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데클란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데클란은 새하얀 눈밭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데클란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위로부터 눈이 펑펑 내리쳤다.
차가운 눈 조각이 데클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얼굴에 닿아 녹은 눈이 순식간에 온도를 앗아갔다.
‘추워.’
이가 절로 딱딱 떨려왔다.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듯 웅크린 데클란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 때마다 살을 베는 듯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데클란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앞으로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
‘어서 이 눈을 피할 곳을 찾아야…….’
데클란은 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거센 바람이 웅웅 소리를 내며 두 뺨을 날카롭게 할퀴며 지나갔다.
몸은 추위로 점점 무거워져 갔다.
그렇지만 데클란은 정처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추위에 얼어 죽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눈이 그칠 때까지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데클란은 고개를 들어 눈을 돌렸다.
하늘이 온통 까마귀의 깃털로 뒤덮인 것 같았다.
새까만 하늘 아래 보이는 건 망망한 눈밭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도, 방향을 알리는 길가도, 하다못해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마찬가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 위에 난 발자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차게 내린 눈이 발자국의 흔적을 금방 채워버린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데클란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쿵 가라앉았다.
마침내 데클란은 멈춰 섰다.
‘더 이상 걸어가는 건 무리야…….’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추위로 인해 두 다리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머리 위에서 내리는 눈도 하나의 환상처럼 느껴졌다.
털썩.
데클란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그만하자.’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굳이 힘들게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냥 이대로 얼어 죽어버리자.
계속해서 정처 없이 걸으며 고생하다가 비참하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지금 깔끔하게 죽어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시체는 똑같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데클란은 그대로 눈밭 위에 누웠다.
하늘을 향한 얼굴 위로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이제는 춥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데클란은 두 눈을 반쯤 뜬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을 캔버스 삼아 펼쳐진 별들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별빛이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별들이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뛰어내릴 것만 같이 빛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 본 별이 이렇게나 밝고 아름답구나…….’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데클란은 잠시 멍하니 별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아이와 함께 보고 싶었다.
사샤.
어째서 그 아이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아이와 함께 이 별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의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샤.
날 잊지 마, 사샤.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데클란은 두 팔을 뻗어 사샤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적처럼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뭐지?’
데클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이 마른 땅 한복판에서 이런 온기가 느껴지다니.
이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상황의 이질감을 느낀 데클란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이의 얼굴이 눈앞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야, 데클란 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로지에였다.
“아아악!”
데클란은 우렁찬 비명을 내질렀다.
“도련님 돌으셨어요? 왜 여기 계세요?”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따지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로지에가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내 방이야.”
“네……?”
그 말에 데클란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데클란은 자신이 넓은 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평민 학생들과 같이 지내는 비좁은 기숙사 숙소가 아닌, 귀족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쾌적한 공간이었다.
당황한 데클란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와 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에 반해 로지에는 침착했다.
“몸은 괜찮아?”
로지에가 여전히 이불 안에 누운 채로 물었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어제 사샤 양이 데클란 군을 여기로 데리고 왔어. 기억 안 나?”
사샤가 날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깨진 유리 파편처럼 부분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수업 이후 연무장에서 사샤와 함께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사샤와 눈싸움을 하다가, 검술 선생님이 찾아와서…….’
사샤와 데클란은 검술 교사를 도와 연무장의 눈을 치웠다.
그러자 검술 교사는 두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샤는 시종으로서 로지에의 저녁 식사를 도와야 했기 때문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만 데리고 시내의 레스토랑으로 갔었어.’
그리고…… 검술 교사는 데클란이 자신이 담당한 학생 중 가장 형편없는 학생이라고 말했다.
그 뒤의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검술 교사와 헤어진 뒤 데클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작정 눈보라를 헤매며 걸었던 것 같다.
그런 자신을 사샤가 발견하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건가.
“사샤는 어디 있어요?”
문득 이 방에 사샤가 없다는 걸 발견한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물었다.
“사샤 양은 아침 식사를 가지러 식당으로 갔어.”
“날씨도 추운데 왜 사샤한테 그런 걸 시켰어요?”
데클란은 날카로운 어투로 로지에에게 따졌다.
어제 직접 겪었던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밤새 내내 꿨던 지독한 겨울의 악몽 탓인지, 데클란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 사샤를 보고 싶었다.
데클란의 항의에 로지에는 하하, 웃음을 흘렸다.
“내가 대신 가려고 했었어. 그런데 데클란 군이 날 꽉 안고 놓아주질 않아서…….”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로지에의 말을 들은 데클란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직도 잠옷 차림의 로지에가 침대 안에 비스듬히 누운 채 데클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아침 공기가 차가워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
로지에의 질문에 데클란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대가 로지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검술 교사에게 들었던 악평을.
데클란은 조금이나마 자신의 검술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줄곧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며 살던 데클란에게 있어 그것은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검술 훈련을 하며 사샤와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샤는 늘 자신의 검술 실력을 칭찬하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검술을 연습하면서 사샤와 함께 멋진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검술 교사는 그 모든 것을 깨트려버리려고 했다.
이런 데클란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로지에는 자신의 걱정을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큰일 날 뻔했어, 데클란 군. 사샤 양이 찾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폐가 얼어서 호흡 곤란으로 죽었을지도 몰라.”
북부에서 대다수 시간을 보낸 로지에는 추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지에는 데클란이 어제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더 깊게 체감하고 있었다.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재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던 때였다.
“아침 식사 대령이요!”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사샤였다.
“어? 데클란! 깨어났구나!”
사샤는 데클란을 보자마자 그를 향해 그대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마른하늘과 잣나무 향이 뒤섞인 겨울 냄새가 데클란의 코끝을 찔렀다.
사샤의 코트 끝자락에 붙어 있던 눈이 데클란의 얼굴에 닿아 녹아내리며 차가운 감촉을 남겼다.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픈 곳 없고?”
“응…….”
데클란은 사샤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곳이 없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어제 추위에 얼어붙었던 여파로 머리가 조금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클란은 굳이 사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밖에 혼자 쓰러져 있었어?”
사샤는 조금 전 로지에가 했던 질문을 데클란에게 다시 했다.
그리고 데클란은 같은 답을 제시했다.
“길을 잃어버렸어.”
“뭐?”
데클란의 말에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데클란이 아카데미에서 생활한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갔다. 그 정도 시간이면 머리가 길을 기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할 때가 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잘 안 보였어.”
데클란은 제멋대로 말을 지어냈다.
이에 로지에가 말을 덧붙였다.
“데클란 군의 말도 일리가 있어.”
“일리가 있다니요?”
“눈보라가 거세면 방향감이 사라지곤 하거든. 특히나 어제 사샤 양과 달리 데클란 군은 등불 같은 것도 들고 있지 않았잖아.”
“흐음, 그런가요…….”
북부에서 지내봤던 로지에의 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
이에 사샤는 말꼬리를 흐리며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로지에의 첨언에 힘을 얻은 데클란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눈 때문에 길을 잃은 것뿐이라니까…….”
그 말을 남긴 데클란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던 자신의 겉옷을 잡았다.
사샤가 다급히 물었다.
“어디 가려고?”
“아침 수업 가야지.”
“어제 그 고생을 해놓고 수업에 가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따뜻한 아침이나 먹고 오늘은 그냥 쉬어.”
“아니야. 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급히 겉옷을 걸쳐 입은 데클란은 그대로 도망치듯 로지에의 방에서 뛰쳐나갔다.
사샤와 로지에가 그를 막을 틈도 없었다.
로지에의 숙소에서 뛰쳐나온 데클란은 그대로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마침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감이 데클란을 발견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데클란 군, 어제 왜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
데클란은 사감을 그대로 지나쳤다.
“이봐, 데클란 군! 거기 서! 내가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데클란은 사감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의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방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다른 룸메이트들은 아침 식사를 하러 간 이후였다.
홀로 방에 남은 데클란은 그대로 자신의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눈꺼풀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했다.
두 눈을 꾹 감은 데클란의 머릿속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클란 군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재능이 없어.’
검술 교사의 목소리였다.
‘데클란 군이 아카데미를 계속 다니는 건 그야말로 거대한 돈 낭비, 그리고 시간 낭비다.’
어제 검술 교사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것처럼 데클란의 마음을 맴돌았다.
‘인페르나 남작가에서는 차라리 다른 학생을 후원하는 게 더 나아.’
한참 동안 침대 위에 드러누운 데클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자신의 책상 위에 앉은 데클란은 양피지 한 장과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사각, 사각.
양피지 위로 만년필이 유영하며 검은 잉크가 스며들었다.
[인페르나 남작님께.]
그렇게 데클란의 편지가 시작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저돌적이었다.
흔한 날씨에 대한 인사나 식상한 안부 인사도 없었다.
[데클란입니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고자 합니다.
이번 겨울에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려고 하오니, 마차 한 대를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세 마디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