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데클란의 말에 나는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안 돼, 데클란! 미남의 첫 키스는 소중하다고!”
“……네가 싫다는 건 안 해. 그 얘기가 아니라, 새벽 때 하던 이야기 계속하자는 거야.”
“새벽 때 하던 이야기……?”
새벽에 나랑 데클란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벌써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간신히 끄집어올리며, 나는 내가 데클란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마구간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점점 느릿느릿해졌다.
“사샤 네가 그랬잖아. 나에겐 운명의 사람이 있다고.”
“운명의…… 사람?”
데클란의 말을 듣자, 그제야 새벽에 있었던 일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데클란이 내게 입을 맞춰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이것저것 입에 잡히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넌 운명의 사람이 있다고! 키스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해!’
데클란이 이어서 물었다.
“내 운명의 사람이라는 거, 그게 도대체 뭔데?”
그야…….
그거야, 당연히…….
나는 웃음기 없는 미소를 지으며 데클란을 향해 지긋한 시선을 던졌다.
‘불쌍한 녀석…… 넌 아직 모르겠지…….’
우리 불효자 데클란아, 잘 들으렴…….
나는 미래시가 있어서 네가 원작 후반부에 여자 주인공인 이레사 공녀와 격렬한 로맨스 서사를 찍는 걸 보고 왔거든…….
그리고 데클란 너는…… 무려 [동정남]과 [절륜남] 키워드가 동시에 달린 천하무적의 남주란다…….
참고로 너랑 이레사 공녀의 19금 외전…… 참 좋더라…… 내가 책갈피를 38개나 꽂아뒀어…….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나는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꽉 쥐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데클란, 넌 사실 소설 속 등장인물이고 나는 네가 어떤 인물과 이어지는지 알고 있단다!’라고 말할까?
그렇게 설명했다간 졸지에 마녀로 몰려서 사형당하거나, 아니면 미친 여자로 불리며 조롱당하다가 결국 마녀로 몰려 사형당할 게 분명했다.
한참 동안 입만 열었다, 닫았다 를 반복하던 나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데클란, 넌 나중에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무척이나 매정한 거절로 들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 외에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간 마녀 통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고!
데클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보다 더 좋은 사람 없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는 사샤 넌 내가 너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 걸 어떻게 알아?”
오, 질문에 관한 질문인가. 꽤 고단수 농간을 부리는걸?
나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데클란, 잘 들어.”
두 팔을 들어 올린 나는 데클란의 어깨를 꽉 쥐었다.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사샤, 난…….”
“난 널 친구로 보고 있어. 그 이상은 안 돼.”
내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순간 데클란의 표정이 호수 위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라앉았다.
“사샤, 넌 내게…….”
“지금의 넌 너무 감정적이야.”
데클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아마 나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기쁜 마음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래.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소설에 빙의한 악역 엑스트라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주에게 무작정 잘해주다가, 그게 계기가 되어 도리어 남주에게 집착 당하는 전개.
물론 나도 데클란이 좋았다.
하지만 그건 연정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무엇이든지 다 버릴 수 있는 각오를 가진 남자.
나는 그런 데클란이 좋았다.
나를 좋아하는 친구 데클란이 아니라, 이레사 공녀를 좋아하는 남자주인공 데클란이 좋았다.
데클란에게는 많은 고통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아주 소중한 인연을 얻고 그녀와 행복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데클란의 그러한 미래를 알고 있기에, 나는 더더욱 그를 소유할 수 없었다.
내가 없는 데클란의 미래가 얼마나 화창하고 맑은지 잘 알고 있으므로.
나는 차마 데클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데클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에…… 2년 뒤에도 같은 마음이면?”
“뭐?”
“만약에 2년 뒤에도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을 못 만나면?”
“그럴 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2년 후에 데클란은 왕국의 수도로 가서 이레사 공녀를 만나게 될 테다.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고귀한 한 송이의 장미 같은 이레사 공녀를 본 데클란은 그녀에게 마음을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를 알 리가 없는 데클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확신하지 마. 만약 내가 정말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때는 괜찮아?”
그래, 이레사 공녀를 만나고 난 뒤에도 네가 같은 마음인지 어디 한번 보자.
속으로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2년 뒤에도 같은 마음이면 나에게 다시 찾아와.”
“알았어. 그때까지 기다릴게.”
데클란이 사뭇 진중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2년 후의 데클란이 이불을 걷어차며 후회하는 모습이 벌써 눈에 훤했다.
‘이레사 공녀를 만나고 난 뒤에 도대체 어린 시절의 자신은 왜 그런 약속을 했느냐고 후회하겠지?’
오늘 이 순간은 분명 데클란의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고 보니, 잠깐만.’
이거, 어쩌다 보니 2년 뒤에 데클란과 로지에의 고백에 동시에 대답하게 됐잖아?
엑스트라인데 이렇게 인기 절정이어도 괜찮은 건가요?
졸지에 어장 관리자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뭐…… 어차피 데클란의 고백에 대한 답은 거절이고, 로지에의 경우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면 되는 거야.’
두 사람이 나에게 동시에 호감을 느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내게 호감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부려 먹거나 이용하는 건 정말 잘못된 일이다.
나는 결코 이 두 사람의 감정을 악용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새 나와 데클란은 마구간에 도착했다.
말이 묶인 곳으로 다가가자, 지푸라기 마른 냄새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것 좀 들어줄래?”
데클란이 내게 작은 등불 하나를 내밀었다.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 안에 달린 등잔과 같이 마력석이 달린 등불이었다.
이미 해가 진 시각이었다. 이대로 아무런 불빛도 없이 달렸다간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타서 그냥 안고 있으면 돼.”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불을 꼭 쥐었다.
“자.”
먼저 능숙하게 말 위에 올라탄 데클란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정장 차림이었던 데클란은 영락없는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였다.
말이 백마가 아니라 흔한 갈색의 말이라는 점만 빼면.
“앗.”
데클란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라타던 도중 나는 그만 숄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날아가는 숄의 끝자락을 잡았다.
“저녁이라 바람이 강하네.”
다시 숄을 어깨 위에 두른 나는 말 안장 위에 제대로 앉으며 하하 웃음을 흘렸다.
그때 내 뒤에 앉아있던 데클란이 무언가 중얼거렸다.
“상처…….”
“응? 상처…… 아, 그거!”
그제야 나는 내가 저녁 내내 숄을 걸치고 있었던 이유를 다시 기억해냈다.
등 뒤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지!
나는 급히 숄로 내 등을 꽁꽁 감쌌다.
“미안해. 별로 보기 좋은 건 아닐 텐데, 내가 덜렁거리다가 실수로 그만! 그냥 못 본 척해줘!”
그렇게 능청스럽게, 최대한 장난스럽게 지껄였다. 행여나 데클란이 내 상처를 보고 마음이 상했을까 봐.
그러나 데클란의 입에서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
말고삐를 쥔 데클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데클란의 앞에 앉은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차마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이윽고 데클란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것을 신호로 말이 나와 데클란의 집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데클란이 내 손을 잡아 말 안장의 손잡이로 이끌었다.
내 손을 손잡이로 이끌었던 데클란의 손이 그 위에 포개어졌다.
“잘 잡아.”
“응…….”
나는 조용히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내 손을 덮었다가, 이내 다시 고삐를 두 손으로 잡았다.
데클란의 가슴팍이 등 뒤에 닿았다. 그 위로 불안정한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든 등불에서 흘러나온 빛이 어둑한 숲속 길을 밝혔다.
그렇게 나와 데클란은 침묵 속에서 말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갔다.
“네가 등불을 들어 준 덕분에 사고 없이 잘 도착했네.”
데클란은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말 태워줘서 고마워.”
나는 헤헤 웃으며 데클란의 손을 잡았다.
나를 말에서 내려준 데클란은 말을 자기 집 옆에 박아둔 말뚝에 묶었다. 그러더니 그는 나를 향해 시선을 내려뜨렸다.
“사샤.”
“응?”
“아파?”
“뭐가?”
데클란은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내 등 뒤를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데클란이 아직도 내 등에 난 상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어릴 적 내게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죄책감과 후회를 느끼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그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데클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게 언제 생긴 상처인데! 이제 아플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데클란. 하나도 안 아파.”
“사샤.”
떨리는 듯한 데클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구멍에 시큰시큰한 무언가가 걸려있는 것만 같은 그런 음성이었다.
“난…… 앞으로 평생 네 뒷모습을 바라볼 수 없을 거야.”
“데클란…….”
“네 옆이 아니면 난 아무 곳에서 서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 뒤로 데클란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서늘한 여름밤의 바람이 나와 데클란의 머리카락을 휘휘 내저으며 사라졌다.
밤하늘 위에 총총 박힌 별들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인페르나 영지는 다른 지역보다 해발 고도가 더 낮다고 들었다.
그래서 땅과 하늘 사이의 거리가 특히나 멀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아카데미에서 바라보던 별보다 이곳 인페르나 영지에서 보는 별이 더더욱 밝아 보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보는 별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던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별>.
그건 이 소설의 제목이자, 이레사 공녀를 향한 데클란의 사랑을 대변하는 한 마디였다.
훗날의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를 하늘 위의 별과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낮고 낮은 곳에서 별을 올려다보는 보잘것없는 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데클란, 넌 별 같은 사람이야.”
“…….”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은 잠잠했다.
그가 반응하든 안 하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 나갔다.
“네가 없었으면 난 진작 인페르나 영지를 떠났을 거야.”
“……어째서.”
“그야 여긴 재미가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인페르나 영지처럼 지루한 곳이 또 있을까? 주변에는 놀만 한 곳도 하나 없고, 먹을 건 옥수수랑 옥수수뿐이고. 게다가 재수 없게도 이 마을에 사는 내 또래 놈들은 하나 같이 품행 불량인 양아치야.”
“…….”
“하지만 이곳에 데클란 네가 있어서 난 즐거웠어.”
나는 내 머릿속의 생각을 그대로 데클란에게 들려주었다.
“만일 네가 없었더라면 난 이 영지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을 거야. 고마워, 데클란. 넌 내가 이곳을 사랑하게 해준 별이야.”
“내가 만일 별이라면…… 넌 나를 밝게 빛날 수 있도록 해주는 태양이겠네.”
데클란의 낮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데클란.
너는 앞으로 나보다 더 빛나는 별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별똥별이 되어서라도 네 곁으로 가겠다고 말해줄 거야.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해져.
“2년 뒤에도 그런 말을 하는지 지켜볼게.”
“……2년쯤이야, 금방 지나가.”
널 5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2년쯤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데클란은 휙 등을 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자, 나의 사샤.”
그 말을 끝으로 데클란과 나는 유난히 길었던 하루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