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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99)화 (99/177)

99화

내가 돌아온 뒤, 인페르나 영지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먼저, 로지에.

로지에는 인페르나 남작 작위의 정식 후계자로서 교육에 들어갔다.

제 어머니의 친가에서 검술 훈련을 마치고, 아카데미에서 기초 학력을 쌓은 로지에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영지를 다스리는 실질적인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지에는 인페르나 남작을 따라 집무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살피거나, 서명이 필요한 서류를 처리하는 등, 여러모로 영지 관리에 필요한 절차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또한 남작을 따라 영지 곳곳을 정찰하며 민심을 살피는 데 나서기도 했다.

로지에는 가끔 남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우리 마을을 지나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굳이 내가 있는 옥수수밭까지 찾아와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 서서 뒷짐을 진 채 나와 로지에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인페르나 남작을 마주해야 했다.

‘……보통 엄마들은 자기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싫어하지 않나?’

나와 로지에의 조금 긴밀한 우정에 흔쾌히 승인 도장을 찍는 인페르나 남작을 보며, 내 심정은 나날이 복잡해졌다.

저 반응을 보니 인페르나 남작은 나를 예비 며느릿감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째서?

로지에와 남작이 지나가고 난 뒤, 내 엄마가 나를 붙들고 물었다.

“얘, 얘! 너 로지에 도련님이랑 사귀니?”

“안 사귀는데요!”

밀짚모자를 쓴 채 옥수수 껍질을 박박 벗겨내며, 내가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마차에 타고 있는 로지에와 인페르나 남작이 제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뒤에서 옥수수 대를 낫으로 자르고 있던 아빠가 불쑥 물었다.

“왜 안 사귀니? 아빠는 로지에 도련님 정도면 좋은 사위로 인정해 줄 자신 있단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수확한 옥수수 더미를 양손에 꽉 쥔 나는 그대로 헛간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마침 우리 집 앞을 지나가던 마을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보더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사샤 너, 남작님 아들의 그거라도 되는 거니?”

그러면서 그는 나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슬쩍 들어 보였다.

숨겨진 애인을 뜻하는 은어였다.

순간 나는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분노를 꺾은 나는 옥수수 몇 개를 들고 데클란의 집에 찾아갔다.

“계세요?”

“사샤니?”

집 안에서 데클란의 어머니가 앉아 바느질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옥수수를 건넸다.

“방금 밭에서 수확한 거예요. 감자랑 당근 넣어서 수프를 만들어 드시면 맛있을 거예요.”

“어머나, 방금 수확한 걸 이렇게…… 늘 챙겨줘서 고맙구나, 사샤야.”

“별말씀을요. 데클란이랑 같이 맛있게 드셔주시면 제가 더 고맙죠.”

나는 헤헤 웃으며 다시 부모님이 있는 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데클란의 어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사샤 너 혹시…….”

“네? 왜요?”

데클란의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너 혹시…… 데클란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네?”

그녀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니.

이건 또 무슨 질문이지?

“데클란은…… 좋은 친구죠.”

한참 동안 적합한 단어를 찾던 내가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답했다.

그러자 데클란의 어머니가 또 질문했다.

“솔직히 말해보렴. 우리 데클란이 더 잘생겼니, 아니면 남작님 아들이 더 잘생겼니?”

“둘 다 잘생겼는데요.”

내가 사실대로 고했다.

데클란은 가시 돋친 한 송이의 장미와 같은 날카로운 영준함을 가지고 있었고, 반면 로지에는 한 송이의 고운 백합처럼 청순한 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두 명은 애초에 유형이 다른 미남이었다. 그러니 둘 중에 누가 더 낫냐는 취지의 질문은 답하기가 어려웠다.

내 대답을 들은 데클란의 어머니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정말이니? 데클란이 훨씬 더 잘생기지 않았어? 남작님 아드님도 잘생기긴 했지만, 나이 들면 훅 가버리는 외모잖니. 반면 데클란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잖아.”

“……?”

데클란의 어머니는 왜 이런 말씀을 내게 하시는 걸까.

‘자기 아들을 적극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나이가 되신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대로 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내가 이런저런 소문에 시달리며 부모님의 일을 돕는 동안, 데클란은.

“뉴린 마을에 마물들이 나타나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키테벨 마을에서 우물이 말라 가뭄이 극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뛰어난 파수꾼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인페르나 남작과 그의 곁에 자리 잡게 된 로지에에게 마을들을 순찰하고 온 보고를 올렸다.

데클란의 보고를 들은 남작은 즉각 처리 명령을 내렸다.

“파수꾼들 보내서 뉴린 마을에 나타났다는 마물들 찾아서 멀리 쫓아내고, 키테벨 마을에 마법사를 보내서 새로운 수맥을 찾도록 도와줘라.”

그렇게 데클란은 인페르나 남작을 도와 영지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둘 다 각자의 길을 걸으며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로지에 도련놈 새끼.”

나는…… 데클란을 볼 때마다 로지에의 욕을 들어야만 했다.

“데클란! 도련님 욕 좀 그만해!”

나는 행여나 다른 사람들이 나와 데클란의 대화를 들을까 걱정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와 데클란은 현재 마을 장터에 있었다.

원래 나는 부모님의 부탁을 받고 장터에서 혼자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을 순찰하던 데클란이 나를 발견했고, 마침 손님이 없어 심심해하던 나는 그와 함께 캐러멜 애플을 사다 먹으며 잡담을 떨고 있었다.

“로지에는 너무 물렀어.”

캐러멜로 뒤덮인 아삭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데클란이 투덜거렸다.

“존칭 써.”

옥수수 진열대 뒤에 놓은 나무 상자에 걸터앉은 내가 데클란을 흘겨보았다.

진열대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삐딱하게 선 데클란은 나를 흘끔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투덜거렸다.

“우리 도련님 새끼, 손가락은 착해도 너무 착해. 아주 가, 족같아.”

“너 진짜…….”

점점 참신한 방법으로 로지에를 욕하는 데클란을 지켜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나는 데클란이 왜 이렇게 로지에를 욕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인페르나 남작은 데클란이 각 마을에 일어난 사건 사고들에 대한 보고를 올릴 때마다 로지에의 의견을 묻곤 했다.

이를테면 일종의 시험이었다. 남작이 된 로지에는 이러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리고 로지에는 매번 기상천외한 답변을 내렸다.

“뉴린 마을에 마물들이 농작물 먹어서 농민들의 피해가 심하다고 말했어. 그런데 그 도련님이 해결책이랍시고 내놓은 방안이 뭔 줄 알아?”

데클란은 캐러멜 애플을 봉처럼 들고 휘휘 흔들었다.

“마물들이 마을을 습격한 건 숲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앞으로 뉴린 마을 주민들은 인근 숲에 들어가서 먹을 것 구하기 금지!”

그랬다.

로지에는 매번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해답을 내놓았다.

마물들이 농가까지 내려온 이유는 숲에서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하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그 원인의 주범은 숲의 식용 식물들과 작은 동물들을 모조리 가지고 간 인간들. 그러니 이번에는 인간이 마물들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

그게 로지에가 내놓은 결론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로지에의 주장대로 평소 얌전히 자신들의 영역에 사는 마물들이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번 경우 마물들이 숲에서 먹을 것들을 인간이 싹쓸이해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간과 마물이 공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요 관건이었다.

다만 문제는 로지에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다간 뉴린 마을의 주민들이 반기를 들고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래서 인페르나 남작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바로 파수꾼들을 보내 마물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가끔 도련님 머릿속 좀 들여다보고 싶다니까.”

데클란은 다시 한번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먹었다.

“저러다가 나중에 마왕 새끼를 자기 아들이라고 품고 마녀를 자기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네. 저렇게 착해 빠져서야.”

“착한 것도 능력이야.”

가만히 데클란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캐러멜 애플 위에 박힌 땅콩 조각을 떼어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봐. 만일 로지에 도련님이 안 착했다면, 우리가 애초에 인페르나 남작가에 들어가 검술을 배울 수 있었겠어? 네가 지금 파수꾼이 된 것도 어찌 보면 도련님 덕이지.”

“그렇긴 하지만…… 이러다가 우리 영지, 나중에 망하는 거 아니야?”

고개를 뒤로 젖힌 데클란이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망하긴 왜 망해?”

“도련님이 워낙 순해 빠지셔서 말이지. 나중에 다른 귀족들 사탕발림에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우리 영지에 불리한 계약이나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어떡해?”

“내가 그런 일 안 일어나게 막을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만일 인페르나 남작이 된 로지에가 잘못된 선택으로 영지 주민들을 힘들게 한다면, 내가 무례를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 말릴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우리가 약속한 2년 안 지났어.”

“엉?”

“로지에한테 가지 마. 2년 뒤에도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다는 걸 내가 증명해 낼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줘.”

그제야 나는 데클란이 내가 그를 버리고 로지에에게 갈까 봐 걱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얘는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졸지에 두 남자를 동시에 가지고 놀며 저울질하는 희대의 악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억울해진 나는 데클란에게 바른대로 말했다.

“나 로지에 도련님이랑 그런 사이 아니야.”

“나도 알아. 그런데 네가 하도 염문에 시달려서 말이지…… 가끔 나도 모르게 불안하단 말이야.”

“뭐가 불안해? 내가 설마 도련님이랑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 봐?”

나는 털털한 웃음을 흘리며 데클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쿡 찔렀다.

그러나 데클란은 내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말아 줘.”

“응?”

“차라리 나한테 말하고 도망가. 안 그러면 내가 미쳐버릴지도 몰라.”

데클란은 씨와 꼭지만 남은 사과를 들고 허리를 폈다.

“그럼 난 다시 순찰하러 간다.”

“그래, 농땡이 그만 피우고. 일 좀 해.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허비되는 건 보고 싶지 않은걸?”

“잔소리는. 네가 내 엄마야?”

“그러고 보니 내가 너희 어머니한테 옥수수 좀 드렸는데, 나중에 퇴근하고 나서 먹어.”

“고맙다.”

그 말을 남긴 데클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손을 흔들며 그대로 자리를 떴다.

* * *

그 뒤로 나는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지냈다.

물론 검술 훈련은 빼먹지 않았다.

나와 데클란은 새벽마다 만나 운동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 검술을 연습했다.

그 뒤로 나는 부모님 밭에 가서 일하고, 데클란은 파수꾼의 일을 하러 각자 떠났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집안에서 백수처럼 뒹굴뒹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인근 마을에 있는 대서소에 가서 일했다.

대서소란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 받아서 써주거나, 아니면 영지 출입증이나 농지 매매증 등 공용으로 필요한 서류를 양식에 맞춰서 작성해주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지식을 이곳에서 잘 써먹는 중이었다.

그러나 대서소에서 일할 때는 불필요한 사람들이 꼬이곤 했다.

예를 들어.

“데클란 님…… 언제 오실까?”

“파수꾼은 전부 다 못생긴 아저씨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데클란 님처럼 젊고 멋진 분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걸 알고 이 마을을 순찰할 때마다 찾아오는 데클란……을 보기 위해 모인 젊은 여자들.

그리고.

“여기 있으면 가끔 남작님 아드님이 오신다면서?”

“차기 남작님이 되실 분에게 눈도장 찍기 좋은 명당이야.”

데클란과 마찬가지로 나를 보기 위해 가끔 찾아오는 로지에……를 만나기 위해 모인 젊은 남자들.

‘재택근무하고 싶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대서소에서 나는 혼자 험악한 미소를 지으며 일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나와 데클란은 여전히 매일 아침 만나 체력을 단련했고, 검술을 익히고 강화하는 데에 힘을 썼다.

차기 남작으로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로지에도 가끔 얼굴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2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원작 소설이 시작되던 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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