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인페르나 남작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파수꾼에게 물었다.
“어떤 아이를 찾는다고 하더냐?”
“그것이…….”
파수꾼은 그 사제와 이야기를 나눈 영지민에게서 들은 말을 전달해주었다.
대충 이야기를 조합해보니 그 사제가 어떠한 아이를 찾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
사샤의 본모습과 똑같은 조합이었다.
그리고 사라진 이레사 공녀와도 같은 특징이었다.
‘빌어먹을 이레사 공작이 또……!’
잠자코 파수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페르나 남작은 이를 아드득 갈았다.
남작은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레사 공작은 자신의 가짜 딸을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이레사 공작은 또다시 자신의 딸을 대신할 대역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아마 예전에 사샤를 찾았던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아이를 구해보려는 것일 테다.
이런 세상 비열한 범죄를 저지르는 주제에, 비겁하게 교단의 힘 뒤에 숨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레사 공작을 당장 쳐 죽이고 싶다는 살의만 더 생겨났다.
‘사샤를 남장시켜서 아카데미로 보내버리길 잘했어.’
제아무리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쥔 이레사 공작이라도 아카데미는 함부로 건들지 못할 테다.
다른 귀족 학생들이 있는 아카데미로 함부로 사람을 보내어 사샤를 납치해 올 수도 없을 테다.
게다가 사샤는 남장까지 한 상태다. 이름까지 바꾸었으니 쉽게 찾지 못할 테다.
‘사샤 부모가 참 큰 결심을 했지.’
인페르나 남작은 사샤 부모의 결단에 감탄했다.
사실 사샤의 부모가 제 딸을 타지에 있는 아카데미로 보내버리겠다고 했을 때, 인페르나 남작은 마음이 쓰였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이건 부모와 아이 간의 생이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남작은 혹여나 사샤의 부모가 제 딸을 그리워하며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쓸데없는 기우였다.
사샤의 부모는 사샤가 떠날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게다가 괜히 아카데미로 제 딸을 보러 가겠다는 고집도 피우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의 딸을 보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레사 공작이 사샤에 대해 잊어버릴 때까지 숨죽인 채 사는 것. 그리고 사샤에 대해 숨기고 사는 것.
그것이 사샤가 다시 이레사 공작가로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일 당장 날이 밝으면 그 사제를 인페르나 남작가로 데리고 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인페르나 남작은 파수꾼에게 명령했다.
“네. 감옥에 처넣을까요?”
“아니.”
파수꾼의 말에 남작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놈의 명색이 일단은 사제잖아. 만일 그런 짓을 했다간 교단에서 꼬투리 잡고 지랄발광을 할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남의 영지에 제멋대로 활보하며 아이들 꽁무니나 뒤쫓는 놈을 어떻게 가만히 둘 수 있습니까.”
파수꾼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역시 인페르나 남작만큼이나 그 사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남작은 파수꾼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감옥에 처넣을 수는 없잖느냐. 일.단.은 손님처럼 정중히 모셔와라.”
인페르나 남작은 일부러 특정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이에 파수꾼은 남작이 결코 호의를 가지고 사제를 저택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수꾼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사제를 인페르나 남작가로 데리고 오겠다고 다짐한 뒤 집무실을 떠났다.
오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인페르나 남작은 두 눈을 감았다.
감히.
감히 겁도 없이 내 영지 사람들에게 손을 댔겠다.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이레사 공작.’
인페르나 남작은 어둠으로 뒤덮인 창문 밖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밤이 유난히 칠흑같이 느껴졌다.
* * *
잠옷 차림의 로지에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로지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클란 군이 눈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데클란을 가리켰다.
“데클란 얼굴 좀 보세요! 완전 꽁꽁 얼어 있잖아요!”
지금 나는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조금 전, 데클란을 만나기 위해 그의 기숙사로 향했던 나는 일단 데클란을 만나긴 했다.
문제는 데클란이 자기 기숙사가 아닌 밖에 쓰러져 있었다는 점이다.
나를 본 데클란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일단 데클란을 등에 업고 무작정 달려갔다.
나보다 더 무거운 데클란을 업고 어떻게 달렸는지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괴력을 발산하는 법이다.
쾅쾅쾅! 쾅쾅!
데클란을 등에 업고 그대로 내 숙소로 돌아온 나는 로지에의 방문을 두드렸다.
일찍 잠들어 있던 로지에는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사샤 양…… 어? 데클란 군?”
“도련님.”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지에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정말 죄송한데 도련님 침대 좀 쓰면 안 돼요?”
그래서 지금 데클란은 로지에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데클란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는 간단했다. 벽난로가 있는 로지에의 방이 내 방보다 훨씬 더 따뜻했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데클란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맞닿은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에 속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파졌다.
“도련님……. 데클란, 정말 괜찮은 거 맞겠죠? 네?”
이제 내 목청에서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클란의 가슴에 귀를 대고 상태를 살피던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야, 사샤 양. 일단 숨 쉬고 있잖아.”
전혀 안심되지 않는 위로였다.
“그런데 데클란은 왜 깨어나지 않는 거죠? 어떡해. 가서 의사를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 자리에서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로지에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사가 와도 소용없을 거야. 저체온증 때문에 정신을 잃은 거니까, 몸을 최대한 따듯하게 풀어줘야 해.”
“불 더 크게 키울게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무 장작을 벽난로에 더 쑤셔 넣었다.
삽시간에 불이 내 키보다 더 높게 피어났다.
방 안의 공기가 후끈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데클란 군이 입고 있는 옷을 갈아입혀야 할 것 같아. 이불이 녹은 눈 때문에 젖었어.”
데클란의 상태를 살펴보던 로지에가 그렇게 말했다.
“사샤 양, 데클란 군 옷은 내가 갈아입힐 테니까. 사샤 양은 방에 가서 마른 이불을 가져와 줘.”
“네.”
나는 아무런 군말 없이 내 방으로 달려갔다.
내 이불을 챙겨 로지에의 방으로 다시 돌아오자, 마침 데클란의 옷을 갈아입힌 로지에가 내게 손짓했다.
“와서 데클란 군 좀 옮겨줘.”
“네.”
나는 로지에의 지시에 따라 냉큼 몸을 움직였다.
내가 데클란을 부축한 사이, 로지에는 젖은 이불을 빼고 내가 가지고 온 마른 이불을 새로 깔았다.
내가 데클란을 다시 이불 안에 넣기가 무섭게 로지에가 다른 지시를 내렸다.
“부엌에 가서 타켄 허브를 우린 물을 끓여와 줘. 스푼도 한 자루 가지고 오고.”
“타켄 허브요?”
“혈압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약초야. 데클란 군은 지금 저체온증으로 혼미한 상태니까, 인위적으로 혈압을 높여줘야 해.”
“네, 알았어요!”
나는 로지에가 시키는 대로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끓였다.
마음이 어찌나 급했던지 펄펄 끓는 물을 급히 머그잔에 옮겨 담는 과정에서 하마터면 손이 델 뻔했다.
“여기 있어요.”
나는 로지에에게 타켄 허브를 우려낸 물과 스푼을 내밀었다.
스푼으로 약물을 퍼낸 로지에는 그것이 충분히 식을 때까지 기다린 뒤, 데클란의 입 안으로 약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그는 행여나 데클란의 입 안이 데일까 봐 조심스럽게 약물을 먹였다.
새파랗게 질려있던 데클란의 안색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 있던 손가락 끝도 조금씩 온기가 느껴졌고, 보라색으로 변했던 입술도 점점 혈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잠시 뒤.
“으음…….”
얼마 지나지 않아 데클란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데클란! 정신이 들어?”
로지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내가 데클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데클란의 입에서 약한 목소리가 나왔다.
“사샤…….”
“그래, 데클란. 나 여기 있어.”
“사샤아…….”
데클란의 입에서 자꾸만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두 눈을 뜨지 못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상태가 영 이상한데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데클란을 내려다보는 나는 이제 정말 울고 싶어졌다.
평소 힘차게 뛰어다니던 데클란과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이러다 행여나 데클란이 잘못되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나를 로지에가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데클란 군은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걸 도련님이 어떻게 장담하실 수 있으세요?”
“내 친척들이 살던 곳이 북부여서 겨울이 무척이나 길었거든. 거기서 이렇게 저체온증으로 혼절한 사람들을 많이 봤어.”
로지에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날 믿어, 사샤 양. 데클란 군은 내일 아침이면 멀쩡하게 회복해서 다시 일어날 거야.”
“……알았어요.”
로지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로지에의 친척들이 산다는 곳이 설마 북부일 줄이야.
인페르나 남작의 친정 가문이 백작가라는 것만 알았지, 그게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건지는 잘 몰랐다.
‘어쩐지 저번에 시내 나갈 때 목도리 안 하겠다고 말했더라…….’
그제야 나는 로지에가 체력이 약한 것치고 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로지에가 매우 강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지에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데클란 군도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사샤 양도 걱정하지 말고 이제 자러 가.”
“그럼 도련님은요?”
“나는 소파에서 잘 게.”
“그건 제가 미안해서 안 돼요!”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무리 긴급 상황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평안히 자고 있던 로지에를 깨워 그의 침대를 강탈한 꼴이었다.
그런 그를 소파에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내 방에서 자라고 해야…… 아, 잠깐만.’
로지에에게 내 방 침대에서 대신 자라고 말하려던 나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 방 침대에 이불이 없다.
데클란의 옷에 묻은 눈이 녹아 로지에의 이불을 젖혔다. 그래서 대신 내 방 이불을 가져다가 데클란에게 덮어둔 참이었다.
이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그냥 데클란의 양옆에서 자면 어떨까요?”
한참 고민하던 나는 이런 제안을 했다.
“데클란 군 옆에서?”
“네. 이불이 없으니까…… 데클란 몸도 더 녹여줄 겸 다 같이 자도록 해요.”
그러자 로지에의 두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친구끼리 파자마 파티하는 것 같아서 재밌을 것 같아!”
병자를 중간에 끼고 무슨 파자마 파티 같은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