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96)화 (96/177)

96화

발코니에서 걸어 나온 로지에는 다시 연회장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어딜 다녀왔느냐?”

사용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인페르나 남작이 제 아들을 보고 손짓하며 물었다.

“잠깐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서 발코니에 나갔다 왔어요.”

“그렇구나. 하지만 이 연회는 너와 사샤를 위해 연 것인데,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도록 하여라.”

“네.”

“그러고 보니 사샤가 보이지 않는구나.”

“아, 사샤 양은 발코니에 있습니다.”

“오호라, 둘이 같이 있었구나?”

인페르나 남작의 말을 들은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몇몇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웃고 있었고, 몇몇은 자기들끼리 이마를 맞대며 무언가 속닥거리고 있었다.

사용인들만 그런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남작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로지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로지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로지에의 시선을 느낀 사용인들은 호호,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희는 신경 쓰시지 마시고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하세요, 도련님.”

“맞아요, 로지에 님. 그간 사샤와 같이 지내다가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아쉬울 텐데, 다녀오시지요.”

그 말에 로지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러자 사용인들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점점 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이, 다 아시면서. 저희도 다 알아요.”

“그래요. 일부러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도련님.”

로지에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이 하녀와 하인들이 도대체 뭐라는 거지?

이 상황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로지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인페르나 남작은 어째서인지 손등으로 입을 꾹 누른 채 숨을 참고 있었다.

“어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다. 흠, 크흠. 이제 가서 네 볼일을 보도록 하여라.”

“제 볼일이라 하시는 건…….”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어서 가 보거라.”

인페르나 남작은 유난히 큰 목소리로 로지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남작을 향해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한 로지에는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움직이기는 했다만, 로지에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어머니께서는 도대체 내게 무슨 볼일을 보라는 거지?’

게다가 아까 사용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큰 미소를 지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기분이 좋으면 자유롭게 미소를 지으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한단 말인가?

로지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자신을 향한 인페르나 남작과 사용인들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좋은 소식이 있나?’

도로 침착해진 로지에는 유유히 연회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안부를 물으며 그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저택의 차기 주인이자 연회의 주인공으로서 매우 능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로지에는 모두가 자신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돌아와서 이렇게도 기쁜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로지에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자신을 이렇게나 챙겨주고 생각해주었을 줄이야!

예전에 로지에는 일 년 대부분을 북부에서 보냈다. 그래서 그는 인페르나 남작 저택의 사람들이 자신을 조금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건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내가 인페르나 남작이 되어도 내부에서 견제가 없겠는데.’

로지에는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연회장을 계속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로지에는 웃고 있지 않은 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도련님.”

“아, 데클란 군. 연회는 잘 즐기고 있어?”

“뭐, 그럭저럭입니다.”

로지에 앞에 다가온 데클란이 그렇게 대꾸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누구 찾고 있어?”

눈치 빠른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얼른 물었다.

“……혹시 사샤를 보셨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데클란이 로지에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슬쩍 물었다.

아무래도 로지에에게만은 이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묻는다는 느낌이 강한 어투였다.

“사샤 양은 발코니에 있어.”

그러자 데클란의 입에서 고맙다는 인사 대신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걸 도련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이에 로지에는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순진하게 답했다.

“그야 사샤 양은 아까까지 나와 같이 발코니에 있었거든.”

순간 데클란의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강렬한 시선이 로지에를 과녁 삼듯 그대로 날아들었다.

데클란의 얼굴은 석판처럼 굳어 있었다.

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알아차린 로지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야, 데클란 군?”

“도련님은 참 교활한 새끼네요.”

데클란의 입술 사이로 기어코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로지에를 노려보고 있는 데클란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로지에는 기겁하며 데클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데클란 군! 말을 왜 그렇게 사납게 하는 거야?”

“귀족 영식으로 태어나셨으면 제 분수에 맞게 다른 귀족 영애와 연애 놀음이나 할 것이지, 왜 아무런 죄도 없는 사샤를 건드리는 겁니까? 비열한 한량 같으니.”

“세상에, 데클란 군!”

로지에는 데클란을 잡아끌면서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침 주방장이 새로운 술을 들고나왔기에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있었다.

로지에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데클란을 다그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술 취했어?”

“파수꾼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분 더러우니까 비켜주시지요.”

그러면서 데클란은 로지에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로지에는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고, 이에 데클란은 인상을 날카롭게 위로 찡그렸다.

“뭡니까?”

“말 좀 가려서 해, 데클란 군. 나야 데클란 군의 친구니까 말을 더럽게 하는 걸 이해하지만, 만일 인페르나 남작가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한다고!”

“하하, 남작가 사람들이요…….”

데클란은 무미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로지에를 노려보았다.

“인페르나 남작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을 흘려놓고선, 이제 와서 남작가 사람들 눈치를 보라고요? 도련님은 저를 멍청이로 아시는 겁니까?”

“데클란 군, 나한테 화났어? 그리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로지에는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다. 그는 왜 데클란이 이렇게 가시가 돋친 상태인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 의미 모를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곧이들을 수 없었다.

“도련님은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저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요. 저는 그간 파수꾼 일을 보고하기 위해 남작가에 자주 왔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무슨 말들을 들은 줄 아십니까?”

“무슨 말을 들었는데?”

“정말 몰라서 물어요? 남작가에는 도련님이 사샤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뭐?”

데클란의 선포에 로지에의 두 뺨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귀 끝이 홧홧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걸 어떻게 알고……”

데클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로지에를 째려보았다.

“그 반응은 또 뭔데요?”

“어, 어떻게 알았어?”

“뭘요?”

“내, 내가 사샤 양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

데클란은 두 눈을 부릅뜨며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이 빌어먹을 도련님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데클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망할 도련님이 진심으로 궁금해서 저딴 개 같은 질문을 한 건지, 아니면 자신을 놀려먹기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인지.

데클란을 바라보고 있는 로지에는 마치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실수로 그 안에 퐁당 빠져버린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멍하니 굳어버린 얼굴 위에는 충격과 민망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로지에의 표정을 관찰한 뒤에야 데클란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까?”

“일부러 뭘 해?”

“제가 사샤를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훼방 놓으시려고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까?”

“데, 데클란 군도 사샤 양을 좋아해?”

로지에가 흠칫 놀라며 반문했다.

두 손으로 제 얼굴 절반을 가린 채 데클란을 흘끔거리고 있는 로지에는 순진함 그 자체였다.

“…….”

데클란은 로지에에게 언성을 높인 것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착하고 순진해 빠진 녀석을 내가 도대체 왜 경계했던 거지…….

데클란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한숨을 내쉰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말했다.

이대로 서서 성을 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그리고 대화로 풀도록 하자.

그렇게 데클란과 로지에는 연회장 구석에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저기, 데클란 군…….”

“뭡니까.”

오는 길에 집어 온 유리잔 안에 든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데클란이 손 등으로 입가를 쓸었다.

맞은편에 앉은 로지에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데클란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남작가 사람들은…… 내가 사샤 양을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 거야?”

“예.”

“어, 어떻게? 난 내가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겨요?”

데클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숨기긴 뭘 숨겨요! 도련님이 매번 남작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샤 얘기만 잔뜩 써놓으셨는데, 모르는 사람이 바보죠!”

그랬다.

그간 로지에가 인페르나 남작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두 한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형식적인 날씨 이야기도, 자신의 건강도, 근래에 시내로 놀러 갔던 이야기도, 혹은 아카데미에서 최근 배우고 있는 내용도, 모두 다 사샤로 귀결되었다.

이를테면 로지에의 편지는 ‘기-승-전-사샤 양’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 날씨가 참 맑았어요. (중략) ……그래서 사샤 양이 기뻐했어요.

—오늘은 시내로 가서 상가를 둘러보았어요. (중략) ……사샤 양이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했어요. 다음에 사샤 양이 더 좋아할 만한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요.

—오늘 수업 시간에 가주로서 갖추어야 할 성품과 인덕에 대해 배웠어요. (중략) ……저도 좋은 남작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 사샤 양도 행복해하겠지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남작은 그 편지를 읽고 아주 흐뭇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집사에게 로지에의 편지에 대해 말해주었고, 집사는 또 다른 사용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로지에의 편지 내용은 온 남작가를 돌고 돌다가 끝내 데클란을 포함한 파수꾼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파수꾼들은 앞으로 평민 출신의 남작 부인을 섬기게 되었다며 농담을 했다.

그럴 때마다 데클란은 집에 돌아가 돌을 넣은 포대를 짊어지고 미친 듯이 동네를 뛰어다니며 운동으로 화를 풀었다.

따지고 보면 데클란의 몸이 단단해진 건 로지에의 공로가 컸다.

데클란의 이야기를 들은 로지에는 두 손으로 자신의 달아오른 두 볼을 꾹 눌렀다.

“그럼…… 인페르나 남작님도 내가 사샤 양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는 거야?”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합니까?”

그러자 로지에의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미묘한 반응에 데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러자 이런 기가 막힌 답이 되돌아왔다.

“부, 부끄러워서…….”

데클란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 돌이 든 포대 세 개를 업고 동네를 다섯 바퀴 전력 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