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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75)화 (75/177)

75화

“……네?”

사감의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데클란이 이미 아침에 떠났다니.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확인해 주세요.”

내 요청에 사감은 기숙사 출입 기록지를 꺼냈다.

“여기 보이니? 학생 이름, 데클란. 오늘 아침 8시에 마차 타러 나갔어.”

정말이었다. 사감이 가리키는 기록지에는 데클란의 이름과 외출 시간이 남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데클란 본인이 남긴 사인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데클란은 분명히 오후 3시에 마차가 온다고 그랬는데……!”

“오후 3시?”

내 말에 사감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네가 착각한 것 같은데. 외부 마차는 안전 규정상 아침에만 아카데미 내부로 들어올 수 있어.”

“네? 정말요?”

“그래. 그리고 누가 오후 3시에 마차를 출발시켜? 요즘은 겨울이라 오후 5시에 해가 지는데.”

“그, 그렇긴 하죠…….”

사감의 말에 나는 더더욱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떻게 된 거지?

데클란이 착각한 건가?

그렇지만 어떻게 아침 8시와 오후 3시 헷갈릴 수 있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목각처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보처럼 얼어붙은 나와 달리, 로지에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그는 일단 사감에게 감사의 말을 올린 뒤, 나를 이끌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사샤 양,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자.”

로지에는 벽난로 안에 나무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데클란 군이 어제 분명히 오후 3시에 마차가 온다고 했었어?”

“네. 틀림없어요. 마차가 오후에 온다고 해서, 마차가 꽤 늦게 온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점점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차가 늦게 온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예민한 게 아니었다.

아까 사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늦은 오후에 마차를 출발하는 건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고.

“혹시…… 데클란 군은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하러 나가는 게 싫었던 거 아닐까?”

불을 크게 키운 로지에가 제 목도리를 풀며 말했다.

“……어쩌면요.”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로지에의 말이 맞았다.

데클란은 우리에게 일부러 출발 시간을 틀리게 알려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왜?

‘당장 편지로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사샤 양?”

“데클란한테 편지 쓰려고요!”

“그렇지만 이 방에 따뜻하게 불 피워놨는데!”

로지에는 내가 자신의 방을 떠나는 게 아쉽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샤 양, 그냥 여기서 편지 써. 사샤 양 방은 춥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제 방에서 편지 쓸래요.”

로지에의 제안은 참 친절했지만, 솔직히 나는 내 방으로 가고 싶었다.

최근 로지에는 방학을 맞이해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로지에는 온갖 이유를 꺼내 들며 내가 그의 방에 있도록 붙잡아 두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계속 로지에의 방에 얹혀사는 기분으로 지내곤 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나는 로지에를 좋은 친구로 보고 있었으니까.

‘다만 로지에가 내게 너무 의존하게 될까 봐 걱정된단 말이야!’

로지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로지에는 점점 더 내게 달라붙었다.

아침에 두 눈을 뜨고, 밤에 두 눈을 감을 때까지.

나는 항상 로지에의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평생 로지에의 시종으로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로지에와 최소한의 거리를 두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지에가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다.

“편지 내용 안 볼게. 그러니까 내 방에 있어.”

“그게 그러니까, 도련님…….”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자 내 곤란한 표정을 목격한 로지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혹시 내가 보면 안 되는 내용을 쓰려는 거야?”

“네? 그게 무슨.”

“예를 들어서 사샤 양과 데클란 군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거나…….”

“네에에?”

로지에의 말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 순진한 도련님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전혀 아니니까 가만히 계세요! 제 방에서 편지지랑 펜만 가지고 올 테니까!”

“응, 알았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로지에는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어째선지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뭐지, 왠지 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데클란에게 보낼 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데클란, 왜 일부러 틀린 출발 시간을 알려준 거야?’

* * *

시간은 그날의 이른 아침으로 돌아간다.

데클란은 자신의 짐가방을 들고 마차가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애초에 이곳에 가지고 온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반 학기 동안 있으면서 늘어난 짐은 교과서 몇 권과 로지에가 준 진검 한 자루, 그리고 사샤가 준 마차 모형뿐.

‘마차는 어디에 있지?’

마차 정거장에 도착한 데클란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일전에 인페르나 남작에게 편지로 연락하여 마차를 한 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인페르나 남작은 이런 답장 편지를 보내왔다.

[오냐.]

그렇게 딱 두 글자가 적혀진 답장을 보며 데클란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답장이 너무나도 인페르나 남작다웠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뒤로 인페르나 남작가의 집사가 따로 데클란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카데미 방학 일정에 맞추어 마차를 보내줄 예정이니, 그때까지 짐 정리를 다 하고 기다리라는 편지였다.

그렇게 데클란은 인페르나 남작가의 집사와 일정을 조율했다.

최종적으로 결정한 출발 시간은 아침 9시였다.

그러나 데클란은 사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로지에와 사샤는 몰랐지만, 인페르나 남작을 비롯한 남작가의 사람들은 데클란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기로 한 사실을 알았다.

데클란을 데리러 온 마차의 마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데클란은 일부러 사샤와 로지에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과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가 마부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학생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퍼진 것 같단 말이지.’

다른 평민 학생들 사이로 데클란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진 것 같았다.

소문의 출처는 아마 교무실에 심부름을 하러 갔던 누군가겠지.

사샤나 로지에나 다른 평민 학생들과 친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랬다간 아마 데클란을 붙잡고 ‘왜 아카데미를 그만두겠다는 거야!’라며 난리를 피울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데클란은 사샤와 로지에가 다른 학생들로부터 그 소문을 접하지 않길 빌었다.

그래서 데클란은 사샤와 로지에의 작별 인사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데클란은 최대한 조용히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었다.

‘사람 많네.’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를 찾으며, 데클란이 생각했다.

마차 정거장은 방학을 맞이해 집으로 돌아가려는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을 데리러 온 마차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꽉 차서 복작복작한 것이 마치 시장통 같았다.

데클란이 혼잡한 인파를 헤치며 인페르나 남작가의 마차를 찾고 있던 때였다.

“데클란 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데클란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데클란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인페르나 남작가의 사용인이려나?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데클란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지금 이 순간 데클란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선생님……?”

바로 검술 교사였다.

“다행이네, 데클란 군. 떠나기 전에 찾을 수 있어서.”

검술 교사는 데클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데클란은 그 자리에 오도카니 굳어버렸다.

설마 이곳에 검술 교사가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 날 찾아온 거지?’

데클란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날 검술 교사가 데클란의 검술 실력에 혹평을 남긴 이후, 데클란은 줄곧 검술 교사를 피해왔다.

수업 시간 때마다 데클란은 일부러 검술 교사와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무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방과 후에 검술 교사를 찾아가 모르는 동작에 관해 물어보거나 추가 교습을 받는 것도 그만두었다.

데클란은 어떻게 해서든 검술 교사와 거리를 두며 피하려고 했다.

사샤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데클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샤가 데클란에게 왜 검술 교사를 피하냐는 질문을 하려고 할 때마다 데클란은 교묘히 화제를 바꾸며 말문을 돌리곤 했다.

그렇게 남은 학기 동안 검술 교사를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왜 여기 마차 정거장에 나타난 것일까.

“어? 저기, 검술 선생님이잖아?”

“여긴 왜 오신 거지?”

마차 정거장에 모여 있던 다른 학생들이 검술 교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검술 교사를 마주 보고 있는 데클란에게도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데클란 군, 교무실에서 전해 들었다.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맞나?”

데클란 앞에 선 검술 교사가 그렇게 운을 뗐다.

“…….”

데클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검술 교사를 노려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검술 교사는 그런 데클란을 향해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머리를 좀 식히고, 앞으로 진로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다. 넌 글을 읽고 쓸 줄 아니 대서소에서 일해도 괜찮…….”

“선생님.”

데클란의 목소리가 검술 교사의 말을 싹뚝 잘랐다.

“선생님은 제 진로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하실 자격이 없으실 텐데요.”

“……뭐라고?”

날카로운 데클란의 대꾸에 검술 교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겠죠. 학생을 올바른 마음으로 지도하는 좋은 교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시겠죠. 하지만.”

데클란이 검술 교사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맞서 싸우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선생님은 제가 만난 어른 중에 가장 쓰레기 같은 어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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