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자, 자, 자, 자,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도, 도련님이 지금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 내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지금 로지에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그러니까, 로지에는 지금 내게…….
“청혼하고 있는 거야.”
로지에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
나는 그대로 고장 나고 말았다.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마치 바다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심박수가 올라가면서 눈앞이 핑핑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 그게…….”
입이 절로 열리면서 그런 바보 같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졸지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이 어떤 기분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한참 동안 그대로 굳은 체 아무런 말이 없자, 로지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사샤 양?”
“……말도 안 돼요.”
“음?”
“어, 언제부터 그런 거예요? 도대체 왜? 왜 하필 나인데요?”
탁!
나도 모르게 난간을 손바닥으로 세차게 내리쳤다.
덕분에 위에 있던 나와 로지에의 유리잔 속에 든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유리잔 위로 비친 내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어째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저를 고르신 거예요? 저 평민인데요? 도, 도련님 정도면 옆 영지에 사는 자작 가문 딸이나 권력이 비등한 남작 영애랑 결혼해도 괜찮잖아요? 아닌가요? 네?”
당혹감에 젖은 내 목소리가 발코니에 더듬더듬 울렸다.
“아, 아니다. 제 생각은 이래요. 지금 도련님은 큰 착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입에서 온갖 말이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사고와 고민이 정제되지 않은 그 자체로 불순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래, 도련님은 하필 남학교를 다니신 탓에 사춘기 시절에 가까이 지낸 여자가 고작 저밖에 없으셔서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신 게 분명해요! 불쌍한 도련님!”
“사샤 양.”
“제 잘못이에요. 제가 도련님을 너무 응석받이로 키웠나 봐요. 처음부터 사무적으로 대했어야 했는데. 사회적인 거리를 두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도련님. 앞으로 도련님 곁에 알짱거리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사샤 양.”
로지에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사과를 하는 거야.”
“그, 그야! 도련님이 지금, 저한테, 처, 처, 청혼하셨잖아요! 사실 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제가 도련님에게, 감히, 착각하게 만들어서……!”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허둥지둥 입이 돌아가는 대로 족족 생각을 내뱉었다.
보드 위로 구슬들이 튕기듯이 말이 마디마디 끊겨 나왔다.
그 와중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로지에의 고백에 거절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지.
애초에 로지에가 왜 내게 고백을 하는 거지?
“착각한 게 아니야.”
그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은 로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내가 사샤 양에게 충분히 신호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난 누구에게나 자비로운 자선가가 아니야.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지 않아.”
“…….”
입을 꾹 다문 나는 로지에가 내게 주었던 여러 선물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주었던 건 로지에가 북부 영지에서 지내고 있을 때 편지와 함께 보내온 목걸이.
그 외에도 나는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로지에로부터 자잘하게 무언가를 많이 받았다.
그 선물을 받으면서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로지에는 귀족 자제니까. 나보다 돈이 더 많으니까.
나 같은 평민들을 위해 베풀어주는 자선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난 사샤 양이 내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미소를 보고 싶었어. 사샤 양은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거든.”
정작 본인은 그런 의도가 있던 게 전혀 아니었는데.
“그리고 난 사교계에서 잘나가는 바람둥이 영식도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면 에스코트하지 않는다고.”
마차를 탈 때마다 로지에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기억났다.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면서 내밀었던 그 손.
나는 매번 로지에가 귀족처럼 격식 있게 구는 것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에스코트를 거절했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귀족 영애가 아닌, 로지에의 시종에 불과했으니까.
로지에의 시종이기 전에, 가난한 영지에 사는 소작농의 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로지에의 에스코트를 받지 않았었다.
그의 따스한 손을 맞잡는 순간, 내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깨닫게 될까 봐, 제멋대로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사샤 양이 내 손을 잡으면, 나도 사샤 양과 같은 곳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었을 테니까.”
정작 본인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리고 또 난 다른 사람이 나를 만지는 걸 싫어해. 그래서 평소 인페르나 저택에서 지낼 때 나 혼자서 알아서 일어나.”
아카데미를 다닐 때 로지에는 늘 내가 자신을 깨우러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곤 했다.
사실 로지에는 일찍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렸다.
두 눈을 감은 채 내가 언제 찾아올까, 하며 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로지에는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이대로 사샤 양과 다시 따끈따끈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잠들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잠결에 네 향기를 맡으며 두 눈을 떴을 때 널 가장 먼저 볼 수 있을 테니까.”
정작 매일 아침 로지에를 깨우러 가던 나는 속으로 늘 그가 도대체 언제 철이 들어서 혼자 일어날까,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쉬기만 바빴는데.
“사샤 양.”
난 단 한 번도 로지에가 주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런데도, 왜.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사샤 양.”
평소와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포근하고 사근사근했다.
“그리고 사샤 양도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
로지에의 최종 선포에 나는 이제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내 숄을 꽉 잡았다.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파도처럼 휘말리는 이 감정에, 폭풍처럼 날아드는 이 분위기에 이대로 휩쓸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도련님…….”
“응, 듣고 있어. 사샤 양.”
“……너무 빠른 것 같아요.”
한참 동안 망설이다 겨우 쥐어짠 말이 그 한마디였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바탕 태풍이 몰아치고 간 기분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간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비에 흠뻑 젖은 마음이 무겁게만 다가왔다.
모든 것이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저…… 너무 눈치가 없었나 봐요. 사실 도련님이 절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더듬더듬 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제야 로지에가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몰랐지만…… 아마 도련님은 오래전부터 절 좋아하고 계셨겠지요.”
“맞아. 첫눈에 반했었어.”
첫눈에 반했다, 라.
그 말에 내 가슴 깊은 곳이 한번 찌릿하게 울렸다.
도대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주원료가 기쁨인지 아니면 혼란인지, 아니면 그것도 아닌 다른 감각인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절 좋아한다고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정말로, 진심으로요. 고마워요.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도련님과 같은 출발점에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오늘에서야 나를 향한 로지에의 마음을 겨우 알아차렸다.
반면 로지에는 이미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로지에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좋았다.
다만 그가 나를 바라보며 상상했을 미래에는 내가 항상 있었겠지만, 내가 그를 바라보며 상상했던 미래에는 그가 없었다.
그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큰 두려움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당장 오늘 대답을 드리기엔 어려울 것 같아요.”
나는 이제 걸음마를 내디딘 상태인데, 로지에는 훌쩍 자라나 저만치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이가 내게 큰 장벽처럼 느껴졌다.
만일 내가 그가 상상한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만일 내가 그의 원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만일 내가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게다가…….
“……저희 이제 겨우 16살이라고요!”
나는 내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 사실을 딱 집어 말했다.
그랬다.
나나 로지에나 둘 다 이제 16살인 풋풋한 청소년이었다.
그런데 약혼이라니!
“이건 정말 빨라도 너무 빠른 것 같아요! 과속이라고요! 전 제가 16살에 유부녀가 되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약혼이랑 결혼이랑 다른 거야. 결혼은 사샤 양이 원할 때 할 거고.”
“알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이르다고요!”
“그럼 몇 살이 좋아?”
내 격한 반응에 이런 반문이 되돌아왔다.
“……네?”
나는 멍해진 표정으로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로지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내게 기한을 정해 줘. 그러면 내가 기다릴게. 사샤 양이 준비가 다 될 때까지.”
“도련님…….”
나는 내 어깨를 둘러싼 숄을 다시 한번 꽉 붙잡았다.
긴장감 때문에 목이 뻣뻣해졌다. 머리가 두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말해줘, 사샤 양.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
“……저희가 18살이 될 때까지요.”
짧은 고민 끝에 내가 그렇게 답했다.
내가 18세가 되는 해.
그때면 데클란도 이미 왕실 특수부대에 영입되어 떠났을 테다. 그 뒤로 원작이 알아서 착착 진행되겠으니, 나 같은 엑스트라는 이대로 퇴장해도 된다.
그러니 그때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
신중하게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는 나와 달리, 내 대답을 들은 로지에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그 웃음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 내 의구심에 대한 답을 하듯,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아니, 별건 아니고. 생각해보니 나보고 2년이나 기다리라고 하는 사람은 사샤 양밖에 없을 거야. 그게 조금 웃겨서.”
“아, 그게!”
생각해보니 로지에의 말이 맞았다.
고백 한 번 했다고 2년이나 기다리라고 하다니, 이건 조금 너무한 처사 아닌가.
“아니면 그냥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셔도……”
“아니. 아직 정식으로 거절당한 것도 아닌데, 그럴 수는 없지.”
로지에가 가볍게 웃으며 내 말을 잘라냈다.
“나로선 아직 희망이 있는 거잖아?”
“…….”
“그럼, 난 먼저 연회장 안으로 가 볼게.”
로지에는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보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로지에는 그대로 발코니를 벗어났다.
발코니 난간 위에는 두 유리잔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얼음이 전부 다 녹아내려 컵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나는 그대로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쿵, 쿵, 쿵.
심장이 무작정 날뛰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잠잠히 그 자리를 지켰다.
도저히 발코니의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릴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새빨개진 내 얼굴을 들키게 될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