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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97)화 (97/177)

97화

당장 운동으로 울분을 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 데클란이 로지에를 향해 다그쳤다.

“왜 뒤늦게 부끄러워하시는 건데요! 아니, 애초에 그런 편지 쓰면서 하나도 부끄럽지 않으셨어요?”

“나, 나는 그냥 내 마음에 있었던 걸 그대로 글로 썼을 뿐이야! 설마 그걸로 다른 사람들이 사샤 양을 향한 내 마음을 눈치챌 줄은 몰랐다고!”

“하아…….”

데클란은 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대체 이 순해 빠진 도련님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와중에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또 뭔가요.”

“데클란 군도 사샤 양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요?”

“그럼 우리 둘 다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거잖아?”

“그런…… 셈이죠.”

“그런데 우리 왕국은 일부일처제인데, 어떡하지?”

로지에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데클란은 당장 폭발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왜 그딴 멍청한 고민을 심각하게 하는 건데요! 도련님만 빠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든요?”

“싫어.”

“뭐라고요?”

데클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반대편에 앉은 로지에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데클란 군이 사샤 양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사샤 양을 좋아해. 아니, 어쩌면 데클란 군보다 내가 사샤 양을 더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멍청한 개소리 좀 지껄이지 마세요.”

데클란이 날카롭게 이죽거렸다. 그러자 로지에의 두 어깨가 축 늘어졌다.

“데클란 군, 말 좀 예쁘게 구사해 줘. 나 마음에 상처받을 것 같아…….”

“……전혀 현명하지 않은 유언비어를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 말라, 이겁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데클란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연신 마른세수했다.

“그러면 데클란 군도 사샤 양에게 고백하고 와.”

“예?”

데클란은 순간 자신의 귀가 머리에 제대로 붙어 있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

지금 이 도련님이 또 뭐라고 지껄이시는 거지? 데클란 군‘도’라고?

“……도대체 발코니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오신 겁니까?”

그러자 로지에가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벌렸다.

“별일 아니야. 사샤 양에게 청혼했어.”

별일 맞잖아요! 이 도련놈아!

속으로 로지에를 향한 욕을 뇌까린 데클란은 다급히 로지에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사샤가 뭐라던데요?”

“2년만 기다려달라고 했어.”

로지에의 대답을 들은 데클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지, 아니면 낙담하며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사샤는 왜 저런 대답을 했단 말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사샤가 로지에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데클란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보면 2년 뒤에 사샤가 로지에의 마음에 긍정적인 답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어째서?

‘왜 거절하지 않은 거야, 사샤?’

설마.

설마, 사샤는 로지에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래서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그때, 로지에가 불쑥 질문했다.

“데클란 군은 자신 없어?”

분명히 도발적인 말투였지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순수했다.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지금 가서 사샤 양에게 고백해.”

“그게 무슨…….”

“그러면 바로 알 수 있잖아. 사샤 양이 데클란 군을 좋아하고 있는지, 아닌지.”

“…….”

데클란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발코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과 발코니 사이는 불투명한 유리 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발코니에서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사샤는 아직도 저기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러하겠지.

로지에에게 고백받은 사샤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당혹감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로지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을까?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끌어안을까? 왜 이제야 말했냐면서 장난스럽게 볼에 키스할까?

“……아니요.”

데클란의 입술에서 그런 짤막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더 안 할 거예요.”

“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납니다.”

그 말을 마친 데클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 덕분에 옥수수 많이 먹었어요. 사샤가 좋아했겠네요.”

“응. 좋아하는 것 같았지.”

로지에는 환하게 웃었다. 사샤가 기뻐해서 정말 행복해하는 모습이었다.

“…….”

데클란은 아무런 말 없이 로지에를 응시했다.

저 얼굴에 어떻게 찬물을 끼얹을 수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인정해야 했다.

로지에는 좋은 사람이다.

연적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인물 좋은 녀석이다.

로지에는 필시 넉넉한 집안에서 어머니와 집안 친척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을 테다. 그뿐만 아니라 남작가를 비롯한 친척 가문 사용인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았겠지.

그런 그는 부족함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자라났을 테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할 것이다.

말하자면 요즘 보기 힘든 순수함을 간직한 다정한 남자였다. 그런 로지에라면 사샤에게 절대로 상처 주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다.

데클란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지에가 싫어졌다.

자신은 로지에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사샤에게 이루어 줄 수 없는 모습을 로지에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남은 연회 동안 좋은 시간 보내세요, 도련님. 저는 다른 분들에게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런 정중한 말을 남긴 데클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쓰라린 패배감이 느껴졌다.

사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로지에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발코니 쪽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행여나 지금 이 얼굴을 사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 이렇게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는 건지.

‘하아…….’

한숨이 자신의 분신이 된 것처럼 자꾸만 흘러나왔다.

무작정 연회장을 횡단하던 데클란은 지난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야밤에 사샤를 찾게 된 건 순전 우연이었다.

잠결에 소음이 들려와 두 눈이 절로 떠졌다. 파수꾼 일을 하다 보니 작은 소리에도 온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사샤와 케쉬키가 보였다.

‘저 새끼는 뭐야?’

순간 기분이 언짢아진 데클란은 겉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케쉬키가 자리를 떠난 뒤, 데클란은 가만히 사샤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에 비친 검은 머리카락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리던 사람이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다.

그 사실이 데클란의 심장을 미치도록 뛰게 했다.

당장이라도 사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간 그녀를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고.

그녀가 보내온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계속해서 되새기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붙들고 있었다고.

그러나 데클란은 애써 점잖은 척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넌 피곤할 텐데 잠이나 자지, 왜 밖에 나와 있는 거야?’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더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정작 입을 열리면 나오는 말들은 사무적이고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빙빙 돌고 돌다가 데클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사랑스러워, 넌.’

그 말을 뒤로 데클란은 사샤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말로 차마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두 사람의 입술이 와닿기 바로 일보 직전.

‘자, 자, 잠깐만!’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사샤가 왁! 소리를 내질렀다.

데클란은 그대로 우뚝 멈췄다.

‘왜 그래.’

‘우리…… 지금 키스하는 분위기야?’

‘……어.’

‘그, 그렇구나! 난 또 나 혼자 착각하는 줄 알고!’

사샤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데클란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계속해도 돼?’

‘뭐? 아, 안 돼!’

사샤는 데클란을 그대로 뒤로 밀어냈다.

‘저, 정신 차려, 데클란. 너, 너 지금 졸려서 그래. 아까 몇 시간 동안이나 요리하느라 피곤하지? 아니면 고기 절일 때 쓰던 와인에 취했다던가? 그런 거지? 응? 뭐라고 좀 말 해봐!’

사샤 본인이 오히려 더 술에 취한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잠시 가만히 굳어 서 있던 데클란이 차분히 답했다.

‘파수꾼은 술 안 마셔.’

‘여, 여하튼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넌 운명의 사람이 있다고! 키스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해!’

‘사샤 넌 내가 잠결에 아무한테나 입술 들이미는 사람으로 보여?’

‘지금 그러고 있잖아! 정신 차려, 데클란! 나도 정신 차릴게!’

‘네가 정신을 차린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 어서 가서 발 닦고 얼굴 씻고 잠이나 자! 그리고 오늘 밤 내 꿈에 나타나기만 해 봐!’

그렇게 외친 사샤는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

홀로 집 앞에 남겨진 데클란은 말없이 사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샤가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거절당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 * *

연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느냐?”

인페르나 남작이 나와 데클란을 불러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부가 거나하게 취한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나는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서 하녀들과 손을 맞잡고 큰 원형을 만들어 춤을 추고 있는 마부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의 불꽃처럼 흔들거렸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추임새를 넣어주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하녀들도 다 취해서 제 드레스를 벗겨주지 못할 것 같네요.”

하녀들이 입혀 준 드레스는 하필이면 후크가 등 뒤에 있는 것이라 나 혼자서 벗을 수 없었다.

저렇게 취한 하녀들에게 드레스 탈의를 부탁했다가 드레스라도 찢어지거나 옷감에 손상이 가는 사고가 나면 큰일이다.

“사샤 네가 이해하거라. 너도 알겠지만, 이 영지는 술 마시는 것 외에 달리 재미난 게 없어서.”

인페르나 남작이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피식거렸다.

거기에다 대놓고 맞아요! 라고 외치며 하하호호 웃을 수 없었던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오늘도 화목한 인페르나 남작가였다.

“제가 말을 끌고 사샤를 데리고 집으로 가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데클란이 먼저 나서서 제안했다.

남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허락했다.

듣자 하니 데클란은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말 한 필을 빌려 쓰고 있다고 했다.

남작과 로지에를 포함한 남작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올린 나와 데클란은 둘이서 남작가 저택을 걸어 나왔다.

터벅, 터벅.

‘……뭐라고 말해야 하지?’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대로 데클란과 함께 침묵 속에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연회는 어땠어?’ 따위의 지루한 질문이라도 꺼내려던 찰나.

“나 술 안 마셨어.”

데클란이 먼저 정적을 깨고 그런 말을 툭 던졌다.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어?”

“로지에 놈에게 물어봐. 술 한 모금도 입에 안 댔어.”

“어어?”

“그러니까 새벽에 하던 거 계속하자.”

“어어어?”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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