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데클란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데클란의 불면증의 원인 제공자라니,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물어?”
내 질문에 데클란이 도리어 반문했다.
이에 나는 더더욱 곤혹스러워졌다.
“몰라서 묻는 건데? 내가 뭘 했기에 네가 왜 잠을 못 자?”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데클란은 내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케쉬키와 마주할 때와 달리 나는 굳이 뒷걸음질을 치지 않았다.
데클란이라면 믿을 수 있었으니까.
“사샤, 사실 말이야, 나는 지난 5년 내내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
“뭐?”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데클란이 스스로 아카데미를 떠나간 줄 알았는데.
“물론 아카데미를 중간에 그만둔 건 내가 스스로 한 선택이야.”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본 데클란이 급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럼 왜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오고 싶었는데?”
“네가 보고 싶어서.”
데클란의 뚜렷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데클란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가서 사샤 네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만약에 널 다시 보게 되면 아카데미에 계속 남아 있게 될까 봐…….”
“뭐가 그렇게 모순적이야.”
“그러게. 나도 동감이야.”
마른 웃음을 흘린 데클란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 못 했는데, 다시 마을로 돌아온 거 환영해.”
“반겨줘서 고마워.”
나는 씩 웃으며 데클란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잡고 흔들던 데클란이 문득 중얼거렸다.
“너 손 엄청 작다. 키도 작고. 내가 안고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안 그래도 키가 안 커서 슬픈데, 아픈 곳에 소금 뿌리지 말아줘.”
“키가 작아서 싫어?”
“응. 검을 쓸 때 위로 찌르기가 어렵단 말이야.”
“대신에 체구가 작은 만큼 검 피하기가 쉽겠네. 동작도 짧고 잽쌀 테고.”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던 데클란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상대방과 검으로 싸울 때 이런 식으로 다리를 굽힌 다음에, 팔꿈치를 이 각도로 들어 올려서 바로 찔러 들어가면…….”
그러면서 데클란은 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검술 흐름을 재현해 보였다.
여전히 검술에 대해서라면 진지하기 짝이 없는 데클란의 모습을 보자,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왜 웃어.”
“아니, 그냥. 네가 귀여워서.”
“내가 귀엽다고?”
그 말에 데클란은 허, 하고 혀를 짧게 찼다.
“귀여운 건 사샤 너야.”
나는 그대로 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 참! 나 이래 봬도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남탕 아카데미에서 5년 동안 섞여 살아왔어! 이런 내가 뭐가 귀여워?”
“아니야.”
내 웃음소리 너머로 데클란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데클란의 두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사랑스러워, 넌.”
퍼뜩 정신을 차리니 데클란이 달을 등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코가 스칠지도 모르는 가까운 거리였다. 데클란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어…….”
데클란과 나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선선한 한여름 밤의 바람이 훅 불어왔다.
달빛 아래 반짝거리던 데클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말리며 한 올 한 올 나부꼈다.
달착지근한 그의 체향이 코를 간지럽히며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데클란은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뒤늦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데클란의 눈동자에는 내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샤.”
나지막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그와 동시에 데클란이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속이 불에 타오르는 마른 숲처럼 난장판이 되었다. 출구는 없었다.
나는 결국 이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땅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 * *
“사샤.”
“…….”
“사샤, 듣고 있니?”
“…….”
“사사야!”
“아, 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러 명의 하녀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어디 아프니, 사샤? 피곤해 보인다.”
“혹시 어제 잘 못 쉬어서 졸린 거야? 왜 우리가 몇 번이나 불러도 답이 없어?”
하녀들의 질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다른 생각 하느라고…….”
“어머, 어머! 얘 좀 봐!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생각할 여력이 있는 모양이다?”
하녀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나는 인페르나 남작가 안에 있는 드레스룸에 있었다.
화창한 햇빛이 들어오는 드레스룸 안은 이 저택의 다른 구역과 달리 화려한 분위기가 강했다.
우아한 문양으로 장식된 벽장 안에는 여러 벌의 드레스가 늘어져 있었고, 보물함 안에는 반짝거리는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전신 거울의 양옆으로 금실이 들어간 숄과 기타 액세서리가 모여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하자면, 대충 이러하다.
어제 인페르나 남작령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는 남작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로지에는 이런 내 사정을 알고 오후에 마차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인페르나 남작 저택에 도착한 나는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어딘가로 끌려갔다.
바로 드레스룸으로.
나를 드레스룸으로 데리고 온 하녀들은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늘 저녁에 온 저택에서 큰 연회가 있을 것이며, 그 연회를 위해 나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란 바로 머리를 손질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는 것이다.
나를 데리러 온 마부는 인페르나 남작님이 나와 저녁 식사를 하고 싶어 하신다고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평소보다 더 단정하게 하고 가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파티를 준비하듯 하녀들이 달려들 줄이야.
“남작님이 절 예쁘게 꾸미라고 하시던가요?”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꾸며지고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음? 아니. 이건 그냥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네?”
“남작님은 외부 사교 활동이 거의 없으시니, 매일 평상복만 입으시고. 또 도련님은 일 년 대부분을 북부 도시에서 보내시니, 우리가 참 아주 심심했거든.”
“그래서 마침 사샤 네가 온다기에, 네 몸에 맞을 만한 드레스랑 장신구 좀 빌려왔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사샤 꾸미기, 일명 사꾸를 하고 있잖니.”
“…….”
난 그냥 이 언니들의 데코 욕망을 채우는 대상이 된 거구나…….
나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하녀들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얼굴에 화장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참고로 오늘 저녁 연회는 남작님이 특별히 널 위해서 열어주신 거야!”
하녀 중 갈색 머리의 하녀가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재잘거렸다.
이름이 아메룬이라고 했던가.
아메룬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저만을 위해서 연회를 여셨겠어요? 로지에 도련님의 귀환을 기리면서 겸사겸사 저도 초대한 것이겠지요.”
“물론 로지에 도련님도 있지만, 남작님이 특별히 네 이름을 언급하셨단다.”
아메룬이 후후 웃으며 내 머리카락에 향 좋은 오일을 발라주었다.
“남작님이 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르지, 너?”
다른 하녀도 거들었다.
“맞아, 사샤. 네가 방학 때 영지로 못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할 때마다 시무룩해지셨어!”
“말도 안 돼요!”
나는 그녀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인페르나 남작님이 시무룩해졌었다고? 그 천하의 인페르나 남작님이?
“그나저나, 너 아카데미에서 잘생긴 남자 안 만났니?”
아메룬의 말에 다른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질문 세례를 내던졌다.
“그래, 그래. 도시 남자들은 어떠니? 정말 다 반짝반짝하고 잘 생겼어?”
“너 설마 아카데미에서 공부만 한 거 아니지? 연애도 했겠지?”
“첫사랑 얘기 좀 해 봐!”
어째선지 이 언니들은 오스첸스 아카데미가 남학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음…… 잘생긴 남자는 없었어요. 로지에 도련님이 제일 잘 생겼더라고요.”
나는 양심 위에 손을 얹고 그런 답을 했다.
실제로 내 기억상 도련님 외에 딱히 입이 떡 벌어지도록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물론 데클란은 제외다. 그 애는 중간에 돌아갔으니까 비교 대상이 아니다.
내 대답을 들은 하녀들이 꺅꺅 웃으며 나를 놀렸다.
“어머나, 사샤 너 그렇게 안 보였는데!”
“하긴, 우리 도련님이 잘생기긴 했지.”
“너 혹시 도련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다른 귀족 가문에서 우리 로지에 도련님 눈독 들이는 영애들이 많다던데, 너 조심해야겠다!”
하녀들의 놀림에 나는 얼굴조차 붉히지 않았다.
“저 로지에 도련님 안 좋아해요.”
사실이었다.
로지에를 친구로서 좋아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언제까지나 어린 시절 같이 뛰어놀고 시간을 보내면서 생겨난 우정이었지, 절대로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었다.
하녀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얘, 도련님이 그 말 들으면 우시겠다.”
“도련님이 왜 우셔요?”
“왜긴 왜겠어? 도련님이 너 좋아하는 거 동네방네 다 소문났어. 사샤 너, 남작님이 왜 오늘 연회를 열었다고 생각하니?”
……이건 무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