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마요, 마담 쟈니에트!’
나는 마차 정거장에 서서 귀족 학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사를 나누고 있는 마담 쟈니에트를 향해 선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 뒤로 나와 로지에는 함께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를 찾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수 십 대의 마차 행렬 중에 인페르나 남작가의 문장이 달린 마차를 찾았다.
“아이고, 로지에 도련님!”
우리를 알아본 마부가 두 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세상에나, 정말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그리고 사…… 아니, 엔리 군……! 크흡, 둘 다 이렇게 잘 커 주시다니……!”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마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게 정말 얼마 만에 보는 겁니까? 도련님도 아주 의젓한 것이 이제 남자가 다 되었군요!”
“하하, 저는 원래부터 남자였는데…….”
마부는 로지에의 말을 못 들었는지 그대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도 못 본 사이에 아주 잘 성장했구나! 그런데 키는 좀 덜 컸네!”
“…….”
마부의 말에 나는 영혼 없는 미소를 보였다.
분한 것은 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었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참작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체구가 작았다. 마치 성장판이 ‘응, 나 일 안 할게~.’하고 파업 선언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키가 작아서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잖아!’
예를 들어서 높은 선반에 놓인 물건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아도 된다던가, 햇빛에 노출되는 면적이 더 줄어든다던가,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볼 때 예쁜 각도로 보인다던가, 등등!
그렇게 키에 대한 고찰에 온 정신이 팔려있을 때, 바로 옆에서 로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 잡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리니 로지에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옆에서 마부가 대신 그의 짐을 들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로지에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악수하자고요?”
“아니, 에스코트해 주려고.”
그렇게 말하는 로지에 뒤로 활짝 열린 마차의 문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이게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피식 웃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도련님.”
양손에 가방을 꽉 쥔 나는 그대로 가볍게 마차 안으로 뛰어올랐다.
“제 손 잡고 올라오세요, 도련님!”
가방을 내려놓은 나는 마차 밖에 선 로지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말 내게 틈을 주지 않는구나.”
멍하니 굳어 있던 로지에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요?”
“음, 아무것도 아니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로지에는 이윽고 내 손을 맞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페르나 남작령으로 향하는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데클란.”
“…….”
“데클란, 듣고 있는 게냐.”
“…….”
“데클란!”
“……아, 죄송합니다.”
이름이 세 번이나 불리고서야 데클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데클란의 맞은편에는 조금 심기가 불편해진 인페르나 남작이 앉아있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던 것이냐?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모양이구나.”
남작은 혀를 차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탐스럽게 곱슬곱슬한 적갈색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아래로 황금처럼 반짝거리는 두 눈동자와 날이 선 콧대,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루 대다수를 야외에서 보내는지라 데클란의 피부는 진한 구릿빛으로 타 있었다.
여러모로 여성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외모였다.
‘이 녀석은 가면 갈수록 잘생겨지네.’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귀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성숙해지면서 더더욱 그 진가가 발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마을의 미혼 여자들이 저 녀석을 남편으로 삼겠다며 서로 줄 서서 난리를 칠 게 눈앞에 훤했다.
그 생각이 들지 인페르나 남작은 순간 마을의 미혼 여자들이 불쌍해졌다.
왜냐하면 오늘은 사샤와 로지에가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고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데클란 이놈은 사샤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놈이라 다른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남작은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실연당한 다른 여자들에게 심심찮은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세월 참 빠르군.’
데클란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견습 파수꾼이 되겠다고 선언한지 벌써 다섯 해가 지났다.
그동안 인페르나 남작은 데클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력을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인페르나 남작이 백작가 영애였을 때 배웠던 검술과 호신술, 그리고 그 외의 무예와 관련된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인페르나 남작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사실 남작은 데클란을 이렇게 열심히 가르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마력을 다루는 기본만 알려주고 나머지는 파수꾼들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런데…….
‘……나보다 마력이 더 강한 것 같은데?’
데클란이 사용하는 마력을 본 인페르나 남작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단언컨대 데클란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재하고 있는 마력은 남작이 가진 마력의 몇 배나 더 강력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데클란은 배우는 속도가 천재적으로 빨랐다. 거기다가 그는 한 번 배운 것을 어떻게든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반복해 학습했다.
한 번 눈을 뜬 맹수는 두 번 다시 잠들지 않았다.
마력의 감각을 익힌 데클란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자신 같은 인재를 놓치면 후회할 거라고 떵떵거리더니,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군.’
나날이 성장하는 데클란을 보며, 인페르나 남작은 조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아이를 조금 더 크게 키우고 싶다.
한 번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
이 변변찮은 인페르나 남작령에서 내 손으로 직접 대단한 인물을 만들어내고 싶다!
때마침 온 왕국에 역병이 돌아 영지 밖으로 사람이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없어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친아들인 로지에나 마음에 드는 아이인 사샤도 전부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적 요인과 어떻게든 영지를 부흥시키려는 남작의 개인적인 욕심이 잘 물린 톱니바퀴처럼 굴러갔다.
인페르나 남작은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데클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데클란은 견습 파수꾼이 아닌 정식 파수꾼으로 임명되었다.
온 영지 역사상 최연소 파수꾼이었다.
그는 남작의 명령에 따라 영지의 곳곳을 순찰하고 다니며 벌어진 사건 사고를 보고했다.
그리고 데클란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사건을 인페르나 남작에게 보고하곤 했다.
“그래서, 오늘 영지 순찰 보고는?”
인페르나 남작의 질문을 받은 데클란은 능숙히 입을 열었다.
“센레이나 마을에서 살인 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센레이나 마을에 사는 남자 한 명이 평소 짝사랑하던 마을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칼을 들고 여자 집으로 쳐들어간 사건입니다.”
데클란의 보고를 들은 인페르나 남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 그런 쓰레기 새끼가 다 있어? 사형시켜.”
“예.”
그렇게 감옥에 갇힌 범죄자의 처벌이 결정되었다.
그 뒤로 데클란은 계속해서 남작에게 보고를 올렸다.
어느 농부가 실수로 경계선을 잘못 알고 다른 농부의 밭까지 농작물을 심어버렸는데, 이에 대한 수확물을 누가 소유하게 되는지에 관한 법정 다툼부터, 조금 전 말했던 것과 같은 사람 대 사람의 사건 사고까지.
그렇게 마지막 보고가 끝나자 시계는 어느덧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작님.”
똑똑, 소리와 함께 남작의 집무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택의 집사였다. 저녁 식사 시간을 정확히 맞춰 찾아온 것이다.
“데클란 너도 먹고 갈 테냐?”
시계를 흘끔 확인한 인페르나 남작이 데클란에게 물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소고기 먹는 날인데도?”
오늘은 인페르나 남작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몇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자기 아들과 다시 재회하는 날이었다.
사실 마음만 같으면 남작은 진작 오스첸스 아카데미로 가서 로지에의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서 영지를 다스리는 몸인지라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남작은 특별히 소 한 마리를 잡아 저택의 모든 이들이 만찬을 즐기도록 명했다.
데클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런데도 소고기를 마다하다니?
“저녁 식사는 어머니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것보다 사샤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냐.”
데클란의 말에 남작이 괜한 토를 달았다.
데클란은 굳이 이 사실에 반박하지 않았다.
“네, 오늘은 사샤가 돌아오는 날이니까요.”
“밥 먹고 돌아가도 늦지 않을 텐데?”
남작이 데클란에게 그 사실을 지적했다.
사샤는 지금쯤 로지에와 같은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테다.
마차의 도착 예정 시간은 밤 9시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남작이 권하는 대로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클란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샤가 제게 반할 정도로요.”
“뭐?”
남작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데클란 놈이 뭐라고 지껄인 거지?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사샤에게?
맹세컨대 남작이 아는 데클란은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본래 불필요한 말은 전부 생략하며 매사 입을 다물고 다니는 무뚝뚝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이 띤 말을 하는 이가 아니었다.
“데클란 너…….”
“예.”
“진정 미쳤느냐?”
“아직 안 미쳤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더 미치기 전에 어서 가거라.”
인페르나 남작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데클란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
집무실을 벗어나기 전, 데클란이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는 듯이 남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하루 휴가를 내고 싶습니다.”
데클란의 말에 남작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데클란은 파수꾼으로 일하면서 여태껏 휴가 한 번 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휴가를 내겠다니,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언제 쉴 건데?”
“내일이요.”
남작을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이 썩을 것아. 그런 걸 왜 하루 전에 말해?”
“……안 됩니까?”
“안 돼.”
데클란을 찌릿 노려본 남작이 그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루 휴가 가지고 어림도 없지. 일주일은 쉬고 와.”
“남작님…….”
“휴, 너 같은 인재를 일주일이나 놀리다니, 내가 미쳤지……. 내 마음 바뀌기 전에 냉큼 꺼져라.”
그 말을 남긴 남작은 그대로 등을 돌리고선 자신의 집무실 책상으로 돌아갔다.
잠시 남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작님은 참 다정하시네요.”
“뭐? 미친 소리 작작 지껄이고 집에 가라.”
“네.”
“가기 전에 부엌에서 소고기 좀 가지고 가고.”
“아니요, 그럴 필요는…….”
“상관이 까라면 까야지, 뭔 말이 많아?”
“알겠습니다.”
데클란은 남작의 명령에 따라 남작가의 주방에서 소고기를 받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