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왜 그러지? 돌아올 때 짐이 너무 많을까 봐서 그런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하던 데클란을 보며,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쩌면 내가 데클란에게 괜한 심부름을 시켜서 부담감을 안겨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 손을 휘휘 내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옥수수는 지겨워. 그냥 안 먹을래.”
“……미안해.”
“음? 미안하다니, 뭐가 미안해. 됐어, 걱정하지 마!”
나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데클란을 달랬다.
어머니를 보러 집으로 돌아가는 데클란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는 이제 기숙사로 갈게. 집으로 돌아갈 짐 싸러 가야 해서.”
“응, 알았어!”
데클란의 말에 나는 다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언제 인페르나 영지로 출발한다고 했지?”
“내일 오후…… 3시쯤에 마차가 온다고 했어.”
“그래?”
데클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오후 3시라니.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 시기였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출발하면 얼마 가지도 못해 날이 어두워질 테다.
그러면 꼼짝없이 말을 멈춰야 할 텐데.
‘뭐, 남작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 시각에 마차를 보내신 거겠지.’
인페르나 남작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전적으로 높았다. 그렇기에 나는 데클란에게 내 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
“알겠어. 그럼 그때 기숙사에서 만나자. 짐 옮기는 거 도와줄게!”
내 말에 데클란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야. 안 와도 괜찮은데.”
“아니야. 그래도 내년까지 못 보는 건데, 작별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로지에 도련님이랑도 같이 올게!”
“정말 안 와도 괜찮은데…… 근데 이렇게 말해도 너는 올 거지?”
“당연하지!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잖아!”
내 활기찬 대답에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후 2시에 와. 그전까지 난 아마 계속 짐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일찍 오면 안 돼. 알겠지?”
“알았어!”
“좋아.”
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
반면 데클란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내 두 눈동자를 주시하던 데클란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마로부터 시작해서 코, 그리고 콧잔등으로 미끄럼틀 타듯 내려온 시선은 볼과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치 내 얼굴에 모든 흔적을 하나하나 관찰이라도 하는 듯한 깊은 시선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사샤.”
데클란의 목소리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움찔거렸다.
데클란이 외부에서 내 원래 이름을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데클란, 그 이름으로 부르면……!”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다른 누군가가 나와 데클란의 대화를 들었을까 걱정이 돼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데클란은 무덤덤했다.
“사샤 너는…… 정말로 내가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데클란의 질문에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곧장 대답을 내뱉었다.
이건 내가 단순히 미래를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의 데클란은 이미 대단한 검술 실력자였다.
거기다가 그는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체력 단련과 검술 훈련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승마 따위의 관련 기술을 배웠다.
데클란이 지금 이대로 계속 올곧게 성장한다면, 그는 분명히 이 왕국 제일의 기사가 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띤 얼굴로 데클란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런 반문이 되돌아왔다.
“만약에 내가 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만약에 내가 커서 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서 그냥 평범한 농부로 살아간다면?”
“으음…….”
데클란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만일 데클란이 기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내가 알던 원작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이 아닌, 다른 어떠한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농부가 된 데클란이라…….’
침묵을 삼킨 나는 두 눈을 감고 잠시 상상의 나래에 잠겼다.
빛나는 전신 갑주와 마력이 담긴 검을 들고 이레사 공녀를 지켜내는 기사 데클란이 아니라.
어느 한적한 시골 농촌에서 텃밭을 가꾸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소박한 삶을 사는 데클란이라.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
나는 검 대신 호미를 들고 서 있는 데클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릴 수 없었다.
“내가 나중에 커서 기사가 아니게 되면…… 실망할 거야?”
곰곰이 생각에 잠긴 탓에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던 나를 향해 데클란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실망한다니, 그럴 리가!”
“그렇지만 사샤 넌 항상 내가 기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 그럼 만약에 내가 기사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말을 하는 데클란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데클란의 기분이 가라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러지?’
데클란은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다.
내가 데클란에게 ‘넌 커서 아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할 때마다, 데클란은 아무런 말 없이 내 말을 귀담아들었다.
물론 데클란은 간혹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불안감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종이 인형이겠지.
데클란은 그 모든 불안감을 이겨내고 장차 왕국 제일의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그의 성장을 멀리서 지켜보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렇지만.
‘데클란 본인은 과연 기사가 되고 싶었던 걸까?’
원작 소설에 따르면, 데클란은 어렸을 때부터 기사와 검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동화책에 나오는 용감한 기사를 동경했다.
아마 데클란은 동화 속 기사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을 테다.
못된 용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공주님을 구하고, 모두의 환영과 칭송을 받으며 왕국으로 귀환하는 기사.
어린 시절의 데클란은 그런 기사를 동경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제 데클란은 동화 속 기사를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게 된 걸까?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내가 데클란에게 마차 모형을 선물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마차 모형을 선물 받은 데클란이 마차 가게 주인이 되면 좋겠다고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데클란이 원작 소설의 흐름을 파괴하는 게 두려워서 그러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는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만일 데클란이 마차 가게 주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왜 대답이 없어?”
데클란의 이어지는 질문이 내 생각의 회로를 뚝 끊어버렸다.
“데클란, 나는…….”
줄곧 지키고 있던 침묵을 깨트린 나는 데클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잘 모르겠다.
원작 소설 속의 데클란이 왜 기사가 되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후에 기사가 된 데클란이 과연 행복했는지.
지금의 나로선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나는 데클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입가에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이 내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나중에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데클란.
오로지 데클란만 행복하면 됐다.
“데클란 네가 커서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좋겠어.”
“…….”
“만약 데클란 네가 기사가 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난 그걸로도 좋아!”
진심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다 보니 내가 데클란이 기사가 되길 바랐던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데클란이 기사가 되었을 때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가 기사가 되어야지만 훗날 사랑하게 될 이레사 공녀를 만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해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기사가 되는 것 외에도 데클란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했다.
어쨌거나 내가 바란 건 데클란의 행복이었으니까.
“…….”
데클란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잠시 뒤, 데클란이 침묵을 깨며 내게 또다시 물었다.
“어?”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난데없이 갑자기 책임을 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대답해 줘, 사샤. 만일 내가 기사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넌 날 떠나지 않을 거야?”
“그걸 질문이라고 해?”
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당연하지. 네가 뭐가 되든 넌 항상 데클란이잖아. 내 가장 소중한 친구 데클란…… 어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클란이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어왔다. 그대로 데클란에게 붙들린 나는 꼼짝없이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저기, 데클란! 이러다가 누가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려….”
“고마워.”
데클란의 낮은 목소리가 내 말 너머로 들려왔다.
“잘 있어. 보고 싶을 거야.”
“데클란 너 정말…….”
잠시 멍하니 굳어 있던 나는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손을 들어 올린 나는 데클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차피 방학 끝나면 또 볼 건데 왜 이렇게 거창하게 작별 인사를 해? 누가 보면 몇 년 동안 이별하는 줄 알겠다.”
“……그러게.”
내 목덜미에 머리를 숙인 데클란이 중얼거렸다.
차디찬 겨울바람을 뚫고 데클란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한동안 데클란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 * *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함께 마친 나와 로지에는 오후 2시쯤 데클란의 기숙사로 향했다.
로지에를 본 기숙사의 사감이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어느 학생을 만나러 왔죠?”
“데클란 군이요.”
“데클란 군?”
사감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학생은 오늘 아침에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고 떠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