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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03)화 (103/177)

103화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사샤가 미드턴 마을의 대표로 왕실 특수부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데클란이 덤덤한 목소리로 로지에의 질문에 답했다.

이에 로지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데클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침묵 속에 데클란을 주시하던 로지에는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클란 군도 현장에 있었지?”

마을 대표를 뽑을 때 데클란도 그곳에 있었는지 묻는 말이었다.

“예.”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가만히 있었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왜 사샤 양이 대표로 뽑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뒀냐는 뜻이야.”

로지에는 자신의 앞에 선 데클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로지에의 시선은 평소와 다르게 가시가 돋친 듯 보였다.

‘……이 도련님은 왜 이렇게 날이 선 거야?’

데클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로지에를 내려다보았다.

인페르나 남작은 마침 공무를 보기 위해 출타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로지에는 남작 대리로서 집무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데클란은 파수꾼으로서 남작 대리인 로지에에게 상황을 보고하던 중이었다.

인페르나 남작과 달리 살갑고 서글서글한 로지에였다. 그래서 데클란은 오늘의 보고가 평소보다 더 쉽게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데클란의 착각이었다.

로지에는 다른 파수꾼들을 전부 내보낸 뒤 데클란에게 꼬치꼬치 질문을 던졌다.

‘벌써 두 시간 째야…….’

속으로 얕은 한숨을 내쉰 데클란은 다시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로지에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집에 돌아가서 사샤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마을 대표들이 탄 마차가 떠나기 전, 데클란은 서기관에게 물었다.

만일 특수부대에 있을 마을 대표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면, 어떤 주소로 보내야 할지.

그랬더니 서기관은 데클란에게 한 주소를 알려 주었다.

이곳 인페르나 영지에서 보낸 편지가 수도로 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다.

그러니 오늘 당장 편지 한 장을 보내기로 하자. 그러면 사샤가 수도에 도착한 뒤로 내 편지를 가장 먼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로지에에게 순서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로지에는 데클란을 쉽사리 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샤 양이 마을 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데클란 군은 아무런 생각 없었어?”

“무슨 생각이요?”

“사샤 양이 수도로 떠난 뒤 언제 돌아올 줄 알고? 게다가 특수부대라니, 거기서 사샤 양이 얼마나 고생할 텐데!”

그 말을 하는 로지에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얕은 수심에서 찰박거리는 파도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으으, 생각도 하기 싫어. 사샤 양이 특수부대로 들어가서 얼마나 고생할까……! 현장에 있던 데클란 군이 마을 사람들이 사샤 양을 추천할 때 막았어야지! 데클란 군은 사샤 양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그 마지막 문장이 데클란의 신경을 긁었다.

사샤를 좋아하냐고?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데클란은 로지에에게 고했다.

“좋아해서 보냈습니다.”

“어?”

순간 로지에의 얼굴 위로 깊은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좋아해서 보냈다고?”

“예.”

“나…… 지금 데클란 군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로지에는 데클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답했다.

“도련님도 잘 알다시피, 최근 이웃 황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서기관도 곧 전쟁이 발발할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함락되는 곳은 이곳 인페르나 남작령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황국과 가장 가까운 변방 지역인 주제에 변변찮은 군사력도 없는, 그야말로 방어력이 가장 형편없는 취약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인페르나 남작도 자리에 없겠다, 데클란은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솔직한 평가를 내뱉었다.

그는 로지에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고자질할 정도의 소인배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일 방어가 잘 되어 있는 곳은 국왕 폐하가 계신 수도입니다. 사샤는 수도에서 안전할 겁니다. 이런 허술한 인페르나 영지에서가 아니라요.”

데클란의 자비 한 줌 없는 노골적인 평에 로지에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말을 그렇게 고약하게 해, 데클란 군…….”

“사실이지 않습니까. 인페르나 남작님이 국왕 폐하와 척진 게 잘못입니다.”

“그건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야. 국왕 폐하께서 내 어머니가 북부 출신이자 백작가의 방계니까 그 세력을 견제하려고 일부러 지원을 끊은…… 아니다, 복잡한 정세 얘기는 넣어두고.”

처음에는 데클란의 말에 반박하려던 로지에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제 말문을 끊어버렸다.

“데클란 군. 왜 사샤 양이 미드턴 마을 대표로 나가게 했는지 설명 좀 해 봐.”

데클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설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황국과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침략당하는 곳은 저희 인페르나 영지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상자도 꽤 나겠지요.”

“만에 하나 그런 사태가 오더라도,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게 내가 지킬 거야.”

로지에가 이를 꽉 악물며 말했다.

로지에는 차기 인페르나 남작으로서 자신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자부심이 있었고, 또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는 만일 인페르나 영지가 전쟁에 휩쓸린다고 해도 모두를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데클란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희망적인 건 아닌지요.”

“희망을 가지는 게 뭐가 나빠?”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시니컬하게 맞받아쳤다.

“도련님은 날 때부터 하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세상은 원래 불공평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요.”

“원래 불공평하다고?”

“그래요. 까놓고 말하자면, 탁상공론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누구나 마음속으로 결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데클란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로지에를 응시했다.

“단순히 도련님이 높으신 곳에 앉아서 ‘내가 모두를 행복하게 할 거야!’ 따위의 포부를 외친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요.”

“그건…….”

“말 나온 김에 한 번 묻겠습니다. 만일 당장 내일모레 황국 군인들이 인페르나 영지로 쳐들어온다고 칩시다. 도련님은 무슨 재주로 영지 사람들을 구할 겁니까?”

“내가 앞장서서 싸울—”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데클란은 로지에의 말문을 거기서 뚝 끊어버렸다.

“저희 영지는 농경 사회인지라 군사력이 거의 없습니다. 다른 귀족 가문들이 기본으로 꾸리고 있는 기사단도 없고요. 그나마 파수꾼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 검술을 배운 이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당장 농부들을 모아도 전부 다 오합지졸이라 진영 한 번 못 짜고 박살이 날 겁니다.”

“…….”

데클란이 말을 늘어놓는 동안 로지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무래도 가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도련님의 환상을 깨트려 주겠어.’

데클란은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생은커녕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로지에가 무얼 알겠는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인페르나 남작과 다르게 로지에는 온실에서 곱게 키워진 화초나 다름이 없었다.

데클란은 지난 2년 동안 파수꾼으로서 로지에를 지켜보며 느낀 것이 있었다.

그는 항상 다정했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약점이었다.

“도련님, 기억하세요. 도련님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모두를 구할 수 없습니다.”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등 뒤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만일 황국 병사들이 이곳 영지로 쳐들어온다고 칩시다. 최악의 경우 도련님은 이 저택 지하에 있는 비밀 대피소에 몸을 숨길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 같은 평민들은요? 저흰 숨을 곳도 없어서 그냥 죽어요.”

“다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로지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욱한 감정이 해일처럼 데클란의 내면에 치밀어 올라왔다.

어째서일까.

“그럼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 비좁은 대피소에 주민들을 전부 다 쑤셔 넣으시려고요?”

결국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데클란이 날카롭게 반문했다.

“설마 저희를 전부 다 지하에 숨기겠다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지하의 비밀 대피소에는 숲과 연결된 통로가 있어. 그곳으로 도망치면…….”

“황국의 병사들이 퍽이나 친절하게 모두가 도망칠 때까지 저택을 습격하지 않고 기다려 주겠네요.”

데클란이 빈정거렸다.

그러자 로지에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데클란 군.”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데클란 군은 왜 오늘따라 유독 기어올라?”

“……예?”

순간 데클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 로지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강압적인 단어 선택과 달리, 로지에는 전혀 악의가 없어 보이는 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클란 군은 오늘따라 말하는 게 엄청 날카로워. 왜 그래?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니요, 없습니다.”

적막감을 걷어낸 데클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제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애초에 난 화 안 났어. 그러니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어.”

로지에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데클란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데클란 군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봐.”

“……정확히 어떤 생각이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말 말이야.”

로지에는 여전히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할 거야. 그 방법이 없어 보이는 건 분명히 우리가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해서 그래.”

“도련님…….”

“데클란 군,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을 깨트리지 말자.”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연히 말했다.

“나는 인페르나 영지에 사는 사람들이 절망 외에도 다른 게 있다는 걸 알면 좋겠다고 생각해.”

“…….”

“현실은 이미 충분히 각박하고 사는 것도 이미 많이 힘들잖아. 그런데 희망까지 없어지면 뭐가 남아? 난 인페르나 영지를 그런 생지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뭐라고 밀어붙일 수 있을까.

데클란은 로지에의 말에 수긍하기로 했다.

“하지만 난 데클란 군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봐.”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데클란 군의 말대로 사샤 양은 수도에서 더 안전하게 지내겠지. 그렇지만…… 특수부대에서 고생하지 않을까?”

이에 데클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사샤는 잘 먹고 잘 지내게 될 겁니다. 명색이 국왕 폐하를 바로 옆에서 지키는 병사인데, 설마 심하게 부려 먹겠어요?”

* * *

“잘 들어라! 제군들은 이곳에 탱자탱자 놀고먹으러 온 게 아니다!”

특수부대로 영입된 평민들을 향해 훈련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했다.

“제군들은 고생하러 온 거다! 알았나!”

이곳은 왕국 수도.

국왕과 왕족들이 사는 왕궁……에서 꽤 떨어진 군사 훈련소.

내가 인페르나 영지의 다른 마을 대표들과 함께 왕국 수도에 도착한 것은 어제 일이었다.

허름한 숙소에서 반나절을 쉰 우리는 곧바로 군사 훈련소로 보내졌다.

그런고로 오늘이 입대 1일 차였다.

그리고 나는.

“왜 다들 기합이 빠져 있는 건가! 단체로 머리 박고 팔 굽혀 펴기 100회, 실시!”

“모두 장비 챙기고 연무장으로 5분 안에 튀어나와라! 늦는 놈 한 명이라도 있으면 전원 오리걸음 100바퀴다!”

“지금부터 손에 쥔 목검을 앞으로 100번, 오른쪽으로 100번, 그리고 왼쪽으로 100번씩 휘두른다. 실시!”

간절히 탈영하고 싶어졌다.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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