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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88)화 (88/177)

88화

“자, 서로 만나서 할 이야기가 많은 건 잘 알겠는데.”

아빠가 나와 데클란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 사샤가 배고플 테니까, 밥 먼저 먹이자.”

“네, 알겠습니다.”

아빠의 말에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부엌 안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데클란은 커다란 트레이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쿵, 소리와 함께 트레이가 테이블 끝자락 위에 놓였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테이블 위로 각양각색의 요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요리들은 서로 겹치는 재료가 단 하나도 없었다.

보통 요리의 수가 늘어날수록 공통 재료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내 앞에 놓인 요리들은 전부 다 색과 향이 다른, 각자의 색이 명료한 요리였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내 앞에 첩첩산중처럼 놓인 접시의 향연을 바라보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래……?’

당황해하는 나와 달리, 내 부모님과 데클란의 어머니는 소파에 느긋이 앉아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데클란은 총 열두 개의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은 뒤에야 트레이를 거두었다.

그러고선 이렇게 말했다.

“먹어.”

“이걸 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놓인 접시들은 최소한 일 인분 이상의 음식을 담고 있었다.

이걸 다 먹으라는 건 나보고 배불러서 죽으란 소리나 다름이 없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클란은 마른 수건에 손의 물기를 닦으며 덤덤히 말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여러 가지 준비해 놨어.”

그 말에 나는 더더욱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도대체 뭐야? 너무 많잖아!”

“다 먹을 필요 없어. 먹고 싶은 것만 먹어.”

“그렇지만…… 이거 전부 다 데클란 네가 만든 거 아니야? 네가 열심히 땀 흘리면서 만든 요리를 낭비할 수는 없어!”

“만드는 데 오래 안 걸렸어.”

호화로운 식탁 앞에서 데클란은 잘도 그런 거짓말을 했다.

뒤편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데클란의 어머니가 슬쩍 끼어들었다.

“참고로 데클란이 5시간 동안 혼자서 요리했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데클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데클란은 괜히 목덜미를 잡으며 시선을 조용히 돌렸다.

“……4시간 50분이었어.”

“아, 그래…….”

“그게……원래 요리를 여덟 개만 하려고 했는데, 네가 예정보다 조금 더 늦게 오는 바람에…… 네 개 더 추가했어.”

“…….”

본의 아니게 데클란에게 극한 주방일을 시키게 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들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여기서 내가 제일 먹었으면 하는 요리 추천해 줘.”

“이거.”

데클란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테이블 가장 중앙에 놓인 접시를 가리켰다.

“비프웰링턴이야.”

데클란이 가리키는 접시 위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파이 크러스트와 그 안에 돌돌 말려있는 연한 분홍색의 소고기 한 덩이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칼로 깔끔하게 단면이 잘린 소고기에서는 부드러운 육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막 오븐에서 나온 건지 아직도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파이의 고소한 향과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소고기 옆으로 세이지와 파슬리가 곱게 장식되어 있었다.

“와아…….”

나는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며 큰 충격에 빠졌다.

이게 지금 이런 시골 농촌 마을에 사는 평민 식탁 위에 나올 법한 요리야?

“저기, 데클란…….”

“왜.”

“이 소고기…… 어디서 났어?”

이 마을에 있는 정육점에는 소고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잡을 소가 많지 않았다. 토질이 워낙 척박한지라 소를 키우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영지의 남부에 소를 키우는 자그마한 농장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 소들은 희소성에 의해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내 앞에 소고기가 있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에 잠겨있었다.

이런 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데클란이 입을 열었다.

“소고기는 인페르나 남작님이 주신 거야.”

“뭐라고? 이리 귀한 걸 네가 먹지, 왜 굳이 나한테 줘?”

“귀한 거니까 너한테 굳이 주는 거야.”

아예 내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데클란은 내 손에 친히 포크를 쥐여 주었다.

“어서 먹어봐.”

“그렇지만…….”

나는 소파에 모여 앉아있는 내 부모님과 데클란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세 어른은 하하 웃으며 내게 손짓을 했다.

“우린 네가 오기 전에 벌써 다 맛봤단다.”

“미안해하지 말고 어서 먹어보렴. 데클란이 무안해하잖니!”

그 말에 나는 허둥지둥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 내 앞에 놓인 요리를 맛보기 시작했다.

참고로 눈물이 날 정도로 맛이 있었다.

“데클란 너 정말 요리 잘한다. 혹시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배웠어?”

“아니. 그냥 요리책에 나온 대로 한 건데?”

“너 정말 대단하다. 나는 계란 프라이도 하나 제대로 못 하는데…….”

나는 두 눈을 초롱초롱 뜨며 데클란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자식, 검도 잘 쓰고 요리도 잘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완벽해지려는 거야?

역시, 남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이구나.

나는 이 완벽한 남주인 데클란을 가지게 될 여주 이레사 공녀를 떠올렸다.

지금 이레사 공녀도 으리으리한 공작가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겠지?

그것도 모자라 곧 이 완전히 소중한 남자까지 얻게 된다니…….

역시 여자 주인공!

“너랑 나중에 결혼하게 될 사람이 정말 부럽다!”

열심히 데클란이 해준 때 늦은 저녁 식사를 하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순간 거실에 모여 있던 어른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딸 사샤. 데클란이 요리 잘하는 게 그렇게 좋았니?”

“이러다가 사샤가 데클란 꼬셔서 남편으로 데리고 가는 거 아니에요?”

“샤네리도 참!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우리 데클란을 데리고 가기에 사샤가 아깝잖아요.”

어른들의 놀림에 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 와중에 데클란이 돌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렇게 불쑥 말했다.

“그럼 나랑 결혼할래?”

“어? 뭐라고?”

데클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진심으로 놀랐다. 입이 절로 떡 벌어졌지만, 어째선지 아무런 음성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맞장구를 쳐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자, 데클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기만 먹으려니까 텁텁하지? 물 좀 가져다줄게.”

그제야 나는 다시 물속으로 던져진 물고기 한 마리처럼 도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고기 엄청 부드러워서 별로 텁텁하지 않은데…….”

“그래도 마셔.”

데클란은 그대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내 부모님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사샤.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 이야기 좀 해주면 어떠니?”

“……아, 네! 좋아요!”

테이블 위로 포크를 내려놓은 나는 어른들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나는 그간 편지로 다 전하지 못했던 내 아카데미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제가 2학년 때 있었던 일인데요…….”

내 기억에 남는 재미난 경험담을 들려주며, 나는 가끔 데클란이 사라진 부엌을 향해 눈을 흘끔흘끔 돌렸다.

그러나 데클란은 한참 동안 부엌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그렇게 데클란이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고,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서로 나누고 난 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 2시를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늦었네. 데클란, 너 내일 파수꾼 일 나가니?”

데클란의 어머니가 데클란에게 물었다.

“아니요. 휴가 냈어요.”

“그래? 그러면 언제 다시 나가니?”

“일주일 뒤에요.”

“그렇게나 길게?”

“남작님이 일주일은 쉬고 오라고 명령하셨어요.”

“뭐라고? 세상에, 데클란! 너 설마 해고된 거니?”

“남작님은 손해 볼 일 안 하세요.”

그렇게 대답한 데클란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일 보자, 사샤.”

나는 하품을 하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이라면, 몇 시간 뒤에 해가 다시 뜨면?”

“그래.”

“알았어. 데클란 너도 잘 자!”

그렇게 나는 데클란과 그의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부모님과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네가 돌아간다고 해서 방을 다시 정리해 뒀단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어릴 적 내 방 역시 내가 기억하는 것 그대로였다.

5년 만에 내 방으로 다시 들어오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방이 이렇게 작았던가? 의자가 이렇게 낮았던가? 창문이 이렇게 좁았던가?

“침대가 맞을는지 모르겠구나.”

엄마가 나와 내 침대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이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시면 알겠지만 전 키가 많이 안 컸어요.”

사실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여자인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특히 사춘기가 오고 몸이 성장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내 기우였다.

지난 5년 동안 내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생리도 찾아왔고 그와 관련한 신체 변화도 찾아왔지만, 내 체구는 내 또래보다 훨씬 작았다.

덕분에 5년 내내 아카데미에 있는 그 누구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간혹 내가 키가 작으니까 신입생인 줄 알고 반 말 까던 놈들이 있었지만…… 그거 외에 불편한 점은 없었지.’

지난 아카데미 생활을 떠올리고 있는데, 아빠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성형 마법에 걸리면 성장이 더뎌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빠는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단 먼저 자도록 하렴. 사샤. 너는 이제 어디 갈 것도 아닌데,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예전에 있었던 일을 나누도록 하자꾸나.”

어디 갈 것도 아닌데.

아빠의 말이 맞았다.

이제 나는 내가 18살이 되는 해에 있을 원작의 시작 지점을 기다리며 줄곧 이곳 영지에 살게 될 테다.

데클란이 왕실 부대로 영입되어 수도로 올라갈 때까지 여기에 지내면서, 그가 더더욱 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다시 찾아온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

그 생각과 함께 나는 간단히 몸을 씻고 세안을 한 뒤, 내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침대 크기가 정말 딱 맞는데.’

10살 때부터 쓰던 침대가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운 나는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을 청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아까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데클란이 무려 4시간 50분을 투자하여 만든 음식들이었다.

그의 성의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위장을 열어 전투적으로 음식을 흡입했던 탓일까?

배가 너무 불러서 잠이 오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하고 오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얇은 숄을 걸치고 방문을 나섰다.

혹시나 야밤에 마을로 내려온 살쾡이나 라쿤 따위를 만나게 될까 봐 BB탄 총도 챙겼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부모님의 방에서는 아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밤 10시에 침실에 드는 두 분이었다. 자정을 훌쩍 넘은 지금, 두 분 모두 피로에 휩싸여 곤히 잠자리에 들어 계실 테다.

나는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동네 두 바퀴만 돌고 오면 소화가 되겠…….’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집 앞에 서성이고 있던 검은 인영과 맞닥뜨렸다.

“……?”

예상치 못한 이변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누구세요?”

“…….”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침 구름이 달빛을 반쯤 삼킨 터였다. 시야가 어둑어둑한 탓에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키와 덩치로 미뤄보아 남자로 보였다. 확실한 건 데클란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찾아올 남자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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