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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89)화 (89/177)

89화

‘혹시 또 날 이레사 공녀로 오해하고 잡으러 온 건가?’

지난 5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남자로 살면서 그들의 포위망을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부모님이 그간 아무도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알아본 결과, 이레사 공작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이레사 공녀도 내가 아카데미에 재학한 지 2년 차가 되었을 때 다시 버젓이 되돌아왔다.

그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과회나 파티를 참석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저번에 나더러 이레사 공녀라느니 하면서 왔던 사람이 잘못 알았던 모양이야.’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머릿속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래서 다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나는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제압해야 한다.

탁!

벨트에 매어둔 총이 분리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 나는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손 들어.”

“뭐, 뭐라……”

당혹감에 휘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남자는 내가 이렇게 바로 총을 빼내 들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총의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조금 더 넣었다.

“이마에 구멍 내기 전에 손 들으라고.”

“미, 미쳤어? 하지 마! 봐, 보라고! 지금 손들었어!”

내 노골적인 경고에 남자는 허둥지둥 두 팔을 허공 위로 들어 올렸다.

‘흐음…….’

당황한 기세가 역력한 것으로 미뤄보아 아무래도 마음먹고 날 해치려고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당장 무기를 꺼내 내게 덤벼들었을 게 분명했다.

“너 누구야?”

“나야, 사샤!”

두 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내게 호소했다.

그 남자는 나를 잘 안다는 듯이 내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게 남자의 목소리는 낯설기만 했다.

“그러니까 넌 누군데? 너 나 알아?”

저벅, 저벅.

여전히 총을 남자의 머리를 향해 겨눈 채, 내가 앞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러자 남자는 더더욱 애간장이 녹는다는 듯이 음성을 높였다.

“당연히 알지! 너 나 기억 안 나? 나, 나야! 케쉬키라고!”

케쉬키?

그 말을 들은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케쉬키라면 잘 알고 있었다.

이 마을의 아이 중 가장 앞장서서 어린 시절의 데클란을 괴롭히던 놈 아닌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뼈대가 굵고 육중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제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불량배!

그때, 여름 바람이 휙 불며 구름이 밀려났다. 덕분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땅 아래로 내려오며 남자의 얼굴을 밝혔다.

그의 얼굴을 본 나는 단번에 그가 정말로 케쉬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잊을 수 없었다. 워낙 개성 있게 생겼던 녀석이었으니까.

5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지만, 케쉬키는 여전히 케쉬키처럼 생겨 있었다.

다만 내 앞에 선 녀석의 안색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퀭한 눈매에 우묵우묵한 마맛자국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마치 크게 앓다가 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너 역병 걸렸었냐?”

가만히 케쉬키를 바라보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응?”

“얼굴이 왜 그 모양 그 꼴이야.”

“뭐라고?”

“그러니까, 얼굴이 어쩌다가 그렇게 삭은 거야?”

“삭았다니. 내 천연 외모인데.”

“아…… 힘내.”

“너 지금 나보고 못생겼다고 한 거야?”

케쉬키가 투덜거리며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에 나는 곧장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케쉬키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 주무시고 계시니까 조용히 하고, 우리 집 앞에서 왜 알짱거리고 있었는지나 말해.”

내 말에 케쉬키는 또다시 반발하기 시작했다.

“아, 알짱거리는 거라니! 네가 돌아왔다고 해서 만나러 온 거야!”

“이 야밤에?”

케쉬키의 말에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비정상적인 시간에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원래 네가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만나려고 왔었어. 그런데 너는 부모님이랑 곧바로 데클란 새끼의 집에 들어가서는…….”

케쉬키는 말꼬리를 흐리며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는 데클란의 집을 흘겨보았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나는 여전히 한 손으로 총을 쥔 채 물었다.

“그래서, 내가 데클란네 집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금 찾아왔다고?”

“그래!”

“지금 설마 나보고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싸늘해진 얼굴로 케쉬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케쉬키 이 자식이 내가 마을로 돌아온 걸 보자마자 나에게 인사하러 왔는데, 내가 도착과 동시에 데클란의 집으로 가버려서 타이밍을 놓쳤다고?

그래서 내가 데클란의 집에서 다시 나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 물론 계속 여기 근처에 있었던 건 아니야!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가 한 시간에 한 번 나와서 상황 보고 다시 집에 돌아갔어!”

“뭐?”

그러니까 내가 데클란의 집 안에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케쉬키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와서 내가 뭘 하고 있나 훔쳐봤다는 거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너 스토커야? 왜 그런 짓을 해?”

“나, 나는 그냥 사샤 네가 마을로 다시 돌아온 게 반가워서…….”

“그러면 날이 밝았을 때 다시 찾아오면 될 거 아니야! 아니지, 그 전에 너랑 나랑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잖아! 갑자기 왜 친한 척하고 난리야?”

순간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울컥 터져 나왔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케쉬키 놈을 데리고 토끼 겸 멧돼지 사냥을 하러 갔을 때의 그 일을.

“너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잖아!”

“뭐?”

“너랑 나랑 어렸을 때 토끼 잡으러 갔을 때 기억 안 나? 너 때문에 멧돼지가 나한테 달려들었잖아!”

그랬다.

그날, 케쉬키는 사냥용 가방이 아닌 일반 가방을 가지고 왔다.

덕분에 토끼 피 냄새를 맡은 멧돼지가 내 앞에 나타났다.

거기까진 어린아이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나무 위로 도망친 케쉬키가 석궁으로 멧돼지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멧돼지가 나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때 마침 근처에 있던 인페르나 남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난 진작 죽었을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다시 피가 거꾸로 머리를 향해 역류하는 것 같았다.

반면 케쉬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뭐야, 너 아직도 그 일 생각하는 거야?”

“뭐?”

“그게 벌써 얼마나 오래된 일인데, 아직도 그걸 못 잊고 생각하고 있어. 사샤 너 생각보다 속이 좁구나.”

“너 귀먹었냐? 내가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니까. 넌 그날 이후 나한테 미안하다고나 한 적 있어?”

내 말을 들은 케쉬키는 혀를 쯧쯧 찼다.

“아, 그것 때문에 화난 거야? 사샤 너 착한 앤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다.”

“아, 그래? 나한테 실망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와…… 너 왜 이렇게 감정적이야? 혹시 너 오늘 설마 그날이라서 그런 거…….”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대로 들고 있던 총을 들어 올려 냅다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탕!

총알이 그대로 케쉬키의 오른쪽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스스, 소리와 함께 총알에 스치며 베인 케쉬키의 머리카락 한 줌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꺼져.”

내가 이를 갈며 외쳤다.

“사샤, 너…….”

잠시 굳어 있던 케쉬키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제 손등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노린 대로 정확히 귓등 윗부분이 총알에 스쳤을 테다.

붕대를 제대로 감을 수도 없는 부분이라 잘 때 아플 텐데, 어디 고생 좀 해보라지.

“아, 아아악!”

뒤늦게 귓등의 상처를 발견한 케쉬키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 미친년이! 얼굴이 반반해서 좋게 봐줬더니!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데클란 집에 쪼르르 달려가선! 너는 데클란이 그렇게나 좋냐?”

케쉬키가 주먹을 꽉 쥐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 뭐가 좋다고? 물론 그 새끼가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갑자기 마력도 쓸 수 있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가 훨씬 더 낫거든?”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끼는 지금 데클란을 칭찬하는 거야, 욕하는 거야?

“데클란 그놈은 지금 파수꾼 노릇 하느라 봉급도 잘 받아서 돈도 많지만, 그래봤자 한 철 장사야! 난 정정당당하게 아버지 가업 이어서 내 힘으로 돈을 벌 거야!”

아버지 가업을 잇는 상황에서 뭐가 정정당당하다는 거지?

저렇게 멍청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는 케쉬키가 또 어떤 개소리를 구사하나,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뒤로 케쉬키는 계속해서 데클란의 욕을 퍼부었다.

보아하니 평상시에도 저렇게 데클란에 대해 막말을 퍼붓는 모양이다.

한참을 듣던 나는 하품을 하며 케쉬키에게 눈짓을 했다.

“다 했니? 나 이제 집에 돌아가서 자도 돼?”

“사샤 너 후회할 거야! 남작님 구두 굽이나 핥는 그런 개자식이 뭐가 좋다고?”

“인페르나 남작님은 굽 높은 구두 안 신으신다.”

갑자기 케쉬키의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먹을 수 없는 건 안 핥아.”

고개를 들어 올리니 예상치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두 눈은 반가움으로 인해, 그리고 케쉬키의 두 눈은 경악으로 인해 크게 뜨였다.

“데클란!”

“데, 데클란…….”

나를 흘끔 쳐다본 데클란은 케쉬키를 째릿 노려보았다.

“넌 늦은 밤에 도대체 뭐 하는 거지?”

“그, 그게…….”

“좋은 말 할 때 꺼져.”

데클란의 한마디에 케쉬키는 깨갱 꼬리를 내리며 순식간에 도망쳤다.

순식간에 나와 데클란만 자리에 남게 되었다.

데클란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터벅터벅 다가왔다.

“넌 피곤할 텐데 잠이나 자지, 왜 밖에 나와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저런 해충이 꼬이지.”

“그러는 너는?”

총을 도로 거둬드린 내가 팔짱을 끼며 데클란에게 물었다.

나야 배가 너무 불러서 잠이 안 왔다는 제대로 된 변명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데클란은 왜 여태까지 잠을 안 자고 있었던 것일까.

“잠이 안 와서 그냥 계속 누워있었어. 그러다가 밖에서 네 목소리가 나서 나와 봤어.”

“잠이 왜 안 왔는데?”

“몰라서 물어?”

가벼운 내 질문에 데클란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 때문에 잠이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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