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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62)화 (62/177)

62화

로지에는 약속대로 외출 허가를 받아왔다.

이로써 로지에와 나, 그리고 데클란은 주말에 시내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수업 시간 때 데클란에게 로지에의 주말 계획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데클란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됐어, 그만둬.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라니! 도련님이 힘들게 얻어온 외출 허가인데!”

“나한테 마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데클란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마침 나와 데클란은 대필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귀족들을 도와 편지를 대신 작성하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실용적인 수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한 시간째 알파벳을 깔끔하게 적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마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검사를 받으러 가는 거잖아.”

내가 교사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데클란에게 다시 속닥거렸다.

“해볼 필요도 없어.”

데클란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알파벳을 계속 반복해서 연습했다.

“데클란, 왜 그렇게 단정 지어?”

“그야 내 아버지는 평민이 분명하니까.”

“아닐 수도 있잖아. 너도 저번에 분명히 잘 모른다고 그랬으면서…….”

“엔리 군! 잡담 그만하고 필체 연습이나 하세요!”

교실을 배회하며 학생들을 감시하던 교사가 내게 호통을 쳤다.

조용히 글씨 연습을 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전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은 마치 ‘솜사탕이 또 뭘 하는 거지?’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대신 나는 목소리를 더더욱 낮게 깔며 데클란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주말에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싫다니까.”

“싫어? 음…… 그럼 하는 수 없지. 나랑 도련님이랑 둘이서 다녀올게.”

—뚝.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클란의 손에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클란이 필체 연습을 하고 있던 종이 위로 검은 잉크가 번지고 있었다. 깃털 펜의 펜촉이 부러져 잉크가 세고 있던 것이다.

잉크가 종이를 다 적시는 줄도 모르게 데클란이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데클란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저기. 데클란, 너 펜 부러졌는데……?”

“갈 거야.”

“……응?”

“나도 간다고. 주말에.”

그 말을 남긴 데클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지에 따위한테 질 수 없잖아.”

덜컹,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밀쳐졌다.

조용히 집중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의 이목이 다시 이쪽으로 쏠렸다.

“무슨 일이지, 데클란 군?”

“펜이 부러졌습니다. 손 씻고 오겠습니다.”

교사에게 그렇게 짧게 고한 데클란은 그대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텅 빈 그의 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남기고 간 한 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로지에 따위한테 뭘 져?’

설마, 또 질투하는 건가?

내가 데클란보다 로지에와 더 친한 친구가 될까 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최근 데클란은 내가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로지에와 함께 보내는 데에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로지에의 시종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

그러니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로지에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게 맞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로지에를 깨우고, 또 밤에 로지에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게 내 일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업 시간 외에 데클란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데클란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조금 미안한데.’

그제야 데클란이 얼마나 서운하고 외로웠을지 실감이 왔다.

‘이번 주말에 데클란에게 잘 해줘야겠다.’

그래, 시내에 나가는 김에 데클란에게 줄 선물을 사주도록 하자.

그러면 데클란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내가 그의 곁에 있는 시간이 예전보다 짧아졌어도, 그를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전과 한결같다는 사실을.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주말이 찾아왔다.

로지에는 아침부터 외출에 앞서 들뜬 모습이었다.

“이곳에 입학하고 난 뒤 처음으로 하는 나들이네!”

로지에는 평소답지 않게 아침 식사를 열심히 했다.

물론 접시를 다 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섭취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럼 어서 마차가 있는 곳으로 나가자. 데클란 군이 벌써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잠깐만요! 목도리 두르세요, 도련님.”

나는 숙소의 문을 박차고 나가려던 로지에를 붙잡았다.

“목도리? 왜?”

“벌써 겨울이라고요. 바깥에 나가서 돌아다닐 건데, 꼭꼭 챙겨 입으셔야지요.”

“이 정도면 별로 추운 것도 아니지 않아? 목도리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안 돼요!”

나는 로지에의 손을 꽉 붙잡았다.

“도련님 아픈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목도리하고 나가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로지에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만일 로지에가 침대에 드러누우면 나도 그날 결석 확정이다.

우리 연약한 도련님을 옆에서 실시간으로 간호해드려야 하니까.

그렇게 되면 데클란이 혼자서 심심해하게 될 테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로지에의 건강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가만히 서 보세요, 도련님.”

나는 목도리를 로지에의 어깨 위로 둘렀다. 그리고 추운 바람이 절대 로지에의 맨살에 닿지 않도록 목도리를 꽁꽁 둘러주었다.

“자, 이렇게 하면 밖에 나가도 춥지 않겠죠?”

“사샤 양…….”

내 배려에 로지에는 감동한 모양이었다.

로지에의 두 눈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홧홧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 왜 그러세요, 도련님? 왜 울 것 같은 표정을…….”

“고마워, 사샤 양.”

로지에는 그대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날 챙겨주는 건 어머니와 사샤 양뿐이야.”

“에이, 겨우 목도리 한 번 둘러준 것 가지고 그러세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로지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되돌아왔다.

“내가 몸이 약하다고 비웃지 않아 줘서 고마워.”

순간 내 입가에 스며들어 있던 웃음기가 싹 날아갔다.

“……누가 그거 가지고 도련님 비웃었어요?”

“으음, 그냥…….”

로지에가 텁텁한 웃음을 흘렸다. 분명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있다.

“도련님.”

“으, 으응?”

“어떤 자식이 그랬어요?”

나는 로지에의 두 어깨를 덥석 잡았다.

“어느 간덩이가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 감히 내 도련님을 괴롭혀요?”

로지에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지, 진정해, 사샤 양. 내가 몸이 약한 건 사실인걸.”

“사실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는 거예요. 용서 못 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누군가가 로지에를 조롱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감히 순수한 내 도련님을 건드리다니!

“그따위 말 귀담아듣지 마요. 도련님은 분명히 오래오래 살 거예요. 아주 오래 살아서 장수해야 해요, 알겠죠?”

“사샤 양…….”

급기야 로지에의 눈시울이 붉게 번졌다.

정말이지 여리고 순수한 게 꼭 겨울의 첫눈과도 같은 아이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이렇게 쉽게 감동하시면 어떡해요, 도련님. 눈물은 아껴두세요.”

“안 울어.”

로지에가 빙긋 웃음을 지어내며 말했다.

“울면 사샤 양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제 얼굴 봐서 뭐 하시게요?”

“행복해지려고.”

“네?”

생뚱맞은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로지에의 다정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예쁜 걸 보면 행복해진다고 했어.”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간지러움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부드러운 깃털을 주워다가 내 마음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예뻐요?”

한동안 말문이 막혔던 내가 겨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로지에가 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싱긋 웃었다.

“응. 몰랐어?”

“몰랐는데요. 어…… 저도 모르는 걸 도련님은 어떻게 알고 계세요?”

“그렇구나. 몰랐던 모양이네. 그럼 앞으로 계속 많이 말해줄게.”

로지에가 한 손으로 내 짧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사샤 양은 예뻐.”

휙!

나는 그만 물벼락을 맞은 고양이 마냥 뒤로 몸을 빼버렸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저, 저희 이제 밖으로 나갈 거니까! 이제부터는 엔리 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예쁘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외친 나는 로지에로부터 고개를 획 돌렸다.

숙소 밖으로 향하는 발소리에 괜히 무게가 들어갔다.

달아오르는 이 열기를 어느 방향으로 발산해야 좋을지 몰랐다.

* * *

로지에와 함께 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선 데클란이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아카데미에서 배정해 준 하인 한 명이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아직은 미성년인 우리들끼리 나갔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안 되니 이렇게 성인 하인을 한 명 붙여준 것이다.

“도련님은 안녕하시고요…… 에, 엔리. 너 얼굴이 왜 그래?”

로지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데클란은 내 얼굴을 보고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워서 그래.”

나는 흔해 빠진 변명거리를 닥치는 대로 내뱉었다.

데클란은 당연히 이 말을 믿지 못했다.

“덥다고? 이 날씨에?”

“응. 너 안 더워?”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추위인데, 무슨 소리야?”

“아아, 덥다! 땀이 난다! 올해 겨울 유난히 따뜻하다!”

“……?”

데클란은 인상을 슬쩍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데클란이 느끼고 있을 심정을 나는 아주 잘 이해했다.

‘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데클란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로지에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내가 로지에와 가까이 지내는 것 때문에 질투하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이후는 상상하지 말자.’

그냥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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