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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82)화 (82/177)

82화

내 목소리를 들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잽싸게 아이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앞으로 굴렀다.

쿠쿠쿵!

도로 바닥이 크게 흔들리며 진동했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웅웅거리며 날카롭게 울렸다.

마차는 조금 전까지 여자아이가 앉아있던 자리를 매서운 속도로 지나쳤다.

“괜찮아?”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

아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곳,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마차, 그리고 주변에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눈동자를 굴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아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이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꾸벅 인사를 올렸다.

“사, 아니! 엔리 군!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학생?”

뒤에서 로지에와 하인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지에의 얼굴이 특히나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 아이가…….”

나는 로지에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자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친 나는 딱 굳어버리고 말았다.

‘잠깐만.’

아까는 상황이 급박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이 여자아이를 다시 보니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얘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여자아이의 어깨 아래로 잘 익은 석류처럼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고 있었고, 녹색 눈동자는 메마른 겨울 태양을 반사하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왕국에서 보기 힘든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의 조합이었다.

데클란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아이.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 모든 걸 종합해 보자면…….

‘이 애,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별> 소설 여주처럼 생겼는데?’

그랬다.

내 앞에 선 여자아이……는 꼭 <가낮별>의 여자 주인공 그 자체였다. 표지 일러스트에서 본 그대로였다.

비록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여자 주인공의 이미지와 흡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설마, 여주인가?’

나는 그 생각을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마음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레사 공녀는 이 왕국에서 큰 권력을 쥔 이레사 공작의 외동딸이었다.

그런 이레사 공녀가 이렇게 허름한 차림을 한 채 길바닥에 앉아있을 리가.

게다가 이레사 공작가는 왕국의 수도에 자리 잡고 있다.

오스첸스 아카데미가 위치한 곳이 비록 수도와 가깝다고 해도, 엄연히 따지면 수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별다른 공무가 없는 한 이레사 공녀가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

‘그런데 너무 비슷하게 생겼잖아.’

혼란에 휩싸인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아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엔리 군? 왜 그래?”

굳어버린 나를 발견한 로지에가 곁에서 나를 쿡쿡 찔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너, 이름이 뭐니?”

“저, 저요? 유, 유리나에요.”

유리나.

이름이 유리나구나.

그 이름을 들은 나는 이 아이가 이레사 공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레사 공녀의 이름은 ‘달리아나드’였으니까.

로지에는 자신의 이름을 유리나라고 밝힌 여자아이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그렇구나. 유리나, 어디 다친 곳 없어?”

나처럼 얼어붙어 있던 유리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네에! 구해주신 덕분에…….”

그러면서 유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저러지?

그때 로지에가 다시 유리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도로에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다간 지나가는 마차에 치일 수 있어. 조심해야지.”

“그, 그게…….”

유리나는 계속해서 말을 더듬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저기에…….”

유리나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나와 로지에가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조금 전까지 유리나가 앉아있던 자리에 무언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바, 반지를 떨어뜨렸는데…… 하, 하필이면 길의 돌 사이에 끼어서…….”

유리나의 목소리가 점점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나는 유리나가 왜 도로 한복판에 앉아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 시내의 도로는 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도로였다. 그리고 유리나의 반지가 돌 틈에 끼어버린 모양이다.

“어차피 싸구려일 텐데, 그깟 반지 가지고 목숨을 건 거야? 나 참…….”

이 상황을 줄곧 방관하고 있던 하인이 뒤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인의 혼잣말을 들은 유리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유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와 봐.”

“네, 네에?”

“도와줄게.”

나는 유리나를 이끌고 그녀가 앉아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대로 자리에 쭈그려 앉은 나는 돌 틈에 낀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리나의 말대로 돌 사이에 꽉 끼어버린 반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참 재수 없게도 틈에 꽉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흐음, 손으로 빼내기 힘들 것 같은데…….”

내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엔리 군, 내가 마력으로 돌을 부숴버릴까?”

로지에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가 마차 바퀴가 빈틈에 걸리면 어떡해요.”

“아, 그렇군. 그러면 사고가 날 수도 있겠지.”

“그것도 있지만…… 만일 저 때문에 마차 바퀴가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데클란이 알게 되면 전 아마 절교당할 거예요.”

하는 수 없지.

이 방법을 쓸 수밖에.

혀를 찬 나는 그대로 코트를 벗어 던졌다.

“……?”

갑작스런 내 움직임에 유리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리나의 의문에 답을 주듯, 나는 곧장 허리춤에 차고 있던 BB탄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탕! 탕!

돌의 틈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금속 총탄은 반지를 누르고 있는 바위의 틈새를 정확히 명중했다. 총탄의 위력이 돌을 그대로 깎아내렸다.

몇 발을 그렇게 쏘고 난 뒤 나는 다시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틈 사이가 느슨해진 덕분에 손쉽게 반지를 꺼낼 수 있었다.

“자, 여기 있어.”

나는 유리나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

유리나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 얼굴과 내가 들고 있는 반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서 잡아. 이 반지, 너한테 소중한 거 아니야?”

그 말에 유리나는 허둥지둥 내 손에서 자신의 반지를 돌려받았다.

“고, 고마워요! 제, 제 손가락에 안 맞게 너무 커서, 그만…….”

“그래? 그럼 잃어버리지 않게 해야겠네.”

나는 조금 전 문구 상점에서 구매한 편지지 뭉치를 묶고 있던 가죽끈을 빼냈다. 그리고 그 가죽끈을 이용해 유리나의 반지를 목걸이처럼 만들어 주었다.

“반지가 손가락에 맞을 때까지 목에 걸고 다녀. 그럼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유리나는 자신의 목에 걸린 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유리나가 말을 더듬는 건 단순히 당황해서가 아니라 습관 같았다.

도로 코트를 챙겨 든 나는 유리나에게 또다시 당부했다.

“그리고 앞으로 도로 한복판에 서 있지 않도록 해. 그러다 다치면 내가 슬플 것 같으니까.”

한 번 죽어본 입장에서 예상치 않은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로지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엔리 군 말이 맞아.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 알겠지?”

로지에의 말에 유리나는 풀이 죽은 듯이 고개를 떨궜다.

“저, 저는 부모님이 없어요…….”

“아…….”

설마, 유리나는 고아인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찰나.

“대, 대신 저는 이모랑 둘이서 같이 살아요. 이모는 채, 채소 가게 사장님이에요!”

어두워지는 나와 로지에의 얼굴을 본 유리나가 다급히 덧붙였다.

채소 가게?

“이거 되게 뜬금없는 질문인데, 혹시 너희 가게에 옥수수 있니?”

유리나의 말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번에 데클란에게 옥수수 좀 가져다 달라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이곳 오스첸스 아카데미로 오고 난 뒤, 내 식단에는 옥수수가 사라지게 되었다.

매일 먹던 옥수수를 먹지 못하게 되자 왠지 모르게 옥수수가 그리워졌다.

마침 유리나의 이모가 채소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니, 옥수수를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유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가게에 이, 이모는 없어요.”

“어디 가셨는데?”

“이, 이웃 영지로 말린 채소 팔러 가셨어요. 일주일 뒤에 도, 돌아오신다고…….”

유리나의 말을 들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어떻게 어린아이를 혼자 두고 물건을 팔러 간 거지? 그것도 무려, 장장 일주일씩이나!

로지에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유리나에게 물었다.

“유리나, 아직 어린 것 같은데 혼자서 괜찮겠어? 무섭지 않아?”

“저, 저 어리지 않아요! 열한 살이에요! 그, 그러니까 혼자서도 집에 있을 수 있어요.”

아.

나랑 로지에랑 동갑이구나. 데클란이랑도 친구네.

체구가 작아서 나보다 더 어린 꼬마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레사 공녀도 데클란과 나이가 같다고 했는데…….’

유리나의 나이를 알게 되자, 그녀가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그 생각을 벅벅 지워버렸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이레사 공녀는 이레사 공작가에 있을 거라고!’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나는 나와 로지에에게 꾸벅 인사를 올렸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제 가 볼게요…….”

그렇게 말을 남긴 유리나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나갔다.

어째선지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추위 때문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지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갈까요, 도련님?”

“그래, 좋아.”

로지에는 우리의 호위를 맡은 하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하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하인은 유리나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관찰이라도 하듯이.

하인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로지에가 하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이봐. 나와 엔리 군은 이제 식사하러 떠날 건데.”

“……예, 도련님.”

로지에의 부름에 응답한 하인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하인은 마지막까지 유리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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