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의 일이었지.”
창백히 얼어붙은 사제의 얼굴을 살피며, 인페르나 남작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인페르나 영지에 웬 수상한 인물이 나타났어. 이레사 공녀를 찾으러 왔다고 하더군.”
“……!”
‘이레사 공녀’라는 말을 들은 사제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상자 안의 내용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사제를 빤히 주시하며, 남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일단 그 수상한 자를 영지 밖으로 내쫓았어. 그리고 그자가 찾고 있던 여자아이를 잡아들여서 조사해봤지. 그랬더니 그 계집이 내게 뭘 내밀었는지 아느냐?”
거기까지 말한 남작은 일부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 당시의 일을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이 말이다.
“바로 그 상자 안에 든 브로치다.”
“…….”
인페르나 남작의 말을 들으며, 사제는 두 눈동자를 상자 안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남작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자 안에는 이레사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가 놓여있었다.
사제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의 브로치를 들어 올렸다.
디자인과 부속 장식을 보아하니 여아를 위해 만들어진 브로치 같았다.
‘이 브로치는…… 틀림없다! 이레사 공녀님의 첫 번째 대역이 가지고 있던 브로치일 거야!’
그 생각에 사제는 급히 남작에게 따지듯 물었다.
“나, 남작님! 이 브로치를 준 이레사 공, 아니. 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아이?”
남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하디귀한 이레사 공녀님을 사칭하기에, 법에 따라 다스렸다.”
남작의 말에 사제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예? 그게, 버, 법에 따라 다스렸다 하심은…….”
“사형.”
인페르나 남작이 안색 한 번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귀족을 사칭하는 자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사형. 이 국법에 대해서는 사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쾅!
사제는 그대로 브로치 상자가 놓인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데없는 소란에도 인페르나 남작은 아무런 동요 없이 사제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나, 남작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사제는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 그러실 수 없습니다, 남작님! 그 아이가 바로 이레사 공녀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 없는 겁니까!”
“해본 적 없는데.”
팔짱을 낀 남작이 바로 대꾸했다.
“내가 다 조사를 해보았다. 그 아이는 분명히 인페르나 영지에서 난 아이였다.”
“그렇지만!”
“어찌 수도에 머무르는 이레사 공작의 영애가 될 수 있겠는가? 고작 브로치 하나를 지녔다고 평민이 귀족이 되더냐?”
“그, 그것은……!”
잠시 막힌 말문을 찾던 사제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입을 잘못 놀렸다간 큰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페르나 남작에게 이레사 공작이 평민 여아를 데려다가 자신의 딸 노릇을 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큰일 났군. 예전에 이레사 공녀님의 대역을 했던 그 평민 계집이 죽어버린 모양이야.’
사제는 당장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거 야단났다.
이대로 빈손으로 이레사 공작가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엄하게 벌해질 것이다.
사제는 제 답답함을 호소하며 남작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남작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린아이를 죽였다니! 영지 주민들의 반발이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영지 주민들의 반발은 무슨. 이레사 공작의 엄벌이 무서운 거겠지.
속으로 이죽거린 인페르나 남작은 차분하게 답했다.
“물론 영지민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해 수를 썼지.”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뭐라도 정보를 건져야겠다는 마음에 사제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비록 그의 건방진 태도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페르나 남작은 일단 그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 아들이 자네들의 딸을 마음에 들어 해서 하녀로 삼고 싶다. 돈은 충분히 주겠다.’ 그랬더니 그 부모라는 작자들은 옳거니, 하고 내게 제 딸을 넘기더군.”
남작은 정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난 뒤에 그 괘씸한 평민 계집에게서 이 브로치를 압수하고, 그대로 목을 베었다.”
“어찌 그런 무식한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참다못한 사제가 제 주제도 잊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에 남작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사제를 노려보았다.
“지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거지?”
아차.
사제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허둥지둥 굽신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남작님. 다만 어린아이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시는 것에 유감을 느끼어서 그만…….”
어린아이를 함부로 대하는 것에 유감을 느껴?
사제의 말에 인페르나 남작은 박장대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린아이를 납치해 제 부모와 생이별하게 만든 놈이 저런 헛소리를 해대다니.
“내 영지 안에서 내가 뭘 하든 그건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
“그렇지만 남작님, 어린아이를 함부로 대하시면 신께서 노하십…… 헉!”
남작에게 군말을 잔뜩 늘어놓던 사제는 그대로 숨을 삼키고 말았다.
어느새 남작이 제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검을 뽑아 사제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어찌나 신속히 일어난 일인지 사제는 남작이 검을 뽑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내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내가 꼴리는 대로 하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지?”
“그, 그것이…….”
“그리고 언제부터 신전에서 국가법에 관섭하기 시작했나? 귀족 사칭은 사형으로 다스려야 하는 중한 범죄다. 나는 법대로 처리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지?”
“아, 아닙니다. 남작님의 말씀이 지당하게 옳습니다.”
사제는 후들후들 떨며 제 목을 향하고 있는 검 날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 정말로 베어버릴 기세야.’
사제는 인페르나 남작이 만일 필요하다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았으면 내 영지에서 썩 꺼져주시길.”
남작은 사제를 향해 그런 거친 축객령을 내렸다.
“예, 예에. 어서 꺼지겠습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제는 그대로 응접실의 문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잠깐.”
남작이 줄행랑치듯 현장을 벗어나려던 사제를 불러 세웠다.
—툭.
사제의 발아래 무언가가 던져졌다.
이레사 공작가의 브로치가 달린 바로 그 상자였다.
“이레사 공작더러 제 쓰레기 좀 남의 영지에 투기하지 말라고 전해라.”
“……예.”
그 명백한 도발에 사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인페르나 남작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남작이 내던진 브로치 상자를 주워 든 사제는 그대로 인페르나 남작가를 탈출했다.
응접실의 창문가에 서서 사제의 뒷모습을 쫓던 인페르나 남작은 혀를 찼다.
“위아래도 모르는 버러지 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기어오르고 지랄이야.”
남작은 그대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불순한 놈 하나를 영지에서 쫓아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이 기세로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지.’
인페르나 남작은 겨울이 되면 항상 분주해졌다.
식량이 떨어지고 땔감 부족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영지민들이 남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들의 요청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곤 했다.
그렇게 업무를 생각하며 집무실에 들어선 인페르나 남작은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로지에인가?’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로지에로부터 편지가 올 때가 됐다.
로지에가 재학 중인 아카데미는 두 주에 한 번씩 학생들의 편지를 모아 하인을 시켜 전달하곤 했다.
‘우리 아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려나?’
인페르나 남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편지 겉봉투에 적힌 발송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인페르나 남작의 미소는 곧 잔뜩 찌푸려진 인상으로 바뀌었다.
‘이 자식이 왜 나한테 편지를 써?’
남작의 기대와 달리, 그것은 로지에로부터 온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의 발송인은 바로 데클란이었다.
* *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야호!”
방학이 선포되기가 무섭게 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데클란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좋아.”
“방학 최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숙제도 없고! 공부할 이유도 없고! 헤헤, 하루 종일 놀고먹고 자기만 해야지!”
신이 난 나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나는 이내 퍼뜩 든 생각에 멈춰 섰다.
“아, 맞다. 데클란 너 이번 방학에 집에 가?”
“어.”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의 대부분 학생은 방학을 맞이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학생들도 몇몇 있었다.
겨울이 되면 마차가 오고 가기 어려운 영지에 사는 학생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혹은 로지에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는 학생들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다.
‘인페르나 영지의 토질이 몸에 맞지 않는다더니, 정말 겨울에도 돌아가지 않는구나.’
아무런 미련 없이 아카데미에 남은 로지에를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로지에의 시종 신분으로 그와 함께 아카데미에 남았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부모님은 편지로 최근 누군가가 나를 찾으러 인페르나 영지까지 왔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다.
부모님은 편지에 당분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방학 동안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말끔히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가서 너희 엄마 안부 전해드리고, 우리 엄마 아빠한테도 인사드리고, 또 남작님한테도 잘 지내고 계시는지 대신 물어봐 줘!”
“알았어.”
“아 참, 그리고 인페르나 영지에서 돌아올 때 옥수수 좀 가져다줘!”
“……옥수수?”
“응. 우리 엄마 아빠가 기른 옥수수가 갑자기 생각나서.”
나는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볼을 긁적거렸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옥수수를 하도 많이 먹어서 지겹다고 투덜거리던 나였다.
그러나 반년 동안 집을 나와 외지 생활을 하다 보니, 고향 음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방학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올 때 말린 옥수수 좀 가져다줄 수 있지? 응?”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데클란을 보챘다.
나는 당연히 데클란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옥수수 몇 개를 가방에 넣어 가져오는 건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으니까.
“…….”
그러나 어째선지 데클란은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