의를 중시하는 황국에서 그런 국왕의 평화 의사를 막무가내로 거절하지는 않을 테다.
물론 마지막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몰랐지만…… 그래도 일단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휴우…….’
머릿속이 복잡해진 데클란은 속으로 얕은 한숨을 내쉬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정말 입맛이 없어졌다.
“벌써 다 먹은 거니, 데클란?”
의자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던 데클란의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비친 그녀의 얼굴 위로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빵 한 조각 먹고 배가 부르겠니? 더 먹으렴.”
“아니에요.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잘게요.”
데클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치우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를 한사코 말렸다.
“집에 있는 게 통밀빵뿐이라 미안하다. 요즘 흰 빵 구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식감이 조금 딱딱하겠지만 그래도 더 먹어야지…….”
데클란의 어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빵을 더 가지러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부엌에서 칼로 빵을 써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
어머니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잘 아는 데클란은 굳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음고생이 많으시겠지…….’
자기 자식이 매일 고생하고 다니는 걸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데클란의 어머니는 늘 그에게 말했다. 자신에게는 데클란 밖에 없노라고.
그녀는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데클란을 키웠다.
그녀에게 데클란은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였다.
‘만약 정말로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데클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면, 데클란은 다른 파수꾼들과 함께 황국 병사들에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다.
파수꾼이라는 책임감 때문도, 혹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사명감 때문도 아니었다.
데클란은 이 마을 사람들이 싫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사생아라며 벌레 취급하던 마을 어른들을 증오했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따돌렸던 제 또래들도 싫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사샤의 부모님을 제외한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데클란은 이 마을을 지키고 싶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맹목적이고 단순했다.
이곳은 사샤가 살던 마을이니까.
사샤와의 모든 추억이 이곳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녀가 수도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마을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다.
사샤와 함께 그녀의 부모님을 도와 가꾸던 옥수수밭도.
사샤와 함께 나무를 타고 놀던 숲도.
사샤와 함께 헤엄치며 더위를 삭히던 계곡도.
그 무엇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그녀의 기억대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사샤의 부모님은 어떻게 되지?’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는 만일 전쟁이 터지면 영지 주민들이 지하 통로를 통해 도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그들은 안전히 대피할 수 있을 테다.
이점은 걱정하지 말도록 하자.
‘그런데 만약 내가 죽어버리면?’
물론 데클란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선 마력을 이용해 돌파구를 만들어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데클란이 죽어버리면?
어머니에게는 데클란이 유일한 가족이었다. 남편이 없는 그녀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까.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데클란은 제 어머니가 본래 인페르나 영지 출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느 날 갓난아기였던 자신을 안고 이곳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 들었다.
어머니에게는 가족이 없는 걸까?
어머니는 어디 출신의 사람일까? 어째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걸까.
예전에 줄곧 궁금해했던 질문들이 데클란의 머릿속에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걱정거리가 많아지니 평소 잊고 있었던 온갖 잡생각이 났다.
데클란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의 파도에 가만히 잠겨 있을 때였다.
‘……음?’
데클란의 시선이 무언가에 닿았다.
어머니가 뜨개질하며 앉아 있던 의자였다.
의자의 쿠션 아래로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새하얀 종이였다. 어째선지 어디선가 많이 본 것처럼 낯익었다.
‘저게 뭐지?’
데클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장작이 탁탁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식은 빵을 도로 넣고 덥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클란은 별생각 없이 쿠션 아래로 튀어나온 종이를 빼냈다.
편지 한 통이었다.
그것도 데클란에게 매우 익숙한 편지.
‘이건…….’
데클란은 눈시울을 치떴다.
‘……내가 사샤에게 보낸 편지잖아?’
데클란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틀림없었다.
자신의 필기체로 적은 사샤의 이름과 그녀의 임시 주소가 적혀 있었다.
국왕의 전언을 전하러 온 서기관에게 직접 물어본 주소였다. 왕궁 안에 있는 군사 훈련 총괄 기관으로 편지를 보내면 알아서 편지를 전달해 준다고 했었다.
사샤가 수도로 떠난 날 저녁에 바로 적었던 편지다.
그다음 날 해가 밝기가 무섭게 우체국에 편지를 맡기고 근무하러 갔는데…….
그런데 왜 이게 집에 있단 말인가?
‘설마 반송된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만일 반송된 편지라면 봉투 위에 반송 사유가 적혀 있을 테다. 그러나 봉투 위는 아무런 흔적 없이 말끔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데클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건 도대체…….’
그때였다.
“데클란, 빵을 따뜻하게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마침 부엌에서 걸어 나오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데클란과 시선이 딱 마주친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무엇이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이상한 반응이었다.
굳이 저렇게 당황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데클란은 천천히 제 어머니를 향해 편지를 올려 보였다.
“어머니. 이 편지가 왜 집에 있는 거예요?”
“…….”
데클란의 질문에 돌아온 건 부엌 안에서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뿐이었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왜 집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왜 어머니가 앉아 계시던 의자 아래에 있어요? 이건 마치…….”
마치…… 어머니가 이걸 일부러 숨기려고 하신 것 같잖아요?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데클란은 그대로 숨을 삼켰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데클란은 편지를 꽉 쥔 채 자신의 어머니를 주시했다. 그녀가 그럴싸한 설명을 내어주길 바라며.
그러나 데클란이 원했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네가 쓴 편지가 사샤가 있는 수도로 가지 않도록…… 내가 일부러 우체국에서 도로 가져왔단다.”
그런 믿을 수 없는 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