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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85)화 (85/177)

85화

화사한 여름이 발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로지에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도련님!”

문고리가 채 반동하기도 전에 나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로지에는 아직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두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새근새근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련님, 아직도 주무세요?”

“…….”

“로지에 도련님?”

“…….”

세 번이나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 안에는 오로지 로지에의 시근거리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두 눈을 감은 로지에는 무슨 좋은 꿈이라고 꾸고 있는지 입가에 미소가 어렴풋이 떠올라 있었다.

‘하아…….’

로지에를 깨우기 위해 나는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련님, 이제 일어……앗!”

침대 위에 누워있던 로지에가 순식간에 두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대로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뭐 하시는 거예요, 도련님!”

덩달아 로지에의 위에 쓰러진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하, 잡혔네!”

장난스러운 얼굴의 로지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에요, 일부러 자는 척한 거예요?”

“응.”

“도대체 왜요? 올해 나이를 16살이나 잡수셨으면 이제 슬슬 제가 깨우기 전에 알아서 기상하실 수 있잖아요!”

한숨을 내쉰 나는 로지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물론 혼자서 기상할 수 있지.”

여전히 이불 속에 꼭 들어가 있는 로지에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안 일어나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사샤 양이 찾아오는데, 왜 굳이?”

“도련님…….”

로지에의 골 때리는 대답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아무래도 도련님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것 같다.

5년 전, 나와 로지에가 아직 신입생이었을 때, 나는 로지에가 잠이 많은 줄 알았다.

그때 로지에는 11살이었다. 그런 나이면 잠 욕심이 많고, 부지런하게 살기 싫고, 그냥 한없이 늘어지고 싶을 나이 아닌가.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로지에는 데클란과 비교할 수 없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로지에는 필요하면 혼자서 알아서 잘 일어나고 세신도 척척 하고 아침 식사도 잘 챙겨 먹었다.

거기다가 자기 옷매무새를 완벽하게 정돈하고, 침대까지 각이 지도록 다시 만들고,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 것 없이 욕실 바닥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

필요할 때만 말이다.

수업 외에 별다른 일정이 없을 때 로지에는 매번 이불 속에 꼭꼭 숨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사샤 양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제가 무슨 도련님의 알람 시계냐고요!”

그랬다.

로지에는 그저 내가 자신을 깨워주러 오는 것을 즐겼을 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매우 최근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로지에의 속도 모르고 지난 5년 동안 매일 매일 꼬박꼬박 그를 깨우러 방에 들었다.

뭔가 손해 본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사샤 양…… 나한테 화 난 거야?”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파르르 떨리는 로지에의 기다란 속눈썹과 우수에 잠긴 눈망울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나는 반쯤 홀린 사람처럼 로지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상에서 도련님이 제일 귀여워요! 도련님 최고!”

그러자 로지에는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살짝 붉히며 웃었다.

“헤헤, 귀엽다는 말만 하지 말고 잘생겼다고 말해주면 안 돼?”

“네네, 도련님 잘생기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고 해 줘!”

“아, 그건 좀 곤란해요.”

뚝.

나는 정색하며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왜, 왜에?”

“그런 말은 아무에게나 하는 거 아니에요. 결혼할 상대에게나 하는 거지.”

그렇게 대화의 흐름을 끊은 나는 아직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로지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가요, 도련님. 늦겠어요.”

“늦다니? 오늘 수업 없잖아.”

“잊으셨어요?”

내가 씩 웃으며 로지에에게 살짝 윙크를 날렸다.

“오늘 드디어 저희 졸업식이잖아요!”

졸업식!

맞다. 나와 로지에는 오늘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된다.

지난 5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첫 학기를 보낸 데클란은 갑자기 퇴학을 선언하고 인페르나 남작령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가 내게 보낸 편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편지를 맨 처음 읽었을 때 어찌나 충격에 휩싸였던지.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다가 다시 편지를 펼쳤다. 그 뒤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져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편지로 눈을 돌렸다.

‘데클란…….’

어떻게 된 일일까.

데클란은 분명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데클란이 오스첸스 아카데미에 재학하여 검술에 대해 더더욱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되면 그가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데클란은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다.

그 내용을 읽었을 때 누군가가 내 머리를 방망이로 때린 기분이 들었다.

‘파수꾼이라면 인페르나 영지 내부에 일어나는 범죄나 사건들을 조사하는 사람들이잖아?’

파수꾼이 되겠다는 건 인페르나 영지에 눌러살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데클란은 왕국 수도로 가야 한단 말이야! 거기서 이레사 공녀랑 만나서 연애해야 하는데!’

원작 흐름과 멀어진 데클란의 선택에 나는 베개를 퍽퍽 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지, 인페르나 남작님 밑에서 마력을 수련한다잖아.’

그건 그거대로 좋은 거 아닌가?

참고로 데클란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놀랍게 하지 않았다.

데클란은 내게 자신이 어떻게 마력 혈통을 이어받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더는 귀찮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데클란이 마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데클란의 정체성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데클란의 성장이야.’

원작이 시작되는 건 데클란이 18살이 되는 해이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데클란은 그때까지 누구보다 더 강하게 성장하면 되는 거다.

그 누구보다 더 강한 검술 실력자가 되어 다른 왕실 기사들의 코를 납작 누르고, 그대로 여주인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가 되면 되는 거 아닌가.

‘만약에 데클란이 18살이 된 이후에도 계속 파수꾼으로 남고 싶다고 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데클란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물론 원작 소설 흐름대로 진행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없겠……지?

그렇게 며칠 동안 생각을 정리하며 혼란해진 마음을 다스린 나는 데클란에게 답장을 보냈다.

[데클란에게.

답장해줘서 고마워. 네 답장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떠나게 된 건 섭섭하지만, 그래도 데클란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이해할게.

아니, 완전히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고 노력할게.

그리고 인페르나 남작님 밑에서 견습 파수꾼이 된 거 축하해!

너라면 뭘 하든 다 잘 해낼 거라고 믿어. 네가 뭘 하든 항상 응원할게.

나중에 여름 방학이 오면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갈게.

그때 견습 파수꾼으로서의 네 모습이 어떤지 꼭 보여줘!

그리고 나는 요즘 로지에 도련님이랑 매일 검술 연습을 하고 있어.

네가 사라진 뒤로 로지에 도련님이 대신 연습 상대가 되어주겠다고 하셨거든.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도련님 체력이…… 좀 그래서 길게는 못해.

그렇지만 그래도 열심히 할 거야.]

‘왜냐하면 여름에 데클란과 검술 대련을 할 때 내가 너무 못하면 안 되니까.’

여름에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게 되면 데클란은 분명히 나와 검술 대련을 하고 싶어 할 테다.

그때 내가 너무 못하면 안 된다.

그랬다간 데클란이 더 검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멈춰버릴 테니까.

그러니 나와 데클란의 실력 차이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한 나는 힘차게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여름 때 다시 보자!]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또 누군가가 나를 찾아 인페르나 영지로 와서가 아니었다.

그해 봄, 전대미문의 역병이 온 왕국을 휩쓸었다.

왕국의 각각 영지마다 봉쇄 명령이 내려졌다.

“외출을 못 하니까 너무 갑갑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사샤 양. 밖에 나갔다가 역병에 걸리면 어떡해…….”

나와 로지에는 숙소의 거실에 축 늘어졌다.

덕분에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학생들은 외출할 수 없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역병이 가라앉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고, 또 다른 겨울이 와도 역병은 도리어 창궐하기만 했다.

그래서 나와 로지에는 오랜 시간 동안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3학년의 봄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마법사들과 의사들의 합동 노력으로 인해 역병을 치료할 약이 개발되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잠잠해지자 나와 로지에는 드디어 3년 만에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갈 계획을 했다.

그런데…….

“……미안해, 사샤 양.”

“아니에요, 도련님. 다 이해합니다.”

상큼한 미소와 함께 인페르나 영지 행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던 로지에는 그만 계단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5층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떨어진 로지에는 자그마치 전치 6주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세 번째 여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네 번째 여름이 왔을 때는.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야, 사샤 양. 다 이해해.” 

나는 그간 공부를 지지리 안 한 탓에 5학년 진급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 결과 여름 동안 보충 수업을 듣게 되었다.

로지에는 나를 아카데미에 혼자 둘 수 없다며 자진해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마침내 5년의 아카데미 생활이 끝나고 나와 로지에는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오스첸스 아카데미의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고……”

마담 쟈니에트의 지루하고 허영심 가득 찬 졸업식 연설을 끝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로지에를 끌어안으며 내 학사모를 내던졌다.

“이제 집으로 가요, 도련님!”

그렇다.

이제는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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