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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01)화 (101/177)

101화

도대체.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

입을 꾹 다문 나는 퀭한 눈으로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X발…….’

속으로 욕이 절로 나왔다.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시야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마차의 바퀴가 길바닥을 차면서 연막탄과도 같이 흙먼지가 일어났다.

지금 나는 서기관이 끌고 온 마차의 짐칸에 올라타 있었다.

서기관이 끄는 마차가 내가 살던 마을을 벗어난 건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서기관은 다른 마을을 돌며 국왕의 칙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각 마을마다 대표를 한 명씩 뽑았다.

참고로 인페르나 영지에는 총 5개의 마을이 있었다.

하여 마차 짐칸에는 곧 나를 포함하여 5명의 마을 대표들이 들어섰다.

나를 제외하고 다른 마을의 대표들은 전부 다 건장한 남자 청년들이었다.

“인페르나 남작령에서 대표들을 모두 선출했으니, 이제 왕국 수도로 향하도록 하겠다.”

서기관이 나를 포함한 마을 대표들에게 이렇게 고했다.

“수도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대표들 중 한 명이 서기관에게 물었다.

“일주일 정도 걸릴 예정이다.”

‘뭣이라?’

서기관의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기겁했다.

인페르나 영지가 변방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도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나는 일주일 동안 이 비좁은 짐칸에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쿠션 방석이 있는 마차 내부도 아니고, 짐칸에 타서 가는데 일주일을 어떻게 버텨!’

그렇게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데, 서기관이 거드름을 피우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국왕 폐하께서 긍휼한 자비를 베푸셔서 식사와 숙소가 제공될 예정이다.”

긍휼한 자비는 무슨?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걸 해준다고 생색내고 있네!

아직 왕국 수도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벌써 불만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반면 다른 마을 대표들은 서기관의 말에 기뻐하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저희 같은 것들을 위해 식사와 숙소까지 준비해 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굽신거리는 마을 대표들의 태도에 서기관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에헴!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그렇게 나와 다른 마을 대표들은 마차 짐칸에 올라타게 되었다.

마차가 왕국 수도를 향해 출발한 게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내 짐가방에서 꺼낸 옷자락으로 임시 방석을 만들어 앉은 나는 무릎을 꽉 끌어안았다.

‘시X…….’

아직도 속으로 욕만 잔뜩 해 댔다.

반면 두려움과 흥분에 휩싸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다른 마을 대표들은 이제 슬슬 긴장감을 풀고 서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각자 소개 한 번 하죠? 앞으로 부대에서 같이 훈련할 동기들인데!”

마을 대표들 중 가장 사회성이 좋아 보이는 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땡볕 아래에서 밭일하는 대부분의 인페르나 영지 출신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그의 피부도 역시 건강하게 그을려 타 있었다.

“그럼 저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센레이나 마을 출신의 키오라고 합니다. 제 출신 집안은 원래 대대손손 전부 감자 농사를 짓던 집안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키오라고 소개한 청년은 그 뒤로 구구절절 자신의 배경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키오란 남자가 먼저 운을 뗀 뒤, 다른 사람들도 각기 자신의 이름과 출신 마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크로이라고 한다. 직업은 대장장이. 딱 봐도 내가 여기서 제일 나이 많은 것 같은데…….”

“저는 데레이트입니다. 출신 마을은…….”

“제 이름은 샨이에요.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자기소개에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가 앞으로 함께 왕실 특수부대에서 국왕을 섬길 영광을 누렸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서로 격려하고 있었다.

나만 빼고.

‘데클란 너, 왜 하필이면 날 추천한 거야……?’

나는 사흘 동안 꼬박 밤을 새운 사람처럼 힘없이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의 나는 크나큰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고, 딱히 다른 사람과 사회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여기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데클란인데…….’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밖에 없었다.

이런 내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다른 네 명의 남자들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그쪽이 미드턴 마을 출신이겠네요?”

“…….”

내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들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차 짐칸에 탄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마차에 올라탄 마을 대표들을 슬쩍 흘겨보니 대부분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의 남자들이었다. 딱 봐도 ‘저 힘 장사예요’라고 어필하는 체구였다.

그에 반해 나는 키도 작은 데다가 근육질 몸매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여자였다.

그러니 다들 내가 어쩌다가 이 마차에 올라타게 됐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평소의 나라면 기꺼이 이 상황에 대해 설명했을 테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많이 심란하거든요…….”

침울하게 말문을 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자기소개는 나중에 할게요.”

“하이고, 미드턴 마을에는 인물이 없나 보네. 이런 약해 빠져 보이는 아녀자를 보내다니.”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또 뭐야?’

조롱하는 목소리를 찾아 고개를 들어 올리자, 웬 콧수염이 난 남자가 날 흘겨보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더 몸집이 크고 맷집이 좋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 위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도끼 한 자루도 제대로 못 들게 생긴 여자가 왕실 특수부대에 가겠다니…… 쯧. 수도로 가서 우리 인페르나 영지만 망신 사겠군.”

“크로이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콧수염 남자의 말에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이름이 키오라고 했던가—가 다급히 외쳤다.

크로이라고 불린 콧수염 남자가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러면서 그는 대놓고 내게 삿대질했다.

“이 계집 좀 봐라. 딱 봐도 비실거리는 게 쫄아서 한마디도 못 하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렸냐?”

‘그래, 네가 이겼단다…….’

나는 크로이라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 누가 내게 시비를 걸어와도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이미 터진 둑처럼 온갖 의문과 고뇌가 범람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데클란 대신에 왕실 특수부대에 들어가게 된 거야? 그럼 원작 전개는? 데클란은 기사로 임명되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이레사 공녀는 누구랑 연애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질문과 물음표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 와중에 크로이란 놈은 자꾸 내 트집을 잡았다.

“어이, 미드턴 마을에 남자들 전부 다 죽었냐? 왜 하필이면 네가 마을 대표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군!”

“그만 하세요, 크로이 형님!”

급기야 키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크로이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크로이는 키오를 한 손으로 밀쳤다.

“가만히 있어 봐! 내가 틀린 말 하고 있냐고? 어?”

그러면서 크로이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다른 남자 두 명은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나와 크로이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행여나 입을 잘못 놀렸다가 크로이에게 한 대 맞을까 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에휴, 찌질이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내가 일방적으로 모욕당하는 상황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키오처럼 나서서 크로이에게 적당히 하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저 두 놈은 입을 꼭 다물고 철저히 방관하는 꼴이라니…….

파이프 연기처럼 한숨이 자꾸만 나왔다.

‘데클란이 나 대신 여기 있었으면 이런 상황도 없었을 텐데…….’

자꾸만 데클란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자리가 내게 버겁다고 느껴지기만 했다.

이런 내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로이는 큰 목소리로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나 참. 미드턴 마을에 케쉬키가 마을 대표로 나왔어야 하는데, 저런 계집이 나오다니…….”

“……케쉬키?”

낯익은 이름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크로이가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너도 케쉬키를 아는 거냐? 그 친구, 사냥 도구 보수하러 내 대장간에 자주 들르는데…… 쯧, 하여튼. 케쉬키 그 자식이 마을 대표로 나왔어야 하는데.”

그 말에 흐리멍덩해져 있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뭐라고?”

“케쉬키가 우리 마을 대표라니…… 그런 끔찍한 말을 입에 담다니. 정말 미친 거 아냐?”

웬만한 헛소리는 그냥 덮고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아니었다.

케쉬키가 우리 마을 대표라고?

나한테 집적대다가 총 한 방 맞고 도망친 그 자식이?

내 말을 들은 크로이의 인상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너야말로 지금 뭐라는 거야? 케쉬키가 적어도 너보다 더 강할걸? 그리고 왜 반말이야?”

“케쉬키랑 나랑 붙으면 내가 이겨. 그리고 난 나한테 초면에 반말하는 놈한테 반말 써.”

내가 깔끔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크로이는 나를 째려보며 날카롭게 내뱉었다.

“젠장. 약해 빠진 계집인 줄 알았더니, 머리까지 이상하네. 미드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약을 처먹고 돌았나 보군.”

“크로이 형님!”

듣다 못한 키오가 다시 한번 크로이를 막고자 했다.

“그 정도만 하십시오! 같은 부대에서 매일 얼굴 볼 사이인데, 굳이 이렇게 모질게 굴 필요 있습니까!”

그러나 키오의 설득은 도리어 크로이를 더더욱 분노로 이끌었다.

“키오 너 말 잘했다. 우리가 지금 아이들이 모인 놀이터로 가냐, 아니면 여자들이 모인 빨래터로 가냐? 우린 무려 국왕 폐하께서 선택하신 소수정예의 특수부대 군인이란 말이다! 이런 계집이랑 같이 있으면 우리 질이 떨어지잖아!”

가만히 크로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 새끼 주둥이 놀리는 것 좀 봐라?’

아까부터 자꾸 나를 두고 계집, 계집 하는 게 심히 거슬렸다.

게다가 자꾸만 나만 겨냥해서 소모적인 모욕을 뱉어내는 게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크로이.”

“너 왜 자꾸 나한테 버릇없이 반말을…….”

“너,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내가 크로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시비를 거는 게 마치 나에게 직접적인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로이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 마음에 안 든다.”

“왜? 내가 너한테 뭔 피해줬냐?”

“그래!”

크로이가 험상궂은 목소리로 외쳤다.

“왕국 수도에 도착하면 다른 영지에서 온 마을 대표들이랑 만날 텐데, 너처럼 약해 보이는 여자랑 같은 영지 출신의 대표라는 게 부끄럽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랑 같이 왕실 부대로 들어가는 게 쪽팔린다, 이거지?

크로이가 왜 심기가 불편한지 알아낸 나는 그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그럼 내려.”

“뭐?”

“나랑 같이 수도로 가기 싫어서 이 지랄인 거잖아? 그러면 당장 마차 내려서 너희 집으로 돌아가.”

팔짱을 낀 내가 당당히 크로이에게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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