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마담 쟈니에트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의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로지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었어?”
“으음, 그게 말이죠…….”
로지에의 방으로 장소를 옮긴 나는 최대한 간략하게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대충 정리하자면, 마담 쟈니에트가 데클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는 내용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로지에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마담 쟈니에트라는 사람, 꽤 무례하네.”
“맞아요! 마음만 같으면 얼굴에다가 물 한 컵 부어주고 싶었다니까요!”
“고작 물 한 컵 가지고 되겠어? 펄펄 끓는 주전자 물을 가져다가 끼얹어야지.”
내 말에 로지에가 한술 더 떴다.
“아, 아뇨…… 그건 좀 심한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과격한 로지에의 발언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식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런가? 사샤 양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관둘게.”
그러면서 로지에는 나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선보였다.
조금 전 이 아이가 내게 했던 말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화사한 얼굴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로지에는 가끔 보다 보면 이렇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순진하게 생겼으면서, 어딘가 묘하게 광기가 서려 있다……랄까.
‘혈연은 못 속인다니까.’
다시 한번 로지에가 어느 어머니를 두고 있는지를 되새기며,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마담 쟈니에트가 제게 이상한 말을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데클란이 마력을 쓸 수 있다더라고요.”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로지에의 반응을 살폈다. 그도 나처럼 깜짝 놀라겠지, 싶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로지에는 침착했다.
그는 ‘뭐라고?’ 따위의 반문을 하지도, 두 눈을 크게 뜨며 당혹감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그렇구나.”
그렇게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게 다였다.
그 미지근한 반응에 도리어 내가 더 당황했다.
“뭐에요, 안 놀라세요?”
“내가 놀랐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로지에는 와앗! 소리를 작게 내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애먼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데클란은 평민이잖아요. 그런 걔가 마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세요?”
“데클란 군이라면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로지에가 느긋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이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내가 줄곧 말했잖아. 데클란 군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그래서 데클란 군은 왠지 마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니까, 그건 도대체 무슨 논리에요?”
로지에의 말을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데클란이 검에 능한 것과 마력을 가진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고?
“마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검을 잘 다룰 수가 없어.”
로지에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검술은 단지 체력과 기술이 좋다고 되는 게 아니야. 더 중요한 건 정신력이지.”
“정신력이요?”
“응. 검을 쥐고 휘두르며 베는 건 누구나 검술 교본을 보면서 익힐 수 있어. 하지만 검을 얼마나 강하게 쥐고, 어느 방향으로 휘두르며 얼마나 깊게 베는지는 전부 다 검을 쥔 사람의 몫이야.”
그 말을 하면서 로지에는 침대맡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사용하는 사람은 짧은 순간순간마다 초 단위로 선택지를 내려야 해. 그 모든 의사 결정 단계가 정신력을 깎아내리지.”
로지에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반들반들하게 잘 닦인 검의 날에 로지에의 두 눈동자가 그대로 반사되었다.
“마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정신력이 더 강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검을 더 잘 다룰 수 있어.”
“아하.”
그제야 나는 왜 대다수의 출중한 기사들이 귀족 출신인지 알 수 있었다.
로지에의 말을 따르면, 귀족들은 마력이 강한 자들이니 그에 비례해 정신력도 강할 것이다.
반면 마력이 없는 평민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평민 출신의 기사들은 귀족 출신들처럼 높은 경지까지 검을 다룰 수 없을 테다.
‘신분제가 왜 있는지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아…….’
이렇게 신분제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아니지, 그래도 반대로 생각하면 전쟁이 터지면 귀족들이 나라 지키러 나간다는 거잖아. 내 부모님과 같은 평민들은 전장에 나가서 죽을 일이 없잖아?’
생각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하자 마음이 훨씬 더 편해졌다.
그렇게 긍정 회로를 돌린 나는 로지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데클란 군은 어떻게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탁.
도로 검을 검집 안으로 밀어 넣은 로지에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로지에가 무엇을 궁금해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았다.
조금 전 마담 쟈니에트가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아마 데클란이 어떻게 마력 혈통을 이어받았는지 궁금했던 거겠지.
그러니까,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 데클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말 몰라요.”
내가 단번에 딱 잘라 말했다.
방금 전 마담 쟈니에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그리고 마담 쟈니에트와 다르게 로지에는 내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렇게 덧붙일 뿐이었다.
“그래도 데클란 군이 나와 사샤 양의 친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이 데클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달라붙는 건 정말 지긋지긋했다.
나는 데클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집착하거나 집요히 뒷조사할 생각은 없었다.
로지에의 말이 옳았다.
데클란이 누구의 피를 이어받았든지, 나와 로지에가 항상 그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기분이 나빠져서 어떡해, 사샤 양.”
“괜찮아요. 도련님이랑 이야기하고 나니까 나아졌어요.”
“안 되겠다. 우리 기분 전환하러 시내로 나가도록 하자.”
“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요. 저 이제 기분 별로 안 나쁜…….”
“가자. 내가 맛있는 밥 사 줄게.”
“좋아요, 가보자고요!”
공짜 밥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와 로지에는 그대로 외출 허가를 받고 마차를 대여했다.
참고로 아카데미는 방학 동안은 당일 외출 허가를 승인해 주었다.
아카데미에서 호위를 위해 붙여준 하인과 함께 나와 로지에는 시내로 나왔다.
마차에서 내리자 상쾌한 겨울의 향이 나를 덮쳐왔다.
그리고 시내의 거리를 바라본 나는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와아, 거리가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어요!”
시내는 몇 주 전과 비교해 면모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연말을 맞이해 상점들은 각기 알록달록한 장식을 달아두었다.
잣나무 가지들을 돌돌 말아서 붉은 리본으로 매어둔 곳이 있었고, 색감이 섞인 유리를 얇게 불어 만든 반투명한 오너먼트를 문가에 대롱대롱 달아둔 곳도 있었다.
몇몇 레스토랑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은은한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전체적으로 아늑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매일 아카데미 안에서 숙소와 연무장만 오가던 내게 이런 부드러운 정경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로지에의 질문에 나는 즉답했다.
두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여태껏 본 적 없는 황홀경이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
내 곁에 선 로지에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사실 아까 기분 전환 그런 건 전부 다 핑계야. 사실 그냥 여기로 데리고 오고 싶어서 그랬어.”
“왜요?”
“그야 사, 아니. 엔리 군은 귀엽잖아.”
하인의 시선을 의식한 로지에가 내 이름을 정정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엔리 군에게 귀여운 걸 보여주고 싶었어.”
“도련님…….”
나는 두 손을 꼭 모으며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사실 지난 몇 주 내내 아카데미 안에서 검술 연습만 하며 지내서 갑갑한 점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렇게 밖에 나와 바람을 쐬니 기분이 좋아졌다.
로지에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다니.
가슴이 감동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마음씨가 이렇게 고운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로지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뚝 천사가 아닐까?
“감사해요, 도련님. 평생 섬기도록 할게요.”
“하하, 왕국에서는 이미 20년 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됐어. 봉급 잘 챙겨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봉급은 도련님의 미소로 주세요. 도련님 미소만 보면 수프가 한 그릇 뚝딱 넘어가요.”
“수프만 먹을 거야? 고기로 먹여줄게.”
“와아, 도련님 최고!”
그렇게 나와 로지에는 하하호호 웃으며 서로 말장난을 주고받았다.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화살촉처럼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하인이 이상한 눈으로 나와 로지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하인의 눈에는 주종관계의 두 소년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감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던 나는 황급히 로지에로부터 떨어졌다.
“그, 그럼 아직 점심시간까지 시간이 있는데, 상점 구경하러 갈까요?”
나는 일부러 호호호, 웃음을 떨치며 로지에와 함께 상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상점들을 구경하던 나는 문구류를 취급하는 상점에서 편지지를 구매했다.
그간 나와 데클란은 로지에가 준 양피지 위에다가 편지를 적었었다.
그러나 최근 나는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그 양피지가 얼마나 비싼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고가의 물건을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다니…….’
더 이상 로지에의 값비싼 물건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종이로 만들어진 편지지를 몇 장 구매했다.
내가 편지지를 고르는 동안 로지에는 내 곁을 계속 맴돌았다.
“누구에게 편지 주려고?”
“데클란에게 편지 한 통 더 쓰려고요. 아, 그리고 부모님이랑 인페르나 남작님에게도 안부 인사 드리려고 생각 중이에요.”
그러자 로지에가 불쑥 물었다.
“나는?”
“네?”
“나한테는 편지 안 쓸 거야?”
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련님은 방학 내내 저와 같이 있으실 거잖아요?”
“그렇지.”
“편지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받고 싶어. 네가 주는 편지.”
“왜요?”
“받으면 기쁠 것 같으니까.”
“알았어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에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고작 편지 한 장으로 로지에의 미소를 볼 수 있다니. 싸다, 싸.
그렇게 나는 로지에를 위한 편지지까지 추가로 구매했다.
로지에는 자신이 대신 계산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계속 금전적으로 로지에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이제 슬슬 점심을 먹으러 갈까?”
상점에서 걸어 나온 로지에가 내게 제안했다.
슬슬 배가 고파지던 차였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른 동급생에게 들었는데, 이쪽 가로수 길로 들어가면 스테이크가 맛있는 집이 있대.”
“<플레디의 비스트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도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쪽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다들 줄을 선답니다.”
우리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하인이 끼어들었다.
“좋아, 가보도록 하자.”
그렇게 나와 로지에, 그리고 하인이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다그닥, 다그닥!
어디선가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지?’
본능적으로 시선이 소음이 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부가 계속해서 말을 채찍질하는 것이 보였다.
뭐가 저렇게 급하게 마차를 모는 걸까, 생각하던 그 찰나.
나는 한 여자아이가 길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아이는 내게 등을 향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정신이 팔려있는지 마차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면 여자아이가 마차에 치이게 될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불과 몇 초 사이로 마차 소리가 더더욱 가까워졌다.
두 번 다시 생각할 새도 없었다.
“위험해!”
나는 그대로 도로 위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