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왕국 변방 중의 변방에 자리 잡은 인페르나 남작령.
관광지로 방문하기엔 턱도 없는 황무지에,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통과 지점도 아니고, 또한 정치적으로 힘없는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
그런 인페르나 남작령에 사는 인페르나 남작은 손님을 잘 맞이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페르나 영지로 찾아오는 귀빈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페르나 남작가의 저택은 간만에 손님맞이에 바빠지고 있었다.
하녀들은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 광택을 잃은 찻잔을 반짝반짝하게 닦고 있었고, 주방에서는 겨우내 눅눅해진 차를 새로이 볶는 향내가 가득했다.
집무실 안에서 인페르나 남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한 갈래로 꽉 묶어진 짙은 남색 머리카락. 단정하게 채워진 셔츠 버튼.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린 검 한 자루.
“…….”
인페르나 남작은 아무런 말 없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검의 손잡이 위에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남작님.”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뒤편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제가 응접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낸 인페르나 남작은 피식 웃었다.
“지금 당장 내려가도록 하지. 그 개새끼 얼굴 좀 보자고.”
툭, 툭.
인페르나 남작의 손가락이 가볍게 검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 * *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이레사 공작이 데리고 온 두 번째 평민 여아가 죽었다.
공작이 데리고 온 여아는 공녀 노릇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특히나 식사 예절이 형편이 없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아이를 본 공작은 화가 났다.
“어찌 이렇게 간단한 것도 해내지 못하는 거야!”
분노로 이성을 잃은 공작은 홧김에 아이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공작의 일격에 얻어맞은 아이는 그대로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누구도 손을 쓸 새가 없었다.
덕분에 이레사 공작가는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어렵게 찾아온 가짜 이레사 공녀가 죽어버렸다.
“내 딸, 내 딸이 어디 간 거냐! 어서 내 딸을 데려와!”
제 딸을 대신할 존재가 사라지자 이레사 공작은 또다시 광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레사 공작의 최측근들은 하는 수 없이 이레사 공녀의 대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가장 처음으로 데리고 왔던 그 여자아이를 다시 찾아야 해. 그 아이라면 공작님의 마음에 들 게다.”
진짜 이레사 공녀가 실종된 뒤, 인페르나 영지라는 작은 촌 동네에서 데려온 그 아이.
두 번째로 데리고 온 평민 아이와 달리, 이레사 공녀의 첫 대역은 머리가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관습이나 언어, 혹은 예절을 제법 잘 터득했다.
이제 와서 새로운 평민 아이를 납치해와 교육하느니 그 아이를 도로 공녀 대역으로 세우는 게 더 나을 법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첫 번째 대역의 행방이었다.
그 아이의 친부모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마 이레사 공작가의 기사들로 구성된 호위를 뚫고 그 아이를 도로 데리고 갈 줄이야.
그 뒤로 이레사 공작가의 사람들은 아이의 행방을 뒤쫓았다.
그러나 그 아이의 친부모는 쥐새끼처럼 그들의 포위망을 번번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사라진 곳은 인페르나 영지였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아직도 인페르나 영지에 숨어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레사 공작의 최측근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레사 공작가의 기사들 중 가장 실력이 좋은 이를 인페르나 남작령으로 보냈다.
“가서 이레사 공녀님의 첫 번째 대역을 잡아 와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공녀님을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는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출발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났건만, 그 기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몇 주가 지나자 다른 귀족들은 이레사 공녀가 왜 얼굴을 내보이지 않나 슬슬 참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다른 귀족들에게 이레사 공녀가 없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 판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누가 가서 내 딸을 데리고 와라! 이레사 공녀를 불러오란 말이다!”
이레사 공작이 악을 쓰며 미쳐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무작정 던져대거나, 무고한 사용인들을 붙들고 채찍질을 해댔다.
참다못한 공작의 최측근들은 이번에 기사가 아닌 사제를 불렀다.
바로 몇 년 전, 인페르나 영지에서 진짜 이레사 공녀를 쏙 빼닮은 평민 여자아이를 납치해왔던 그 사제였다.
공작의 최측근들은 사제에게 단단히 일렀다.
“인페르나 영지로 가서 이레사 공녀 대역하던 계집년을 되찾아 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렇게 사제는 오로지 이레사 공녀의 대역을 되찾기 위해 수도에서 이곳 인페르나 영지로 왔다.
‘나 참, 벌레보다 못한 목숨이 다닥다닥 붙어서 잘도 사는군.’
인페르나 영지에 도착한 사제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사제의 기억 속의 인페르나 영지는 지금이나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하고,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는 평민들이 죽지 못해 모여 사는 빈민굴.
‘어서 그 계집이나 찾아서 이레사 공작가로 돌아가자.’
그렇게 음험한 속내를 숨긴 사제는 신성력을 단련하러 온 사제인 척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수련하면서 만난 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던 중 사제는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보낸 사람을 맞이했다.
영지에 사제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인페르나 남작이 그를 저택으로 초대한 것이다.
‘힘도 없는 하급 귀족 주제에, 귀찮게 하긴.’
사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사제는 이 영지에 방문한 객이었다.
게다가 제아무리 정치적인 힘이 없다고 해도, 인페르나 남작은 일단 귀족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제는 인페르나 남작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죽은 제 남편 대신에 남작 자리를 꿰찬 여자라지.’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간 사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접실만 보자면 일단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수도와는 다른 특유의 절제감과 우아함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뭐, 여자 혼자 영지를 다스리는 것치고 제법이네.’
그렇게 혼자 속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제복 차림을 한 누군가가 거침없이 응접실의 중앙을 향해 걸어왔다.
광택이 나도록 닦아진 대리석 바닥 위로 걸음 소리가 굽이치며 울렸다.
사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인페르나 남작님.”
생각보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사제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흠.”
인페르나 남작은 별다른 말 없이 그를 향해 인사치레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그대로 사제의 맞은편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이 인페르나 영지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번지르르한 문안이나 안부도 없이 남작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작의 존재감에 멍하니 굳어 있던 사제는 급히 자리에 앉았다.
“아, 그게, 다름이 아니라 신성력을 수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순방하던 참입니다.”
“그래?”
남작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사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성력을 단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이는 남작이 파수꾼에게서 전해 들은 바와 같았다.
인페르나 남작은 지체 없이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어느 가문의 후원을 받는 사제지?”
“이레사 공작가입니다.”
사제의 답을 들은 남작은 속으로 이를 아드득 갈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나.
이레사 공작은 자신의 행적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야, 국왕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거머쥔 이레사 공작이었다.
그리고 국왕은 그가 무슨 짓을 하든지 자기 뜻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암묵적으로 승인할 것이다.
그러니 이레사 공작이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을 테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레사 공작은 자신의 후원을 받는 사제들을 전국 각지로 보냈을 테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성력 수련.
그러나 진짜 이유는 자신의 딸과 비슷한 외모와 나이를 가진 평민 아이를 찾는 것일 테지.
예컨대, 사샤라던가.
“그래서, 신성력은 잘 쌓여가나?”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인페르나 남작이 태평한 얼굴로 사제에게 물었다.
“예, 순탄한 여정이었습니다. 특히 인페르나 영지에서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사제의 대답에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 참으로 갸륵하구나. 국왕 폐하조차 살펴보지 않는 이 변방의 영지까지 내려오다니.”
“남작님, 그건…….”
명백히 비꼬는 어투의 말에 사제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굳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제는 다시금 웃음기를 머금으며 남작에게 회답했다.
“……국왕 폐하께서 하시는 거사와 저희 신전의 사제들이 하는 일이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뭐가 다르지?”
딸깍.
하녀가 남작과 사제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그 뒤를 따른 집사가 입을 꾹 다문 채 두 찻잔을 채웠다.
향긋한 찻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남작은 그 찻잔에 눈길조차 한 번 주지 않았다.
반면 사제는 유유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남작님, 국왕 폐하께서는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십니다.”
사제는 차향을 음미하듯 꽤 능숙하게 찻잔을 제 입가로 기울었다. 그는 귀족과의 티타임이 제법 익숙한 듯했다.
“그러나 저희 사제들은 그저 백성들의 고통과 수난을 대신 신께 고하기 위해 다닐 뿐입니다.”
사제의 말에 남작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심히 불경하군.”
“예?”
“그대의 말은 즉, 신께서 백성들의 고통과 수난을 듣지 못해 그대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 아닌가? 지금 신이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남작의 지적에 사제는 급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 아닙니다, 남작님! 그건 억측입니다! 신의 사도가 된 처지에서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겠습니까!”
“억측? 그럼 내가 그대의 말을 오해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는 단순히 신에게 백성들을 다시 한번 돌이켜 봐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전국을 순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좋은 일을 하고 있었군. 참 대견하구나.”
사제의 말에 줄곧 꼬투리를 잡던 남작은 여기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마음만 같으면 사제의 말에 또다시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사제가 씩씩대며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몰랐다.
물론 사제가 이 자리는 뜨는 건 인페르나 남작도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아직 사제에게 보여줄 것이 남았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변방의 영지까지 찾아와 좋은 일을 하는 그대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특히나 그대가 그 누구도 아닌 이레사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인물이니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남작과 차 테이블을 두고 앉은 사제가 히죽 웃었다.
이에 인페르나 남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 칭찬만 날름 챙겨 먹네. 버르장머리 없는 후레자식.’
남작은 이 영지가 별 볼 일 없다고 말하는 자신의 말에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는 사제가 거슬렸다.
보통 그런 말을 하거든 듣는 처지에서 ‘별 볼 일 없는 영지라니, 그렇지 않습니다!’ 따위의 빈말이라도 하는 게 정석인데.
자신의 영지에서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을 파수꾼에게 전해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호감을 더해 혐오감까지 생겨났다.
‘이런 해충 따윈 어서 쫓아내 버려야지, 원.’
그렇게 생각한 인페르나 남작은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향해 손짓했다.
“집사, 가서 그걸 가져오게나.”
입술을 꾹 다문 채 꾸벅 인사를 올린 집사는 잠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여기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집사는 인페르나 남작과 사제 사이에 나무 상자를 하나 내려놓았다.
손바닥만큼의 크기의 작은 나무 상자였다. 외부에 옻칠한 것이 귀중품을 담는 보물 함처럼 보였다.
상자를 본 사제의 입가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하하, 이런 것을 준비하실 필요는 없는데…….”
비록 입술은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득거리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자식.
“아니, 그대가 가져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지금 당장 열어 확인해 보지 그러나.”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낀 인페르나 남작이 고했다.
“감사합니다. 신께서 인페르나 영지를 축복하실 겁니다.”
그런 영혼 없는 축복을 내린 사제는 품위도 뭐고 할 것 없이 허겁지겁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잠시 뒤.
“……!”
상자 안의 내용물을 대면한 그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