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이른 아침.
두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드디어!’
드디어 그날이 왔다.
원작 소설 전개가 본격 시작되는 그 기념비적인 날이!
3월 1일. 왕국의 봄이 시작되는 날.
바로 이날에 데클란은 마을 대표로서 왕실 특수부대에 영입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여기까지 참 먼 길이었지.’
나는 시원한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나야! 그리고 이제 데클란을 여주에게 보내고 정말 끝이다!’
봄 날씨에 어울리는 가벼운 옷을 챙겨 입으며, 나는 속으로 후후 웃음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그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별>이란 제목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했다.
내가 빙의한 대상은 원작 소설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남주인 데클란을 어릴 적부터 괴롭히던 아이였다!
이대로 가다가 나중에 데클란과의 싸움에 휘말려 압사당할 것 같았다.
지난 생에서도 압사로 목숨을 잃은 나는 또다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기에 열심히 동분서주하며 데클란의 호감을 사고자 했다.
그리고 일렬의 복잡한 사건들과 전개들 이후.
나는 그만 데클란의 호감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사버리고 말았다!
덤으로 내가 사는 이 영지의 영주 아들인 로지에도 내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누가 로맨스 소설 아니랄까 봐,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는다고 바로 연애 감정 생겨나는 것 좀 봐…….’
소설 속의 세계는 과연 현실 세계와 다른 법칙에 따라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았다.
여하튼, 데클란과 로지에는 동시에 나에게 연애 감정을 품게 되었고, 곤란해진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2년 뒤에도 같은 마음이면, 날 다시 찾아오라고.
‘왜냐하면 그때 원작 소설의 전개가 제대로 시작되거든!’
그렇게 2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은 내 모든 고민이 전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는 히죽거리며 빵 한 조각을 수프에 찍었다.
“……뭘 그렇게 웃고 있어?”
식탁 맞은편에 앉은 데클란이 물었다.
“왜, 난 행복하면 안 돼?”
“그게 아니라…… 허파에 바람 들어간 것처럼 실실 웃고 있으니까 걱정돼서 묻는 거다.”
“그런 일이 있어.”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어제 늦게까지 순찰에 나섰던 데클란은 야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데클란에게 오늘 아침의 훈련은 쉬고 대신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나와 데클란은 지금 단둘이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너희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내가 내어준 빵 위에 잼을 바르며, 데클란이 물었다.
“다른 마을에 사는 지인한테서 새로운 종자 씨 얻어오신다고 새벽부터 나가셨어. 곧 돌아오실 거야.”
나는 빵을 한 조각 더 집어 손으로 뜯었다.
오븐에서 갓 나온 빵의 새하얀 속살은 쫄깃했다.
버터가 묻은 나이프가 빵 위를 쓸자, 온기와 닿은 버터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고소한 향이 테이블 위로 퍼져나갔다.
“넌 안 따라갔네?”
“그야 데클란 너 혼자 아침 먹을 거 생각하니까 불쌍해서.”
“너 없으면 난 아침 안 먹었어.”
데클란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안 가고 남은 거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밥 굶는 건 절대 못 보겠어.”
“내 어머니도 걱정 잘 안 하는 내 끼니를 왜 네가 걱정하고 있어?”
데클란은 괜히 무뚝뚝하게 말하면서도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관심을 주는 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데클란은 자신의 말에게 모이를 주고 물을 먹였다.
나는 그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어디로 순찰 가?”
“오늘은 우리 마을 주변만 돌 거야.”
말의 털을 빗으로 쓸어주며, 데클란이 대답했다.
나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긴, 오늘은 멀리 못 가지!’
그간 겨울 동안 영지에서는 좋지 못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건 바로 이곳 헤브니아 왕국과 이웃 나라인 황국의 사이가 악화하여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특히 이 소문은 인페르나 영지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인페르나 영지는 왕국과 황국을 가르는 변방 영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지난 몇 주 동안 낯선 기사와 병사들이 이곳 인페르나 영지에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러한 뒤숭숭한 분위기에 인페르나 남작은 불안해진 주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분주해졌다.
덕분에 바빠진 건 데클란과 같은 파수꾼들이었다.
남작은 각 파수꾼에게 각 마을을 맡아 민심을 살피고 불필요한 불안을 잠재우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데클란은 요 며칠간 계속 우리 마을과 인근 숲을 돌며 순찰했다.
데클란은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그럼, 난 간다.”
“응, 조심히 다녀와.”
나는 웃는 얼굴로 데클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너도 어디 멀리 가지 말고, 웬만하면 집에 있어. 황국에서 보낸 적군들이 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데클란의 말에 나는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데클란 너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나도 검 쓸 줄 알거든?”
“나도 아는데, 넌 밭에 나갈 때 검 들고 다니지 않잖아.”
“검보다 총알이 더 빠른데?”
그러면서 나는 내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탄총을 가리켰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종종 토끼나 야생 닭 따위의 작은 동물들이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총으로 그것들을 사냥해 일용할 고기를 얻곤 했다.
나와 내 총을 번갈아 바라보던 데클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걱정돼서 그래, 사샤. 밭에서 일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부모님 기다리고 있어.”
“네, 파수꾼님.”
그 호칭에 데클란은 나를 슬쩍 흘겨보다가, 이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나중에 보자, 사샤.”
“응, 잘 가!”
그렇게 데클란을 보낸 나는 밭에 가서 부모님이 시킨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내 손과 발은 열심히 노동하고 있었지만, 내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우리 마을에 국왕이 보낸 서기관이 도착할 거야. 그리고 데클란이 우리 마을 대표가 될 거고, 데클란은 왕실 특수부대에 들어가서 여주 이레사 공녀를 만나…….’
나는 앞으로 일어날 전개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최종 정리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나 막상 서기관이 정말 나타나 온 마을 사람들에게 국왕의 칙서를 읽어주고, 각 마을마다 ‘가장 체력이 좋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대표로 선출하라는 국왕의 뜻을 전해주었을 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는 사샤를 추천합니다.”
데클란이 기어코 나를 추천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하도 얼얼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하는 나를 뒤로한 채, 데클란은 마을 사람들에게 논리정연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완력이 어쩌고…… 승마 기술이 저쩌고…… 기본적인 호신술과 검술이 대단하다는 둥.
“야! 그만해!”
나는 데클란의 말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데클란의 주장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사샤는 힘이 좋지.”
“맞아. 우리 마을에서 사샤보다 더 센 청년이 있던가?”
혼란에 휩싸인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저기요, 여러분! 저보단 아무래도 데클란이!”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서기관님, 저희 마을의 대표는 바로 이 아입니다!”
나는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떠밀려 서기관 앞에 서게 되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시X.’
마음속에서는 그저 구수한 욕만 진하게 우러나왔다.
서기관은 내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좋다! 키가 조금 많이 작은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모두가 의견을 모아 선발한 청년이니, 내 믿도록 하지!”
뭐야, 내 키가 어때서요?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서기관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서기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마을 대표답게 눈길이 아주 살아있구나! 자네, 이름이 뭐지?”
“사샤……입니다.”
“좋다, 사샤. 당장 집으로 가서 짐을 싸도록.”
“네?”
이 아저씨가 지금 뭐라는 거지?
나는 멍청하게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서기관을 바라보았다.
내게 돌아온 것은 서기관의 무뚝뚝한 회답이었다.
“당장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여기서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움직이도록!”
아무래도 이건 농담이 아닌 실제 상황인 것 같았다.
집까지 어떻게 돌아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옆에서 아빠와 엄마가 따라온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양옆에서 두 사람이 자꾸만 내게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따위의 칭찬을 늘어놓는 게 들렸으니까.
그렇게 집에 어찌어찌 도착한 나는 멍하니 내 방 안에 굳어 섰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정말 필요한 짐만 챙기도록 하자. 가방은 이걸 쓰도록 하렴. 먼저 옷부터…….”
멍하게 굳어 있는 나 대신 부모님이 짐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반면 나는 나무토막처럼 굳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부랴부랴 챙긴 짐을 받은 나는 삐걱삐걱 고장 난 목각 기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
“데클란!”
단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과연 데클란이었다.
데클란을 보자마자 정신이 절로 퍼뜩 들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데클란, 도대체 왜 날 추천한 거야? 마을 대표는 내가 아니라 네가 갔어야 하는 건데……!”
“사샤.”
데클란의 두 손이 내 어깨를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손짓에 흠칫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데클란이 진지한 두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샤, 만일 우리 헤브니아 왕국과 이웃 황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 인페르나 영지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을 거야.”
“뭐?”
“그러니까 제발 왕국 수도로 가. 왕국 수도가 이곳보다 더 안전할 테니까.”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그대로야. 수도가 더 안전해. 잠시 피신해 있는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네 부모님은 내가 잘 챙겨드릴게.”
이어지는 데클란의 말에 나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아니, 그러니까…….
데클란은 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될까 봐 걱정돼서 날 왕국 수도로 보내버린 거라고?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을까.
‘애초에 전쟁 같은 거 안 난다니까!’
—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서기관이 끌고 온 마차 위에 올라탄 상태였으니까.
어?
나는 바보처럼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내 앞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손수건을 흔들며 내게 환호하고 있었다.
“잘 가라, 사샤!”
“수도로 가서 우리 마을을 빛내 주렴!”
“가끔씩 연락해 줘!”
인파 중에는 내 부모님도 섞여 있었다.
아빠는 엄마의 품에 안겨 엉엉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 딸이 정말 자랑스럽다! 국왕 폐하를 모시며 애국하고 오너라!”
그렇게 외치는 아빠의 옆에 데클란의 얼굴이 보였다.
데클란은 초조한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나는 바보처럼 데클란을 주시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지금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이 마차에 올라타야 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데클란인데.
왜 데클란이 아닌 내가 온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왕국 수도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