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마차는 그리 오래 달리지 않았다.
마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남자들은 유리나를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유리나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커다란 서재 안이었다.
벽면에 놓인 책장 안에는 양장으로 된 두꺼운 책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나 같이 금이 테두리로 박힌 비싼 것들이었다.
게다가 대리석 바닥은 사금을 섞었는지 눈에 띄게 반짝거렸다.
“어서 오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유리나의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금가락지가 여러 개 끼워져 있었고, 목에는 보석이 치렁치렁 달려있었다.
“누, 누구세요?”
“나는 마담 쟈니에트라고 한단다.”
여자가 히죽 웃으며 유리나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유리나는 다급히 여자에게 외쳤다.
“저, 절 왜 여기로 데려온 거죠? 지,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러나 마담 쟈니에트는 유리나의 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너, 귀족이 되고 싶지 않니?”
마담 쟈니에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유리나에게 물었다.
“……네?”
“말 그대로란다. 난 너를 귀족 영애로 만들어 줄 수 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채소 가겟집에 얹혀사는 고아 말고, 휘황찬란한 저택에서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귀족 영애 말이야. 어떠니?”
“……!”
유리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다시 가게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그고 이모가 돌아올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꿀 속에 빠진 개미처럼, 유리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순간 이모가 말버릇처럼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너 때문에 미혼모 취급을 받아, 유리나. 이러다가 내가 정말 너 때문에 결혼 못 하게 되면 어떡하니!’
‘너만 없었으면 내가 멋진 남자를 찾아서 연애하고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이게 다 유리나 너 때문이야!’
어쩌면.
어쩌면 내가 이대로 이 여자를 따라가면…… 이모는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꿀꺽.
유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에는, 여자의 제안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 * *
[데클란에게.
인페르나 영지에는 잘 도착했어?
그래, 잘 도착했겠지. 인페르나 남작님이 로지에 도련님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 쓰여있더라.
그나저나 왜 내게 답장을 주지 않는 거야?
혹시 집에 종이가 없어서 답장 편지를 못 쓰고 있는 거야?
내가 이 편지랑 같이 종이 한 장 보냈어. 이 종이로 답장 써서 보내 줘.
방학 동안 나는 로지에 도련님이랑 같이 귤 까먹으면서 놀고 있어.
너 귤 먹어본 적 있어? 맛있더라. 너도 많이 까먹어.
물론 하루 종일 누워서 귤만 먹는 건 아니야.
매일 연무장 가서 도련님이랑 검술 연습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시내에 나가서 놀기도 하고…… 하여튼 잘 보내고 있어.
너는 인페르나 영지에서 어떻게 보내고 있어?
방학 어서 끝나면 좋겠다.
인페르나 영지에서 여기 오스첸스 아카데미로 돌아올 때 옥수수 좀 사다 줘.
그리고 빨리 답장 줘.
답장을 기다리며.
엔(사)리(샤)가.]
* * *
[데클란에게.
너 왜 답장이 없어?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편지 쓴 게 한 달 전이야.
이 정도 기간이면 내 편지를 열여덟 번 정독하고 필사하고 사본까지 만들어 문서 보관한 뒤 답장을 적어서 편지 배달해주는 가게까지 찾아가고도 남았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빨리 답장해 줘.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여기는 어제 눈이 또 펑펑 내렸어.
예전에 너랑 눈싸움하던 게 떠올라서 왠지 기분이 쓸쓸해졌어.
너랑 같이 있으면 또 눈싸움할 수 있을 텐데…….
너 지금 이 편지 읽으면서 로지에 도련님이랑 눈싸움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도련님은 한 송이의 꽃같이 여린 분이란 말이야.
지난주에 로지에 도련님이랑 눈싸움하러 가긴 했어. 그런데 도련님이 내 눈 뭉치에 맞고 그대로 기절해버렸지 뭐야.
도련님이 내게 ‘사샤 양은 힘이 너무 강해!’라고 하셨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그냥 도련님이 약하신 것 같아.
도련님에게 이 얘기는 하지 말아 줘.
그리고 그거 알아? 우리 한 달만 지나면 또 개학이다?
다음 학기에는 검술 수업 때 더 어려운 걸 배운다고 하더라고. 너랑 같이 검술 배울 거 생각하니까 기대돼!
방학 어서 끝나면 좋겠다.
너랑 다시 또 만나고 싶어.
(사)엔(샤)리가.]
* * *
[데클란에게.
당장 다음 주가 개학이네.
그런데 왜 아직도 네 답장이 도착하지 않은 걸까.
언제 돌아와?
……보고 싶어, 데클란.
사샤가.]
* * *
“정말 사샤에게 답장하지 않을 거니?”
데클란의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여러 봉투의 편지들은 전부 다 사샤가 데클란에게 보낸 편지였다.
각기 다른 시기에 보내진 편지였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읽은 흔적이 가득하다는 점.
사샤가 보내온 그 편지들을 데클란이 어찌나 많이 읽었던지 뜯어진 봉투 부분이 너덜너덜해졌고, 편지지는 꼬깃꼬깃 주름이 가 있었다.
“…….”
식탁에 앉은 데클란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제 어머니의 손에 들린 편지를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인페르나 남작과의 마력 수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고된 수행은 늦은 저녁이 돼서야 끝났다.
데클란은 남작가 저택에서 빌린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만든 수프를 먹으며 오늘 자신이 배운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참이었다.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참 동안 침묵을 삼키던 데클란이 그렇게 대답했다.
“편지에 답장하는 게 뭐가 어려울 게 있니? 그냥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말해주고, 또 사샤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어보면 되는 거지.”
“…….”
어머니의 정석적인 충고에 데클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편지지 위에 글을 써 내려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종이 위에 글을 쓰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사샤와 로지에는 아직 데클란이 아카데미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슬퍼할 것이다.
사실 당장 며칠만 지나면 사샤는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다. 왜냐하면 데클란은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개학을 하고도 데클란이 오스첸스 아카데미로 돌아오지 않는 걸 알게 되면, 사샤도 곧 깨닫게 될 테다.
‘그래, 사샤가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게 될 사실인데.’
그런데.
그런데도 사샤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마음이 상할 것이라 생각하니 괴로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클란은 두려웠다.
사샤에게 다시 편지했다간.
그 아이와 다시 예전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간.
‘나도 네가 보고 싶어…….’라고 답장을 보냈다간.
그랬다간, 다시 사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질까 봐서…….
그래서 두려웠다.
‘우습기도 하지.’
이제 숲의 멧돼지도, 자신을 괴롭히던 마을 아이들도, 혹은 자신을 무섭게 훈련하는 인페르나 남작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사샤가 두려워졌다.
그 아이가 보고 싶어서 지금 정해놓은 모든 목표를 포기하게 될까 봐.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는데, 정작 그 아이 때문에 모든 계획이 다 무산이 될까 봐.
‘아니야, 마음 약해지면 안 돼.’
데클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샤를 지키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인페르나 남작 아래로 가서 파수꾼이 되기로 했던 건데…….
그때, 데클란의 어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짧게나마 답장을 써주는 게 좋지 않겠니.”
“그렇지만…….”
“사샤라면 네가 답장을 써주면 좋아할 거야.”
“…….”
데클란은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꽉 쥐었다.
알고 있었다.
‘나는 데클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만약 데클란 네가 기사가 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난 그걸로도 좋아!’
데클란은 항상 사샤가 자신이 기사가 되길 바란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을 했으니까.
신분 따윈 신경 쓸 것 없이 누구나 실력에 따라 기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데클란이 커서 분명히 멋진 기사가 될 거라고 이야기해주곤 했다.
그래서 데클란은 기사가 되고 싶었다.
사샤를 위해서.
하지만 아카데미로 간 뒤로 데클란은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기사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아카데미에서 검술 교사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클란은 자신을 고용한 귀족에게 목숨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데클란은 사샤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사샤를 빼앗아가지 않도록 인페르나 영지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데클란은 자신의 방으로 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사샤에게.]
펜촉 끝으로 흘러나온 잉크가 그 아이의 이름을 예쁘게 기록했다.
[그간 답장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그 뒤로 뭐라고 써야 할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날씨가 추운데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전하고 싶었다.
물론 사샤는 워낙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라 걱정되지 않지만, 그래도 확인차 묻고 싶었다.
사샤가 로지에와 놀아서 조금 질투심이 났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사샤의 다른 친구를 뺏어가고 싶지 않았다.
인페르나 남작과 하는 마력 수련이 힘들어서 매일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쓰러진다는 근황을 전해주면 어떨까.
하지만 사샤가 괜한 걱정을 하게 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견습 파수꾼의 의무를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줄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말을 하지 못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 아이에게 자신에 대해 말해주고 싶은데, 그 과정에서 그 아이에게 알게 모르게 걱정과 부담을 안겨주게 될까 봐 말을 아끼게 되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데클란은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험한 말도 지껄였는데.
그 아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주제에.
“…….”
한참을 고민하던 데클란은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인페르나 남작님 밑에서 견습 파수꾼 훈련을 받고 있어.
난 앞으로 파수꾼이 되고 싶어.]
데클란은 굳이 구구절절 부가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용히 면대면으로 앉아서 설명하고 싶었으니까.
그 뒤로 데클란은 자신의 간단한 근황에 관해 짧게 기록했다. 물론 힘들다는 말은 일절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되면 인페르나 영지로 다시 돌아올 거지? 그때 다시 만나자.
데클란이.]
그것을 끝으로 편지지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데클란은 편지지에 남은 공간을 보았다.
딱 한 문장을 더 추가할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남아 있었다.
“…….”
잠시 머뭇거리던 데클란은 이내 긴 숨을 마신 뒤, 급히 한 문장을 흘려 갈기듯 적어 내렸다.
편지지의 마지막 문장이 종이 위로 스며들었다.
[추신.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