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지금 손에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자, 전부 퇴소!”
……음?
훈련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나는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퇴, 퇴소라고?”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키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샤 누님, 지금 훈련관이…… 손에 검 없는 사람보고 나가라고 한 겁니까?”
“으음, 그런 것 같은데요…….”
연무장 안은 곧 혼돈에 빠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조용!”
훈련관이 호통을 치듯 다시 한번 언성을 높였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훈련관은 그런 이들을 평가라도 하듯 사방을 쭉 둘러보았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가? 지금 손에 검이 없는 자는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라!”
뭐야, 바로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란 거야?
나도 모르게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가히 혹독한 명령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길고 지루했는데. 거기다가 조금 전 무의미한 훈련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
그걸 모두 다 참고 견뎌냈는데, 고작 손에 목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가라고?
아무리 곱씹어봐도 불공평한 처사였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큰 소리로 항의했다.
“훈련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껏 사람을 개고생시켜놓고는, 짐을 싸고 돌아가라니요! 이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마을 대표들을 대하는 태도입니까!”
‘오,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용감한 사나이로군.’
낯선 이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해도 그렇지, 그걸 입 밖으로 말해?
감히 위아래도 모르고 훈련관에게 반박이라니…… 남은 살날을 적극적으로 축소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눈을 부릅뜬 훈련관이 사납게 눈동자를 굴렸다.
“도대체 누가 내 말에 말대꾸한 건가!”
“…….”
사나운 훈련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입을 꽉 다물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훈련관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비록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자신들의 심정을 대신 토로해 주었다는 사실에 은연중에 감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질문이 들리지 않는가? 어느 놈이 주둥이를 방정맞게 굴렸는지 물었다! 당장 나와라!”
팔짱을 낀 훈련관이 눈알을 부라리며 남은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제 입에 자물쇠를 무겁게 걸어 잠근 뒤였다.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의리가 있나 보네.’
나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관전하기로 했다.
아무도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자, 훈련관의 얼굴이 더더욱 사납게 돌변했다.
“방금 헛소리 지껄인 놈 당장 안 나와? 아니면 단체로 사이좋게 검 휘두르기 100번 더 추가하고 싶나?”
훈련관의 입술이 닫히기도 전에 사람들은 분분히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 새끼가 했습니다!”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 미친놈이 그랬습니다!”
빛의 속도로 배신당한 남자는 그대로 다른 훈련관들에게 끌려갔다.
‘가혹한 훈련은 자백제와 다를 게 없구나…….’
연무장 밖으로 퇴출당하는 용감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실감했다.
그 뒤로 더 많은 사람이 연무장 밖으로 쫓겨나듯 걸어 나갔다.
모두 훈련이 끝나자마자 목검을 집어 던지고 그대로 쓰러진 이들이었다.
몇몇은 잽싸게 검을 도로 주워 들고 퇴장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무장 내를 에워싸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훈련관들은 그런 사람들을 용케도 잡아냈다.
인페르나 남작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연무장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는 운 좋게 목검을 지팡이 삼아 쥐고 있던 키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몇 명 안 남았네요.”
연무장을 한 바퀴 둘러본 키오가 중얼거렸다.
“…….”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었다.
처음에 500명 넘게 시작했던 인원은 어느새 20명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훈련관이 우리를 개처럼 굴린 건 단순히 훈련을 위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자 더더욱 명확해졌다.
‘애초에 이런 고된 훈련을 3시간이나 할 이유는 없었어.’
검 휘두르기 3시간이라니. 그렇게 연습한다고 해서 단기간에 검술 실력이 확 늘지 않는다.
오히려 근력에 무리가 가서 다칠 가능성이 커진다.
훈련관들은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극악 난이도의 훈련을 시킨 거다.
‘애초에 특수부대에 5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필요 없었던 거야.’
특수부대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국왕과 왕족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국왕과 왕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오합지졸의 500명보다 소수정예의 20명이 더 낫다.
사람 수가 많을수록 물이 흐려지기 쉽다. 그리고 적에게 회유당해 국왕을 배신하는 이들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제야 나는 왜 훈련관들이 이런 변태적인 훈련을 시켰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딴 멍멍이 같은 훈련을 시켜서 고만고만한 놈들을 전부 탈락시킨 거네? 그리고 남은 놈들은 전부 다 개처럼 굴려서 기선 제압하겠다, 이거지?’
그야말로 일거양득 아닌가?
도대체 그 누가 마을 대표들을 모아다가 5% 미만의 인원만 남을 때까지 굴린다는 발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정말 무시무시한 놈이라는 건 알겠다.
어쩌면 사탄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런 놈의 아래에서 계속 굴러야 하는 운명이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참을 수 없는 허탈감에 공격당하고 말았다.
X발.
그냥 검 분질러서 버리고 탈주해버릴걸!
* * *
그렇게 지옥 같은 첫날의 훈련이 끝났다.
목검을 반납한 나와 키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이 그렇게 달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목을 축이며 땀을 닦아내고 있는데, 훈련관들이 나를 비롯한 남은 인원들에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이제 그 누구도 훈련관에게 ‘저희 어디 가요?’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괜히 불필요한 말을 꺼냈다간 질문한 사람만 손해라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훈련관이 이끄는 대로 터벌터벌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또 훈련 시키는 거 아니겠지?’
나는 만일 훈련관들이 또 훈련을 시킨다면…… 놈들을 살해할 생각이었다.
정확히 어떤 무기로 살해할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놈들에게 내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할 예정이었다.
하. 지. 만.
“먹어라.”
내 앞에 펼쳐진 건…… 산해진미의 뷔페식 식사였다.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잘 먹겠습니다!”
반쯤 이성을 잃은 나는 그대로 접시를 들고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전 느꼈던 살해 충동은 분자 단위로 분해되었다.
이 악마들! 그래도 당근과 채찍은 확실히 하는구나!
정신없이 집게를 들고 접시 위에 온갖 음식을 쌓고 있는데, 뒤에서 키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사샤 누님.”
“왜요, 키오 오빠?”
“지금 접시에 담으신 거…… 그게 뭐예요?”
“응? 이거요?”
나는 내 접시 위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내가 접시에 담은 건 통새우였다. 다른 양념 없이 생으로 삶아진 게 제법 신선해 보여서 담은 음식이었다.
“보면 모르겠어요? 새우잖아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키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새우……요?”
뭐야, 이 반응은.
설마 새우가 뭔지 모르는 건가?
“새우 처음 보세요?”
“네.”
내 질문에 키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키오를 흘겨보았다.
어? 진짜 새우가 뭔지 모르는 거야?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도대체 어떻게 맞장구를 쳐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모르는 거 맞아?
“새우…… 새우라…… 주로 어디 서식하는 동물이에요? 저희 마을 근처 숲에서는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두더지처럼 땅 밑에 사는 건가요? 그래서 제가 못 본 건가?”
정말 모르는 거 맞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접시 위에 담긴 새우를 관찰하던 키오에게 말했다.
“일단 하나 먹어 봐요. 호불호가 강한 음식은 아니에요.”
그러면서 나는 집게로 키오의 접시 위에 새우 한 마리를 올려주었다.
그렇게 접시 위에 음식 한가득 담은 나와 키오는 테이블에 앉았다.
“새우는 숲에 사는 게 아니라 바다에 살아요.”
키오에게 새우 껍질을 까는 법을 가르쳐주며, 내가 그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키오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바다요? 사샤 누님은 바다에 가보신 적 있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인페르나 남작령 근처에는 바다가 없었지!
키오가 새우가 뭔지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는 피식 웃으며 키오에게 말했다.
“아뇨, 저도 바다는 가본 적은 없는데요. 그냥 아카데미 다닐 때 급식으로 가끔 나와서 먹은 거예요.”
그러자 키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이며 크게 외쳤다.
“예에? 누님, 아카데미 나오셨어요?”
키오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덕분에 열심히 밥을 먹고 있던 사람들도 놀라 우리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야, 아카데미? 진짜로?”
“여기에 아카데미 나온 사람이 있어?”
“이야, 인재다, 인재! 평민인데 아카데미까지!”
사람들은 부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주목을 받게 된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걸!’
괜히 잘난 척을 하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해졌다.
그때였다.
“와아, 저도 아카데미 다녔는데! 반가워요!”
어디선가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아카데미 나오셨어요? 저는 오스첸스 남학교 나왔는데!”
어라.
오스첸스…… 남학교라고?
‘나랑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야?!’
화들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쿵쾅쿵쾅.
긴장감에 젖은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오스첸스 남학교 출신이라던 그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였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그는 순박한 청년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를 흘깃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
나와 눈이 딱 마주친 그는 어째선지 놀란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마치 나와 구면인 것 같은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