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하녀들의 말에 나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처럼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긴. 다 알면서.”
하녀들은 쿡쿡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내가 그들에게 더 질문을 할 틈도 없이 여러 화장품을 들고 내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홀딱 반할 정도로 예쁘게 만들어 줄게, 사샤.”
내 입술 위에 루주를 발라주며, 아메룬이 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 말에 나는 기겁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럴 필요는 없…….”
“쉿! 말하면 화장 삐뚤어져. 입가가 새빨갛게 물들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하는 수 없이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하녀들이 나를 치장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화장이 끝난 뒤, 하녀들은 내게 손짓을 했다.
‘드레스’라는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 드레스요?”
생각보다 본격적인데?
“그래. 연회에 가는 데 설마 아무 옷이나 입고 가려고?”
“그건 아니지만…… 드레스는 어디서 났어요? 남작님 건 아니죠?”
정말로 궁금증이 일어 하녀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이곳 남작가 저택에 사는 유일한 귀족 여성인 인페르나 남작은 드레스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남작령을 다스리는 영주인 그녀는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선호했다.
그런 그녀가 드레스를 가지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내 질문에 하녀들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작님이 이곳으로 시집오실 때 드레스는커녕 옷 한 벌도 안 가지고 오셨어.”
“왜요?”
“듣자 하니 남작님의 시댁에서 원래 이 결혼을 반대하셨대.”
하녀들은 자신들이 저택에서 일하며 주워들은 소문을 내게 속닥거렸다.
“사샤 너 남작님이 여기 영지로 오시기 전에 백작가 영애셨던 건 알고 있지?”
“네.”
로지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인페르나 남작은 원래 북부에 있는 어느 백작가 출신의 영애였다.
그녀는 제법 유망한 가문 출신에, 거기다가 검술 실력까지 뛰어나 장래가 촉망된 이로 손꼽혔다.
많은 이들은 그녀가 왕실 기사단에 들어가 왕비나 공주를 호위하는 명예를 얻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의 상상을 꺾었다.
그녀는 인페르나 남작가의 장남과 결혼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결혼 소식이 퍼졌을 때,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이 한때 그 결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았다.
대부분 귀족은 그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왔다.
그녀처럼 재능이 뛰어난 이가 변변찮은 남작가의 안주인으로 들어가다니.
‘고작 인페르나 남작가에 만족하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네요.’
‘그러게요. 최소 후작가 안주인 자리를 넘볼 수 있을 텐데, 그걸 마다하다니.’
‘세상 보는 눈이 옹이구멍보다 좁은 모양이군요. 참 어리석은 영애예요.’
인페르나 남작가의 장남과 그녀를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인페르나 남작님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지!”
나를 옷장 앞으로 이끌며, 아메룬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남작님의 시댁 사람들은 격분했어. 그래서 남작님은 자기 물건을 잘 챙기지도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인페르나 영지로 오셔서 결혼식을 치렀지.”
“하녀장님이 그러셨는데, 결혼식 때 남작님의 친부모님은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계셨대. 그리고 피로연은 참석하지도 않으시고 북부로 돌아가셨지.”
하녀들이 각기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결혼식이 끝난 뒤, 현 인페르나 남작은 자신의 남편을 도와 영지를 다스리는 데 힘을 썼다.
하지만 몇 년 뒤, 인페르나 남작의 남편은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본래 왕국의 법률에 따르면, 귀족이 사망할 시 그의 장남이 작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 로지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어린 소년에게 영지를 물려줄 수 없었던 국왕은 하는 수 없이 과부에게 남작 작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 인페르나 영지에 최초로 여자 남작님이 탄생하셨지.”
하녀들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탁 펴며 내게 말했다.
그녀들은 자신이 섬기는 인페르나 남작을 매우 공경하는 것 같았다.
“우리 남작님은 다른 귀족 나리들과는 달라. 겉멋만 들고 허세만 부리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남작님은 사람의 본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셔.”
그 말에 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인페르나 남작은 신분이나 집안 배경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력만 좋다면 모두 등용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그것이 바로 남작의 방침이었다.
덕분에 나와 데클란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남작님은 사샤 네가 자신의 며느리가 되어도 기쁘게 받아주실 거야.”
“잠깐만요, 왜 말이 그렇게 새어요?”
하녀 아메룬의 말에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메룬은 도리어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모르겠니, 사샤? 남작님은 네가 평민 출신이든 아니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 사랑만 있으면 괜찮으니까!”
“저 로지에 도련님 안 사랑해요!”
나는 다시 한번 내 견해를 밝히기 위해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내 말을 진심으로 귀담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불쌍한 사샤.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본인들만 빼고 다 아는 것 같은데.”
“꼬꼬마들이 연애하는 거 보고 있으려니 내가 더 설레네, 후후.”
아메룬을 비롯한 다른 하녀들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계속 놀려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뭐라고 말해도 이 하녀 언니들은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고 반박하면 ‘사샤 너 부끄럽구나?’하고 더 놀릴 게 분명했다.
나는 결국 화제를 돌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드레스는 어디서 난 건데요?”
“선대 인페르나 남작 영애가 입던 드레스야!”
그 말과 함께 하녀 두 명이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를 열었다.
덜컹,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차곡차곡 개어진 드레스들이 쌓여 있었다.
“선대 남작 영애, 그러니까 로지에 도련님의 고모님이 딱 네 나이 때 입던 드레스래. 시집가실 때 안 들고 가신 것만 모아둔 거야.”
하녀들은 상자 안에서 드레스를 한 벌씩 잡아다가 내게 선보였다.
확실히 내가 아카데미를 다닐 때 시내에서 봤던 드레스들보다 유행이 지난 디자인의 드레스들이었다.
그렇지만 옷감의 질이나 사용된 레이스의 상태가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 그다지 후진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늦은 오후의 햇살이 각 드레스를 비추었다.
옷을 장식하는 금실과 비즈들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예쁘다.’
나는 하녀들의 손에 쥐어진 드레스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귀족 영애들의 드레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현란한 색상과 다양한 광택을 자아내는 원단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드레스들을 보자,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간들은 원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어 한다.
보석으로 만든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금실로 장식된 옷을 몸에 두르고, 매끈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로 자신의 발을 감싼다.
언젠가 썩어 없어질 자신과 달리, 영원히 빛나는 그 아름다움을 짧은 찰나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게 지금 딱 나였다.
“사샤 너도 아주 신이 났구나? 드레스 보는 눈에 당장 불꽃이 튀겠네.”
하녀들은 쿡쿡 웃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사샤, 어느 드레스로 할래?”
“이 분홍색 드레스는 어때? 로맨틱한 느낌이 나고 좋지 않아?”
“우아한 느낌 내려면 이 푸른색 드레스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하녀들은 내게 달려들며 드레스를 추천했다.
그녀들의 말대로 각 드레스는 각 장점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 드레스만 고르는 건 어려웠다.
한참 동안 집단 선택 장애 증상을 보이던 우리는 결국 한 드레스로 이견을 좁혔다.
바로 하얀 드레스였다.
하녀들은 활짝 웃으며 내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샤 넌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니까, 완전히 반대로 하얀 드레스를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리고 넌 워낙 활발해서 긴 드레스는 불편할 것 같아. 이 드레스는 기장도 짧으니까 걷기 편할 거야.”
“순백의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맑은 이미지 좋네. 이걸로 오늘 로지에 도련님의 시선 접수 완료했……”
그렇게 계속해서 수다를 떨던 하녀들은 등 뒤에 있는 드레스의 훅을 잠그다 말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침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그 질문에 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하녀 아메룬이 떠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사샤 너, 그, 드, 등에…….”
아.
하녀들의 말을 들은 나는 그제야 왜 그녀들이 굳어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등 뒤의 흉터를 본 거겠지.
예전에 데클란이 내 등에 화살을 쏘아서 난 상처 자국 말이다.
“어렸을 때 사고가 있었어요. 이젠 안 아파요.”
“…….”
내 설명에 드레스룸 안이 침묵으로 굳어버렸다.
“……이 드레스 말고 다른 걸로 하자. 이건 등이 훤히 드러나는 디자인이라서 안 돼.”
기나긴 침묵 끝에 아메룬이 내 드레스를 도로 벗기려고 했다.
나는 급히 그녀를 막았다.
“아니에요. 그냥 이 드레스로 할게요.”
이미 머리를 매만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드레스를 입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하녀들이 좋아서 자진해서 나를 돕는 것이라지만, 이미 너무 많은 신세를 졌다.
더 이상 이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등 뒤가…….”
“괜찮아요. 숄로 가리면 돼요.”
어차피 드레스가 등이 파인 형식인지라 숄을 걸칠 생각이었다. 인페르나 영지의 여름 바람은 제법 선선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괜찮겠어? 나중에 더워서 숄을 벗고 싶으면 어쩌려고?”
“저 몸 차서 괜찮아요.”
“아니면 바람이 훅 불어와서 숄이 날아가면?”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는 거 아니었어요?”
“연회 때 식사만 하는 게 아니라 춤도 춘단 말이야.”
“제가 알아서 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완고하게 나오니, 하녀들은 결국 어쩔 수 없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로지에 도련님이 보고 기겁하시면 어떡해?”
하녀 한 명이 등 뒤의 훅을 걸어 잠가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련님도 저 이 흉터 있는 거 알아요.”
그 한마디에 하녀들의 입이 방앗간 참새처럼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 그걸 도련님이 어떻게 알아?”
“너 설마 도련님 앞에서 옷 벗은 적 있어?”
“사샤 너 도련님과 어디까지 간 거니?”
나는 타인의 연애담에 굶주려 있는 하녀들의 질문 공세를 피해 연회장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