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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94)화 (94/177)

94화

그렇게 옥수수로 시작해서 옥수수로 장식된 식사가 끝났다.

식사 테이블을 벗어난 사람들은 연회장에 서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택 사람들이 다 기뻐 보이네.”

데클란 옆에 선 내가 유리잔에 든 물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데클란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차기 주인이 돌아온 셈이잖아.”

“그게 좋은 건가?”

“귀족을 섬기는 걸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때, 저택의 사용인들이 나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졸업 축하해, 사샤!”

“사샤 네가 우리 영지에서 처음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평민 여자일 거야!”

나를 둘러싼 하녀와 하인들이 연신 축하의 말을 던졌다.

“다들 고마워요!”

나는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에게 이런저런 덕담을 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곧 내 옆에 서 있던 데클란을 발견했다.

“아, 데클란도 있었네.”

“데클란 너도 잘 지냈어? 파수꾼 하느라 바쁘겠다!”

“어머니도 잘 지내고 계시지?”

사용인들의 말에 데클란은 그저 형식적인 미소만 지으며 예, 예 대답만 이어갔다.

“그럼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우린 로지에 도련님에게도 축하하러 갈게!”

“연회 잘 즐겨! 다시 한번 축하한다!”

할 말을 다 전한 사용인들은 다시 무리를 지어 우르르 움직였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휴우.”

“힘들어?”

용케 내 한숨 소리를 들은 데클란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금 피곤하네.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그런가? 어제저녁 늦게 집에 도착한 데다가, 밤까지 우리 부모님이랑 너랑 이야기하고, 그리고 새벽에 또 밖에 나갔다가…… 아.”

문장이 어색하게 끊겼다.

새벽에 있었던 일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배부르게 먹은 나머지 잠이 안 와서 산책하러 밖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데클란을 만나고…….

그리고 데클란이 내게…….

‘사랑스러워, 넌.’

그 말을 뒤로 데클란이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으아아아아!”

간밤에 일어난 일이 머릿속을 다시 한번 스치고 지나간 순간, 목구멍 너머 깊은 곳으로부터 우렁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왜, 왜 그래?”

당황한 데클란이 급히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는 동물 같은 반사 신경을 발휘하며 몸을 뒤로 내뺐다.

“나, 나 잠깐 앉아서 쉬어야겠다!”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건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럴래? 나도 같이 갈게.”

“아, 아니야! 혼자 좀 있고 싶어! 나중에 다시 돌아올게!”

나는 데클란을 그대로 자리에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퇴장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사……”

“어, 데클란이다!”

“데클란! 여기서 만나니까 반갑다! 네가 갑자기 휴가를 내서 우리 파수꾼 단 전체가 다 놀랐잖아!”

다른 파수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데클란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에게 사로잡힌 데클란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린 나는 재빨리 발코니로 피신했다.

발코니로 향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선선한 여름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후.”

등 뒤로 문을 닫은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진짜, 이게 뭐야!’

유리잔을 난간 위에 올려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녀들이 몇 시간이나 들여 단정하게 만들어 준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새벽에 데클란이 나에게…….

‘아무도 못 봤겠지?’

그제야 덜컥 걱정됐다.

혹시 누가 봤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그때 케쉬키도 이미 도망간 뒤였고, 늦은 시간이어서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 그래, 아무도 못 봤을 거야.’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데,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하고 있어?”

“와악!”

나는 놀란 강아지처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지에 도련님?”

“응, 나야.”

발코니 끝자락에 서 있던 로지에가 싱긋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로지에도 나처럼 조금 전까지 연회장에 있었던 것인지 그의 손에는 투명한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로지에를 향해 다가갔다.

“도, 도련님이 왜 여기 계세요?”

“음? 여긴 내 집인데,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어,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설마, 내가 혼자서 푹푹 한숨 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을 본 건가?

“음, 사샤 양이 발코니로 와서 갑자기 한숨을 쉬다가, 자기 머리카락 잡아당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다 봤다는 거네.

‘하아아…….’

로지에에게 괜히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도, 도련님은 왜 여기 나와 계세요?”

흠흠, 하고 일부러 큰 소리로 목청을 가다듬은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연회장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어지러워졌어. 그래서 신선한 공기 좀 마시러 왔지. 사샤 양은?”

“뭐…… 대충 같은 이유로요.”

내 말을 들은 로지에는 나를 향해 딱하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렇군. 사샤 양도 나처럼 졸도할 뻔했구나.”

“네……?”

아뇨, 전혀 아닌데요……?

난데없는 로지에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로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곳에 있으면 숨쉬기가 힘들어지더라고. 그래서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져서,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숨을 골라야만 해.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다행이다. 고마워, 사샤 양. 조금 위안이 됐어.”

아…….

나는 아련한 눈으로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도련님만 그런 거 맞아요…….

‘다행인 거 아니고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던 걸 빼앗게 돼서 정말 죄송해요…….’

새삼 로지에의 체력이 얼마나 허약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내 침울한 반응과 달리, 로지에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연회는 어때?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어?”

“네. 먹을 게 특히나 맛있었어요. 옥수수가 어찌나 많던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특별히 이번 연회는 사샤 양이 좋아하는 옥수수 위주로 요리를 준비해달라고 했거든. 마음에 들었으니 다행이네.”

도련님이었구나! 모든 요리를 옥수수로 테러한 주범이 바로 로지에 도련님이었어!

나는 자신도 모르게 로지에를 향해 뾰족한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내가 옥수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모든 음식에 옥수수를 넣을 발상을 할 수 있지?

그러나 천진난만한 로지에는 내 삐딱한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완전히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왔네.”

난간에 기대어 선 로지에는 연회장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주홍색과 자주색으로 물든 선명한 석양이 보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사샤 양, 이쪽으로 와 서 보면 더 잘 보일 거야.”

로지에가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내게 손짓했다.

그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그의 옆자리로 걸어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페르나 영지의 풍경은 잔잔하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외지인들에게는 가난한 소작농들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사는 이곳이 삭막하게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게는 각 사람이 최선을 다해 일궈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도련님은 곧 이 영지의 주인이 되시겠네요.”

내 말에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부터 난 어머니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본격적인 후계자 훈련을 받게 될 거야.”

“도련님이 인페르나 남작님이 되다니, 뭔가 신기하겠네요.”

“왜 신기해?”

“그야 전 어릴 적부터 도련님을 알고 지냈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저희는 소꿉친구인 셈이잖아요? 그런 도련님이 이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가 된다니, 뭔가 신기해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난간 위에 올려두었던 내 유리잔을 잡아 휘휘 돌렸다.

잔 안에 든 물과 유리가 서로 찰랑거리며 저물녘의 빛을 반사했다.

“미리 축하드려요, 도련님.”

“앗, 미리 축하받으면 작위를 못 이어받고 요절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래도 일단 고마워.”

로지에는 후후 웃으며 나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그의 시선을 느낀 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도련님은 언제 남작님이 되는 거예요?”

내 질문에 로지에는 얕은 웃음을 흘렸다.

“음, 일단 결혼부터 해야지.”

“결혼이요?”

“응. 어머니는 내가 몸이 너무 약해서 후계자를 못 보고 죽을까 봐 걱정이시거든. 그래서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보기 전까지 남작 작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어.”

“아…….”

로지에의 말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는 분명 웃음을 섞어가며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이 화제가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지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 전에 남작 작위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인페르나 남작의 심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제 아들이 오래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겠지.

나는 유리잔에 든 물을 전부 다 마셨다.

잔의 바닥에는 미처 녹아내리지 않은 얼음 조각이 빛을 반사하며 크리스털처럼 반짝였다.

“도련님은 그럼 어서 연애하셔야겠네요.”

“연애?”

“네. 어서 결혼 대상을 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먼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야지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로지에는 그 말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여기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로지에는 내게 불쑥 물었다.

“사샤 양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왜 나한테 묻는 거지?

“네? 저요?”

“그래. 사샤 양, 너.”

“저는 그런 거 안 키워요.”

“왜?”

“지금 이미 행복한걸요. 그런데 연애까지 하려고 하면 욕심부리는 거나 마찬가지 같아요. 저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헤헤, 웃음을 흘린 내가 가볍게 대꾸했다.

진심이었다.

현재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이 상황에 잘 적응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굳이 더 앞으로 나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이미 행복했기에 더 행복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 대답을 들은 로지에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욕심부리는 게 나쁜 건가?”

“네?”

“사샤 양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알쏭달쏭한 로지에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더 행복해질 수 있겠어요?”

“아주 간단해. 나를 더 이상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로지에’라고 불러 줘. 그리고 나도 사샤 양을 그냥 ‘사샤’라고 부를게.”

엥.

잠깐만.

이건 무슨 상황이지.

예상치 못한 로지에의 요구에 나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그에게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그렇지만! 도련님은 귀족이고, 전 평민에 불과한걸요. 도련님 이름을 존칭도 없이 함부로 불렀다간 감옥에 간단 말이에요!”

그러자 이런 차분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가족은 괜찮아.”

“……네에?”

“가족 관계가 되면 겨우 이름 한 번 불렀다고 감옥에 가진 않아.”

로지에의 낮은 음성이 고스란히 귓가에 울렸다.

평소 창백하기만 하던 로지에의 두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볼이 붉게 달아오른 건 순전히 석양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내 앞에 선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찰랑.

맨 위에 쌓여 있던 얼음 조각이 녹아내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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