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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61)화 (61/177)

61화

“마력 감지기요?”

처음 듣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참 많은 걸 배우는 것 같다.

“아, 사샤 양은 마력을 못 쓰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로지에가 냅킨으로 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마력 감지기는 말 그대로 마력을 얼마나 발산할 수 있는지 측정하는 기구야.”

“마력을 어떻게 측정해요?”

마력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아닌가? 그 마력의 강도를 어떻게 잴 수 있지?

“피 한 방울만 있으면 알 수 있어.”

로지에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마력은 피에 녹아 있거든.”

로지에가 설명한 마력 감지기의 원리는 이러했다. 

먼저, 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의 손가락에 바늘을 찔러 피가 살짝 나도록 한다.

그 뒤로 그 핏방울을 검사지 위에 묻힌 뒤 마력 감지기의 검사대 위로 올린다.

이후 마력 감지기는 검사지의 피 위로 미약한 마력을 흘려보낸다.

만일 검사자가 정말 마력이 있다면, 검사지 위의 피와 마력이 서로 반응하며 일종의 공명 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공명 현상이 일어나면 검사지는 마력으로 인해 소멸하고 만다.

그러니까 불이 없이 사르르 타버려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건 그거대로 신기한 풍경이겠네.’

종이가 아무런 소리도 없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되는 모습을 상상하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력이 약하면 약할수록 공명 현상이 더 빨리 일어나. 마력이 강하면 몇 분이 지나서야 공명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로지에의 말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도련님도 이 검사를 받으신 거예요?”

“나? 아니, 나는 받아본 적 없어.”

“왜요?”

“그야 난 신분이 확실한 귀족이니까. 게다가 난 어렸을 때부터 마력을 쓸 수 있어서, 굳이 검사를 받을 필요가 없었어.”

로지에가 내 반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

그 대꾸에 나는 마력 감지기의 용도를 얼핏 알 수 있었다.

아마 귀족의 사생아들의 마력 검증을 위해 사용하는 기계겠지.

그것도 아니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혈통을 이어받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줄곧 마력을 운용하지 못한 귀족들을 위한 기계겠지.

‘그럼 데클란이 검사를 받는 걸 이상하게 보지 않으려나…….’

조금 걱정이 된 내가 조심스럽게 로지에에게 말문을 뗐다.

“저기, 도련님…… 평민들도 마력 감지기를 사용할 수 있나요?”

“음?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보통은 귀족들이 쓰는 검사 도구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평민들 사이에 재미 삼아 해 보는 사람들도 있어. 평민 중에도 마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거든. 물론 아주 보잘것없는 수준의 마력이지만.”

아하.

로지에의 말을 듣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평민들이 마력 감지기를 자주 사용한다는 말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적어도 데클란이 마력 감지기를 사용할 때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진 않겠지.

데클란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는 건 싫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인페르나 영지의 마을에 있을 때 마을 아이들이 데클란을 두고 지껄이던 말들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가끔 데클란을 두고 ‘더러운 사생아’라며 조롱하곤 했다.

물론 내가 주먹으로 마을의 질서를 잡은 뒤로 데클란이 더는 그런 놀림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데클란도 가끔 자신의 신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당장 오늘 검술 교사에게도 자신의 아버지가 평민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 데클란을 데리고 가서 마력 검사를 받아보도록 하자.’

어쩌면 데클란에게도 마력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면 정말 검술 교사의 말대로 나이가 되면 곧바로 기사 임용 시험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데클란은 실력이 좋으니, 일단 기사 자격이 되면 곧바로 높은 분들의 눈에 띄게 될 테다.

‘그러면 데클란이 예정보다 더 빨리 이레사 공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나는 데클란과 예정보다 더 일찍 헤어지게 되겠지?

우뚝.

로지에가 먹을 닭고기를 칼질하던 손이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그리고.

—그건 좀 싫은데.

대뜸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싫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순간 나 자신이 두 명의 사람으로 갈라진 것 같았다. 모순적인 생각이 동시에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싫다는 거지?

데클란과 헤어지는 게?

아니면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를 만나는 게?

나는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곱씹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이치가 들어맞지 않았다.

‘싫을……게 있나?’

데클란은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런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내가 지금 아무리 데클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도, 나는 그저 무명의 엑스트라일 뿐이다.

원작의 흐름대로 사건이 흘러가는 게 뭐가 나쁘지?

이 소설 속에 빙의하기 전에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생생하게 재연되는 건 정말 가슴 벅차오르는 일 아닌가.

“사샤 양? 갑자기 왜 그래?”

자리에 앉아 얌전히 내가 고기를 썰어주길 기다리던 로지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어설픈 미소를 만들어내곤 쓱싹쓱싹 칼질을 이어갔다.

“도련님, 고기 드세요.”

“응.”

로지에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준 음식을 냠냠 받아먹는 로지에의 모습은 흡사 어미 새로부터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 도련님은 언제 철이 들려나.’

한 손으로 턱을 괸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로지에가 빤히 바라보았다.

크리스털 조각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참 인상적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내가 피식 웃으며 로지에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사샤 양은 참 착한 사람 같아.”

“네? 제가요? 하하, 말도 안 돼요.”

그 말에 나는 정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런 말을 해? 사샤 양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상냥한 사람이야.”

“어째서요?”

“그야 매번 나랑 이렇게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해주잖아.”

“……네?”

로지에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끔뻑끔뻑했다.

같이 식사하는 거랑 착한 거랑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내 얼굴 위에 드러난 물음표를 본 로지에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샤 양도 알고 있었겠지만, 난 몸이 약해서 그런지 음식을 먹는 속도도 느려. 그래서 도시에서 지낼 때 항상 곤욕을 치렀어.”

“어째서요?”

“음…… 내 친척들이 식사를 다 끝냈을 때쯤에야 난 겨우 애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를 다 먹었거든.”

로지에가 웃음기가 띈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나 때문에 다른 친척분들더러 마냥 기다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 그래서 난 늘 혼자 다이닝 홀에 남아서 식사를 했어.”

“아하.”

“그렇게 혼자서 남아서 식사를 할 때 정말 눈치가 보이더라고.”

로지에의 입에서는 마치 타인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듯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용인들 입장에서는 내가 꽤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을 거야. 내가 어서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다이닝 홀을 정리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나 때문에 계속 마냥 기다려야만 했으니까.”

“아…….”

그제야 나는 로지에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지에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 때문에 음식을 보통 사람보다 더 느리게 섭취했다.

그런 로지에에게 타인과의 식사 자리는 부담감을 안겨주었을 테다.

그러나 그는 나와 식사를 할 때 눈치 보지 않으며 자신의 페이스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날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다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어버리고 말았다.

“고작 그런 간단한 친절 하나 가지고 절 좋은 사람으로 판단하시다니요.”

“말 그대로야.”

로지에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아닌 사샤 양이 내게 그런 간단한 친절을 베풀었잖아. 그래서 사샤 양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렸어.”

“도련님…….”

“나는 앞으로 평생 식사를 할 때마다 사샤 양이 떠오를 거야.”

로지에의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주시했다. 당장이라도 그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겨 비칠 것만 같았다.

“음,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꽤 좋네. 하루에 사샤 양을 세 번이나 떠올릴 정당한 이유가 있다니.”

“저를 하루에 세 번이나 떠올린다는 말은 즉, 앞으로 식사 거르지 않고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드신다는 거죠?”

“물론이지.”

로지에의 눈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렇게 해서 사샤 양을 떠올릴 수 있다면야, 못할 것도 없어.”

“도련님은 말을 참 예쁘게 하시는 것 같아요.”

나는 풋풋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이에 로지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쁜 사람에겐 예쁜 말을 해줘야지.”

“나 참, 이 아카데미에서 절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련님 빼고 없을 거예요.”

“그럴 리가. 데클란 군도 그렇게 생각할걸?”

“데클란이요? 음…… 아닐 것 같아요.”

날 바라보는 데클란의 시선을 떠올린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은 내가 저번에 신입생 환영회 때 여장을 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추측건대 차마 보지 못할 것 봤다는 듯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내 애매한 답을 들은 로지에는 후후 웃었다.

“그럼 더 좋네. 나 혼자만 사샤 양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만 하세요, 도련님. 저 지금 놀리시는 거죠? 아 참, 고기 더 썰어드려요?”

“아니.”

로지에의 입가에 미소가 다시 걸렸다.

나를 놀리는 거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말한 건지, 아니면 고기를 더 먹겠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 건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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