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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93)화 (93/177)

93화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린 나는 잠시 컥컥거리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남작님!”

“왜.”

“저, 저는 도련님을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억울했다.

왜 인페르나 남작가에 있는 사람들 모두 내가 로지에 도련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거지?

“사샤, 나도 내 아들이 잘생긴 거 안다. 그러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남작이 내게 입가에 맺힌 물방울을 닦으라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네가 평민이어도 상관없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단다.”

“아, 네에…….”

여기서 남작에게 내가 로지에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했다간 변명처럼 들릴 게 분명했다.

아까 하녀들이 날 놀렸던 것처럼 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남작님과 따로 만나서 오해를 풀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어…… 가서 손을 닦고 오겠습니다.”

“그러렴.”

남작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연회장 복도에는 연회 음식을 확인하고 있던 하인들과 하녀들이 모여 있었다.

문소리를 들은 이들의 이목이 전부 내게 이끌렸다.

“세상에, 사샤! 너 드레스 잘 어울린다!”

“누가 꾸며준 거니? 정말 인물이 달라 보이네!”

나를 알아본 저택의 사용인들이 칭찬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까 내 치장을 도와준 하녀들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했어! 사샤 너무 귀엽지 않아?”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새하얀 드레스가 포인트라고!”

그런 칭찬들 중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우리 도련님이 반할 만하네!”

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러나 복도에는 열 명이 족히 되는 사용인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 정확히 어느 한 사람이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째선지 이 저택 사람들은 전부 나와 로지에를 엮으려고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처음에는 하녀들이 나를 놀리려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인페르나 남작에다가, 다른 사용인들까지 전부 다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뭔가 이상했다.

마치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저어, 제가 어디 좀 가봐야 해서…….”

사용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용인들은 그제야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나중에 연회 때 더 이야기 나누자!”

“네가 좋아하는 음식 잔뜩 해놨으니까 기대해!”

나는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했다.

‘도대체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거야?’

파우더룸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인페르나 남작이 ‘네가 평민이라도 난 괜찮다’라고 말한 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이 말은 즉 남작이 날 자신의 며느릿감으로 보고 있다는 말 아닌가.

‘싫어!’

난 이제 겨우 16살 청소년이라고! 결혼 따윈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손을 벅벅 세게 씻은 나는 하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앞에 달린 거울에 고심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은 얼굴이 비쳤다.

만일 저택 사람들의 말대로 내가 정말 로지에와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로지에 도련님이…… 내 남편이라면……?’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일단 장소는 인페르나 남작가 저택. 남작 부부만 사용할 수 있다던 침실에 잠들어 있는 나와 로지에.

아침 햇살에 눈을 뜬 나는 옆자리에 누운 로지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나는 로지에를 향해 손을 뻗으며 이렇게 말한다.

-남작님, 이제 일어나세요!

내 목소리를 들은 로지에는 움찔거리며 몸을 뒤척인다.

-으음, 부인…… 10분만 더 자고 싶소…….

그러면서 로지에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이불 안에서 꼬물거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어내려고 한다.

-안 돼요! 오늘도 공무 보러 가셔야지요!

-공무 보기 싫소…… 오늘 그냥 쉴 것이요…….

-일어나시라니까요!

그렇게 나는 로지에를 이끌고 욕실 안으로 그를 던져 놓는다…….

거기까지 상상하던 나는 이내 깨달았다.

‘잠깐만, 이건 아카데미 생활과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

그러니까 옆방을 쓰던 알람 시계에서 침대를 공유하는 알람 시계로 진화하게 되는 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 난 애초에 로지에를 연애 대상으로 본 적이 없지.’

그간 나는 로지에의 시종으로 살아왔다. 그는 항상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었고, 나는 그를 나보다 더 높은 윗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유교 사상에 잘 절여진 나는 아마 윗사람인 로지에를 평생 공경하고 보필해야 할 대상으로 볼 테다.

“휴,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으앗!”

갑자기 난데없이 튀어나온 목소리에 나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내 눈!”

내 앞에 두 명의 미남이!

“눈이 왜? 먼지 들어갔어?”

“사샤 양. 어디 아파?”

내 앞에 나타난 이들은 데클란과 로지에였다.

그리고 나는 차마 두 눈을 제대로 뜨고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데클란, 로지에 도련님!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잘생겨진 거야!”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내가 냅다 외쳤다.

그랬다.

내 앞에 선 데클란과 로지에는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처럼 보였다.

로지에는 반듯하게 다려진 정장 차림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그의 피부는 잘 정돈된 그의 머리카락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인페르나 남작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를 가슴팍에 단 로지에는 영락없는 귀족으로 보였다.

‘로지에…… 이제 보니까 정말 다 컸네…… 언젠가 인페르나 남작 자리를 이어받겠지……?’

매일 내게 달라붙는 응석받이로 여겼던 로지에가 갑자기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할 나름이었다. 달라진 건 고작 옷뿐인데, 이렇게 성숙하게 보일 줄이야.

로지에의 옆에 서 있는 데클란도 비슷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러나 로지에와 달리 데클란은 겉옷을 벗은 채 셔츠 위에 베스트만 입고 있었다. 그의 팔에는 벗어둔 겉옷이 들려 있었다.

각진 팔 근육 아래로 올라온 핏줄이 얼핏 보였다.

그것이 눈에 들어온 순간, 갑자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데클란…… 다 컸구나…….’

비실비실한 데클란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닭고기를 먹이던 게 바로 엊그저께 일 같은데.

벌써 이렇게 건장하게 성장하다니.

데클란이 어찌나 대견한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때늦은 감동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을 때였다.

“사샤 양, 눈 괜찮아?”

“어디 한번 보자.”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데클란과 로지에가 걱정이 되었는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샤, 눈에 뭐 들어간 거면 내가 불어줄게.”

내 눈높이에 맞게 허리를 숙인 데클란이 내게 말했다.

가까워진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도 같이 불어줄게.”

로지에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데클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은 그냥 빠져주세요.”

“왜?”

“방해됩니다.”

“그렇지만 둘이서 같이 불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도련님은 할 줄 모르잖아요. 비켜주세요.”

이러다가 데클란과 로지에가 싸우게 될 것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데클란이 로지에를 향해 일방적으로 빈정거리고, 순진한 로지에는 그것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려고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나 눈 안 아파! 괜찮아요!”

그러면서 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어디 있었던 거예요? 연회 이제 시작되는데.”

“옷 갈아입고 있었어.”

데클란이 먼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정장 잘 어울린다. 어디서 났어?”

“만들었어.”

“어?”

“내가 원단 사서 집에서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었어.”

“뭐라고……?”

생각보다 엄청난 정장의 출처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반면 로지에는 와아, 하고 작게 감탄하며 외쳤다.

“대단해, 데클란 군! 정말 못 하는 게 없구나!”

데클란은 로지에의 칭찬을 넘겨 들으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사샤 너도…… 드레스 예쁘다.”

그렇게 말하는 데클란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명화를 기억 속에 담으려는 듯한 섬세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진 나는 하하, 하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어서 연회장으로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데클란과 로지에에게 동시에 말하려니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서 나왔다.

말투가 제법 어색한 게 웃기게 들릴 법도 한데, 데클란과 로지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회장으로 돌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인페르나 남작이 우리를 반겼다.

“식사 먼저 시작하자꾸나.”

남작의 신호가 떨어지자 저택의 사용인들이 각기 자리를 잡아 앉았다.

이번 연회에는 특별히 인페르나 남작가의 사용인들이 함께 참석했다.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가 자신의 아랫사람들과 겸상하며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확실히 인페르나 남작은 내가 상상하는 귀족들과는 아주 달랐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 연회는 내 아들 로지에와 인페르나 영지 출신인 사샤가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고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자리이다.”

인페르나 남작이 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선포했다.

“힘든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 두 사람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한 잔을 들도록 하지.”

그러면서 인페르나 남작은 와인 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잔 안에는 오묘한 빛깔의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색상으로 미뤄보아 내가 아는 레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침 옆자리에 앉아있던 데클란이 내게 속삭였다.

“저게 바로 우리 영지의 특산품인 몬테스라 술이야. 엄청 독한 술이니까 넌 마시지 마.”

“그렇구나.”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얌전히 물이 담긴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모두와 환영의 건배를 나눈 뒤 연회의 식사 자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음식을 서빙하기로 자원한 주방의 사용인들이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코스 요리를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서빙되는 음식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전부…… 옥수수가 들어 있잖아?’

그랬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는 옥수수 수프였다.

그 외에도 토마토와 옥수수로 만든 샐러드, 옥수수 알이 들어가 있는 프리터(Fritter)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콘브레드가 올라왔다.

‘뭐지? 올해 옥수수 풍년이라고 그런 건가?’

내 앞에 놓인 음식들을 맛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음식들의 맛은 모두 좋았다. 다만 전부 다 옥수수를 기본으로 하는 요리여서 맛이 비슷했다.

‘나만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가?’

나는 은근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마침 인페르나 남작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로지에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로지에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 미소는?’

로지에가 왜 저렇게 웃고 있는 거지?

로지에에게 눈빛을 던지며 왜 웃고 있는지 물으려고 하던 찰나였다.

“사샤, 물 더 마실래?”

옆에서 데클란이 내 유리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응. 그래. 고마워.”

로지에로부터 시선을 돌린 나는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고기 요리가 등장했을 때.

‘이게 뭐야?’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내 앞에 놓인 그릇 위에는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닭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문제는 그 닭고기 옆에 딸려 나온 채소였다.

닭고기 옆에는 잘 익은 옥수수가 놓여있었다.

메인 디쉬가 끝난 뒤로 나온 디저트는 옥수수 푸딩과 옥수수 주스였다.

그렇게 연회의 식사는 옥수수로 시작해서 옥수수로 끝났다.

이번 메뉴 기획자에게 뭐라고 험한 말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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