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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87)화 (87/177)

87화

인페르나 남작령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마부는 어둑어둑한 밤길이 무섭다면서도 열심히 말을 보챘다.

나와 로지에가 얼마나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부석에서 신이 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네 마을 입구다, 사샤야!”

“와, 정말요?”

나는 마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촥 걷어냈다.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사이좋게 붙어 자라난 나무들, 울창한 숲 사이로 스며드는 풀의 상큼한 향, 드넓은 농장과 밭의 전경.

‘돌아왔구나.’

인페르나 영지로, 마침내 돌아왔다.

“이렇게 오래 떠나있을 줄이야…….”

나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용케도 내 목소리를 들은 로지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사샤 양. 나도 설마 어머니를 5년 동안 뵙지 못할 줄은 몰랐어.”

그 말을 하는 로지에의 얼굴에는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그리웠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그와 동시에 그만큼 오랫동안 인페르나 영지를 떠나있었던 슬픔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샤, 인페르나 남작님에게 인사드리는 건 내일로 미루도록 해라.”

“알았어요.”

마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인페르나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인페르나 남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지난 5년 동안 내가 아무런 돈 걱정 없이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이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러니 남작을 직접 만나 고마움을 전하고, 내가 아카데미에서 얻은 성과를 보여주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미 도착 예정이었던 오후 9시가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이러다가 자정이 돼서야 인페르나 남작에게 인사를 드리게 될지도 몰랐다.

‘너무 늦게 찾아가도 민폐일 테니까.’

오늘은 얌전히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과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자.

그리고 내일 인페르나 남작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을 만나 안부를 전하도록 하자.

‘데클란은…… 집에 있으려나?’

그간 데클란과 주고받은 서신에 의하면, 데클란은 요즘 파수꾼으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고 다니느라 바쁘다고 했다.

가끔 온종일 마을의 회관이나 곡물 창고에 잠입하거나, 혹은 숲에 매복하여 범죄자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집에 못 들어가는 일도 허다하다고 했다.

그러니 만일 오늘 데클란이 집에 없더라도 놀랄 것은 없었다.

‘데클란이 집에 있으면 짧게 얼굴이라도 보고 인사라도 하는 건데…….’

데클란을 보지 못한 지 벌써 몇 년째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아직도 그의 친구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와 데클란은 편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교류했다.

그러면서 서로 생각이 자라나고,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 더 성숙해지고, 또 어릴 적에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을 목격했다.

비록 서로 옆에 서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와 그는 항상 같은 시간 선상에서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종이 위에 남겨진 대화는 나와 데클란의 관계를 더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데클란이 생각날 때면 그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보낸 편지들을 찬찬히 읽어 내렸다.

그럴 때마다 데클란이 얼마나 성장했고, 어떤 과정을 걸쳤으며, 어떻게 지금의 그가 되었는지 다 되새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항상 기쁘게 만들었다.

‘그 녀석, 키 엄청나게 컸겠지?’

인페르나 남작 밑에서 일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고기를 먹었겠지.

게다가 몸을 가만두지 않고 항상 움직이며 체력을 단련했으니, 아무래도 근육질 몸매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두 눈을 감고 데클란이 지금 어떻게 생겼을지 한 번 상상해보았다.

그 비실비실하던 데클란이 이제는 우락부락한 장사가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키도 두 배는 더 커버리고, 몸무게도 세 배는 더 불어나 버렸겠지?

그리고 어릴 때부터 잘생겼던 얼굴도 지금은 더 잘생겨졌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마을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여름밤 바람을 쐬기 위해 집 밖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차를 향해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늦은 시간에 왜 남작가의 문장이 있는 마차가 나타났는지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마차를 구경하기 위해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 중에는 낯익은 얼굴들도 있었다.

대부분 내가 어릴 때 한 번쯤은 말을 섞어본 적 있는 또래 아이들이었다.

그 얼굴들을 보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쟤네들은 다 양아치들로 자랐으려나?’

원작 소설에 의하면 동네 아이들은 하나 같이 인성이 더럽고 행적이 깨끗하지 못한 불량배들로 자라났다고 했다. 그래서 데클란을 툭하면 괴롭혔다고.

그렇지만 지금의 데클란은 마력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 마을 아이들에게 이제는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을 테다.

‘뭐, 여기서 지내면서 천천히 알게 되겠지.’

설령 동네 아이들이 하나 같이 발랑 까져서 불량배로 변했다고 한들, 내가 다시 정의로 다스리면 될 일 아닌가.

참고로 내 오른쪽 주먹의 이름이 바로 정의다.

그렇게 폭력을 어떻게 잘 사용해야 영지 평화공헌상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때.

“도착했다, 사샤!”

다그닥거리던 말굽 소리가 가라앉으며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빨간 지붕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데클란의 집이었다.

반대편의 창문으로 급히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샤야!”

“엄마, 아빠!”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마차 소리를 들은 부모님이 집에서 그대로 뛰어나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마부는 웃는 얼굴로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짐 가방을 들고 내리는 것도 잊고 그대로 엄마와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요!”

나는 머리만 커진 어린 소녀처럼 그래도 부모님의 품에 안겨들었다.

“세상에, 우리 딸이 이렇게 컸구나!”

“얼굴 좀 보자!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야!”

부모님은 내가 기억하는 대로 그대로였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의해 얼굴 주름이 조금 더 늘었고, 머리카락도 일부분이 희끗희끗 변해 있었다.

그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 나는 새삼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깨달았다.

“보기 좋네요.”

“그러게요. 가족 간의 상봉은 언제나 봐도 마음이 따뜻해진다니까요.”

뒤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의 품에서 떨어져 고개를 돌리니, 내 뒤를 따라 나온 마부와 로지에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밖에 서 있지 말고 일단 집 안으로 돌아가시죠.”

마부가 내 짐 가방을 내밀며 부모님에게 말했다.

부모님은 급히 마부에게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먼 곳까지 저희 딸 데리고 와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고생은요. 저는 마차 모는 것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을 남긴 마부는 로지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희도 이제 인페르나 남작가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도련님.”

그 말에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내보였다.

“사샤 양, 부모님과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해. 내일 오후에 인페르나 남작가로 올 수 있게 마차를 한 대 보내도록 할게.”

“네, 알았어요. 도련님도 남작님이랑 좋은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로지에 도련님!”

그렇게 나와 부모님의 인사를 받은 로지에는 순순히 마차 위로 올라탔다.

이윽고 마차가 떠나고, 그 자리에는 나와 부모님만 남게 되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힘들진 않니?”

“마차 안에서 자서 괜찮아요.”

“여름인데 더워서 땀 많이 흘렸지? 목욕 먼저 할래?”

“아뇨, 로지에 도련님이 마법 써서 오는 내내 시원했어요.”

“그렇구나. 그럼 저녁은 먹었니?”

엄마와 아빠는 여느 부모님과 똑같이 자식의 식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음, 오는 길에 마을에 들려서 샌드위치 하나 먹긴 했는데…….”

“샌드위치 하나 가지고 되겠니? 잘 됐다. 우리 집에 짐 두고, 어서 데클란 집으로 가자.”

“네?”

부모님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데클란의 집에는 왜 가는 거야?

그러나 부모님은 내게 답을 주는 대신 나를 데클란의 집으로 이끌었다.

짧은 노크가 끝나기도 전에 데클란의 집 문이 열렸다.

“어서 오렴, 사샤.”

데클란의 어머니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문가에 서 있는 데클란의 어머니를 보니 그녀를 맨 처음에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데클란을 괴롭히던 삼류 악역이었던 시절. 데클란의 어머니는 나를 집에 들여주고 싶지 않아 하며 내게 쌀쌀맞게 대하셨지.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데클란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어서 들어오려무나.”

데클란의 어머니는 나를 쫓아내기는커녕 도리어 안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데클란의 어머니와 내 부모님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가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군침이 절로 도는 기름진 냄새였다.

뭐지?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대로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식탁에 앉혀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잠깐만요, 데클란은요?”

설마, 오늘은 집에 오지 않는 날인가?

내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데클란의 어머니와 내 부모님은 찡긋 웃으며 동시에 부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방향을 향해 턱을 돌린 순간.

나는 부엌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

숨이 거꾸로 들어갔다.

내 앞에 나타난 데클란은…… 내 상상 그 이상이었다.

데클란은 내 예상대로 아주 곱게 잘 자라나 주었다.

조각상처럼 정석적인 미남의 얼굴이었다.

황금처럼 빛나던 두 눈동자는 예전보다 더 형형 빛을 내고 있었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또한 그의 사랑스러운 적갈색의 곱슬머리는 더더욱 윤기 있게 자라나 있었다.

지금 내 눈앞의 이 남자는 어린 시절 수영을 하다 지쳐서 뻗어 누웠던 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헌칠한 키와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사샤.”

데클란은 그대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리에 앉은 상태로 굳어버린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데클란…….”

“보고 싶었어.”

짤막하게 그 말을 내뱉은 데클란은 나를 대뜸 와락 껴안았다.

나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그의 체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기억 속의 데클란은 아직도 11살의 꼬마인데.

그런데 내 앞에는…….

“너…… 많이 달라졌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입에서 읊조리고 말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 질문을 하는 데클란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그대로 데클란을 꼭 끌어안았다.

“마음에 들어.”

그제야 내가 정말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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