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내 말을 들은 크로이는 얼빠진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계집이 진짜 미쳤나…….”
“안 미쳤고, 이 마차가 인페르나 영지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어서 내리시지?”
“뭐?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냐? 내리려면 네가 내려!”
“내가 왜?”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크로이에게 반문했다.
“난 너희들이랑 이대로 왕국 수도로 가는 데에 전혀 반감이 없거든. 그런데 넌 아닌 것 같은데, 괜히 분위기 흐리지 말고 내리지?”
“이게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크로이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주먹으로 마차 바닥을 쾅 내리쳤다.
“그만 하세요, 형님!”
보다 못한 키오가 그를 다시 말리려고 했다.
그러니 크로이는 키오의 손길을 뿌리쳤다.
“오냐,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붙어 보자!”
크로이가 침을 튀겨가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으, 뮤탄스균.
“잘 들어라, 계집! 만일 내가 이기면 넌 마차에서 내리는 거다!”
“크로이 형님!”
크로이의 선포에 키오는 기겁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크로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키오는 당연히 내가 크로이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여태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던 다른 두 남자도 두 눈을 크게 뜨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짐칸 안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속으로 한숨만 흘러나왔다.
이거 참 보기 좋은 꼬락서니다. 벌써부터 내부 분열이라니.
이놈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와중에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인페르나 남작이 내게 들려준 명언이었다.
‘여자의 매력은 체력과 근력, 그리고 완력에서 오는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은 힘으로 쥐어패서 서열을 바로잡도록 하여라.’
그래.
인페르나 남작의 말이 옳다.
대화와 소통의 시대는 끝났다! 고작 세 치의 혀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정정당당하게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때이다!
끝내 마음을 굳힌 나는 그대로 팔짱을 풀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자리에 섰다.
“좋아.”
내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오를 비롯한 방관자들이 모두 움찔거렸다.
크로이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네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대신 너랑 나랑 싸워서 내가 이기면, 네가 마차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 불만 없지?”
“하!”
크로이는 두 눈을 부라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셔츠 소맷자락을 위로 걷어 올렸다.
“그래, 바라던 바다! 어서 덤비—”
그러나 크로이는 그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퍽!
내 주먹이 그대로 크로이의 배에 꽂혀 들어갔다.
힘이 들어간 한방이었다.
“아앍!”
제법 빠르게 들어간 일격에 크로이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고스란히 그 공격의 충격을 받았다.
“큭……! 이, 이 자식이!”
예상치 못한 흐름에 당황한 크로이는 급히 반격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그 찰나를 노렸다.
나는 재빨리 내 가방 옆에 꽂혀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휙!
뽑히지 않은 검이 그대로 크로이의 무릎을 향해 날아갔다.
“악!”
휘둘린 검집에 맞은 크로이는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그가 비틀거리기가 무섭게 나는 놈을 향해 돌진했다.
“이야아아압!”
요란한 기합 소리와 함께 나는 온몸에 힘을 실어 크로이와 박치기를 했다.
콰쾅—!
놈의 육중한 몸뚱이가 그대로 마차 바닥을 내리쳤다.
머리를 나무 바닥에 정통으로 부딪혔으니 꽤나 아플 테다.
“으, 으윽…….”
봐라, 아프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크로이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냐?”
어느새 얼굴이 창백해진 크로이는 숨을 헐떡이며 나를 주시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크게 벌렸다.
“너, 너어, 이, 이…….”
“이 곱하기 이는 사.”
내가 크로이의 귓가에 대고 자비롭게 속삭였다.
“으, 으아아아악!”
바닥 위를 기어 몸을 일으킨 크로이는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쿠쾅!
흙먼지로 가득한 땅 위에 데구루루 구른 크로이는 급히 일어나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찌나 급히 가던지 자기 짐도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길가에 쓰레기 투기한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더럽군.’
두 손을 가볍게 턴 나는 짐칸 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안에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선 키오와 줄곧 가만히 상황을 방관하기만 하던 두 남자가 나를 멍하니 살피고 있었다.
“또 저한테 불만 있는 인간 있어요?”
나는 무리가 간 주먹을 살피며 관절을 풀어주었다.
우드득, 우드득.
본의 아니게 제법 큰 소리가 마차 짐칸에 퍼졌다.
순간 키오를 비롯한 남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있어도 없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누님!”
“저희가 눈이 삐어서 누님을 몰라뵈고 시건방을 떨었습니다!”
남자들은 급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어쩐지 모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왜 그렇게 앉아 있어요? 똑바로 앉아요.”
“예예, 누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누님.”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재빨리 제대로 자세를 잡고 앉았다.
“아까 제가 자기소개를 안 한 건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이제 생각해보니 제가 좀 무례하게 군 것 같네요.”
내 말에 남자들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누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가 뭐라고 감히 누님의 존명을 묻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 사람들 정말 왜 이래?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앞에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남자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설마 내가 크로이를 마차 밖으로 쫓아내서 겁먹은 건가?
‘고작 크로이 한 놈 쫓아낸 거 가지고 이렇게 쫀 거야?’
크로이의 덩치가 큰 건 사실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직업이 대장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당연히 어깨가 쩍 벌어지고 근육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크로이는 체구가 큰 것만 빼면 허수아비나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놈은 상체 근육과 비교해 하체가 지나치게 얇았으니까.’
아카데미에서 들은 검술 수업은 내게 상대의 무력과 체력을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크로이처럼 대장간 일 따위의 중노동으로 만들어진 근육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었다.
그는 무거운 걸 들고 휘두를 수는 있지만, 그 무게를 버티며 앞으로 돌진할 하체의 힘이 없으므로 쉽게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걸 노리고 크로이가 나를 향해 덤벼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놈은 아주 정석적으로 나한테 달려들었고, 난 그대로 다리에 장난을 쳤을 뿐이지.’
그리고 내 예상대로 크로이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볼 가치도 없는 싸움이었다.
검술과 무술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크로이는 애초에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건가?’
나는 키오와 다른 남자들을 다시 한번 흘끔 바라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친 그들은 하나 같이 ‘헉!’하고 숨을 거꾸로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와 어떻게 해서든 시선을 교환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음, 졸지에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군.
‘하아…….’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릴 것처럼 또다시 한숨을 내쉰 나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제 이름은 사샤고, 나이는 18살이에요. 미드턴 마을에서 왔고요, 저도 왜 제가 마을 대표인지 모르겠어요. 전 힘도 별로 안 센데…….”
그러면서 나는 남자들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모두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온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째선지 아무도 내 말을 안 믿는 눈치다.
‘음…… 역시 크로이를 괜히 날려버린 건가.’
약간의 후회가 돌았지만, 나는 곧 내 발언에 신뢰감을 불어넣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 싸움도 잘 못 해요.”
“…….”
침묵.
남자들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들은 아직도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나는 한 손으로 검을 등 뒤로 빼돌리며 최후의 변론을 이어갔다.
“저 검 잘 못 써요. 이건 그냥 장식용으로 가지고 온 거예요.”
“…….”
남자들은 당장 ‘구라치지 마!’라고 외치고 싶은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대로 더 입을 놀렸다간 도리어 공포감만 조성시킬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여하튼,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앞으로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잘 지내봐요.”
나는 최대한 귀엽고 깜찍한 표정을 자아내며 그들에게 미소를 내보였다.
그러자 남자들은 당장이라도 단체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처럼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도대체 왜 이래!’
아무래도 다들 벌써 나를 싫어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들을 지나 짐칸의 가장자리로 내 짐을 옮겼다.
“전 좀 잘게요.”
가방 안에서 부모님이 챙겨준 담요와 모포를 꺼낸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원래 모포는 데클란이 내게 준 등불용 마력석을 보관하려고 가져온 거지만…… 일단 이렇게라도 써야겠다.
이대로 어색하게 침묵 속에 앉아 있느니 눈이라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남자들은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예예, 누님. 숙면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부디 달콤한 꿈 꾸십시오, 누님.”
남자들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근데 왜 자꾸 저한테 누님이라고 불러요? 다들 나보다 연하예요?”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이가 뭐가 중합니까. 힘세면 다 누님입니다.”
“……?”
뭐지? 최근 인페르나 영지를 강타한 최신식 농담인가?
잠시 얼떨떨하게 굳어있던 나는 세 명의 남자들 중 아까 내 편을 들어주었던 키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기, 키오…… 오빠?”
키오는 자기소개 때 분명히 23살이라고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오빠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키오는 그 호칭을 듣자마자 몸을 뒤로 빼며 두 손을 가로저었다.
“오, 오빠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누님! 편히 말 놓으십시오!”
“에이, 그래도 저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데.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알겠죠?”
“누님이 원하신다면 절 할아범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키오가 두 눈에 힘을 주며 그렇게 고했다.
“아…… 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나는 그렇게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여하튼…… 저희 나중에 숙소에 도착하면 저 좀 깨워주세요.”
“예, 누님.”
“고마워요. 그럼 저는 이만 잘게요.”
나는 그대로 베시풀로 만든 모포를 덮고 두 눈을 감았다.
사실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자는 척을 해서라도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는데, 곁에서 소곤소곤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희들.”
“네, 키오 형님.”
“누님 주무신다니까, 너희들 숨소리가 너무 거슬리지 않도록 잘 단속해라. 누님이 깨시면 너희들도 다 깨지는 거다.”
“예, 누님께서 깨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누님을 섬기는 것이 저희 인생의 유일한 낙입니다.”
……이 인간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 * *
쾅!
인페르나 남작가의 집무실 안에 요란한 소음이 울렸다.
로지에가 주먹으로 집무실의 책상을 내리친 것이다.
파수꾼 복장의 데클란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왜 애먼 책상을 주먹으로 때리십니까.”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데클란 군? 사샤 양이 미드턴 마을 대표로 뽑혔다고?”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호소하듯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