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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59)화 (59/177)

59화

신입생 환영회에서 솜사탕 요정이란 칭호를 얻은 이후.

내 아카데미 생활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어째선지 1학년들을 비롯해 고학년 선배들이 나를 알아서 피해 다녔다.

“야, 눈깔아. 솜사탕 요정에게 깝치면 안 돼.”

“쟤 화나면 널 검집으로 뭉개서 반죽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아니라고, 이 자식들아!

억울해진 나는 속닥속닥하고 있던 녀석들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학생들은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 오늘 날씨가 참 좋네? 빨래하면 잘 마르겠다!”

“나, 나는 갑자기 공부하고 싶다! 도서관으로 가야지!”

녀석들은 그렇게 이상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으며 줄행랑을 쳤다.

덕분에 내 곁에는 오로지 데클란 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상관없었다.

난 데클란 외에 다른 이들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까.

물론 로지에는 예외다.

로지에는…… 내 관심이 없으면 안 되는 아이였다.

로지에와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게 된 이후.

나는 왜 인페르나 남작이 나를 로지에의 시종으로 임명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장 로지에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첫날부터 절실히 깨달았다.

“도련님! 일어나셔야 해요!”

새벽 6시가 되자 나는 로지에의 방으로 들어가 그를 깨웠다.

“으음, 사샤 양…… 나, 조금만 더 자고 싶어…….”

로지에는 이불 속에 숨어 꼬물거리고 있었다. 흡사 자기 굴에 숨으려는 햄스터처럼 보였다.

꽤나 귀여웠지만, 그렇다고 더 재울 수 없었다.

“안 돼요! 2시간 뒤에 수업 있잖아요!”

“아, 수업…… 침대에서 하면 안 되겠지?”

“되겠어요?”

나는 로지에의 이불을 휙 걷어냈다.

시무룩해진 로지에는 내 손을 잡고 욕실로 걸어갔다.

그렇게 로지에를 욕실로 넣은 나는 식당으로 달려가 아침 식사를 받아왔다.

참고로 귀족 자제들은 각기 자기 방에서 식사를 했다. 나와 같은 시종들이 매일 아침 식당에서 식사를 받아와 방에 차려주는 식이었다.

“도련님! 아침 드세요!”

식탁 위에 트레이를 놓은 나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로지에를 재촉했다.

아직도 잠에 덜 깬 로지에는 샤워 로브를 걸친 채 욕실 중앙에 서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로지에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 먼저 닦으셔야지요! 나중에 날씨 추워지면 도련님 감기 걸려요!”

“난 날씨 안 추워도 원래 감기 자주 걸리는데…….”

“그럼 더더욱 머리를 잘 말리셔야지요!”

“사샤 양이 해 주면 참 좋을 것 같아…….”

이 도련님, 이렇게 안 봤는데 엄청난 응석둥이였구나.

‘하긴, 로지에 도련님은 인페르나 남작님의 외동아들이었지…….’

게다가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으니, 주변에서 얼마나 애지중지하게 키웠을까.

나는 마른 수건으로 로지에의 머리 물기를 털었다. 그리고 로지에의 곱슬머리가 마르기 전에 결에 따라 가르마를 내어 빗질을 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비몽사몽 그 자체인 로지에를 다시 옷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셔츠, 넥타이, 바지, 벨트, 자켓, 그리고 양말.”

나는 로지에의 아카데미 유니폼을 꺼내 내밀었다.

“어서 입으세요.”

“응…….”

로지에는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교복을 받아드렸다.

“다 갈아입었어.”

교복으로 갈아입은 로지에는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제법 또렷한 목소리로 방문을 다시 열었다.

나는 로지에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아침…… 안 먹으면 안 되겠지?”

제 앞에 놓인 아침 식사를 내려다본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한창 성장기의 학생이 어떻게 아침을 안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서 나는 옆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소시지 링크를 한 조각 잘라주었다.

“자, 입 벌리세요.”

“소시지 위에다가 소금 좀 쳐 줘.”

“네? 이미 소금으로 절인 소시지인데요. 그리고 소금 많이 안 먹으면 안 좋아요.”

그렇게 소시지를 한 조각 먹여주었더니, 로지에는 잘도 받아먹었다.

그러더니 제법 행복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샤 양이 먹여주니까 맛있는 것 같아.”

이에 나는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요? 혼자서 먹으면 더 맛있어질 거예요.”

그렇게 로지에의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준 나는 그의 가방을 챙기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다.

로지에의 침실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내가 처음 ‘사샤’의 몸에 빙의했을 때 봤던 방보다 더 끔찍한 상태였다.

로지에의 말에 따르면, 그도 나름 방을 깨끗하게 쓰고 싶어서 노력한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공부하고 과제하고 검술 훈련을 하고 집에 오면 힘들어서 방을 치울 체력이 남아 있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로지에의 가방을 챙기면서 방을 깨끗하게 정돈해 주었다.

“도련님, 이제 수업 가셔야지요.”

“응, 고마워. 사샤 양.”

가방을 건네받은 로지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저녁 때 보자.”

“네, 도련님도 오늘 신나는 하루 되세요!”

그렇게 환한 웃음소리와 함께 로지에를 내보낸 나는 식탁으로 돌아갔다.

트레이 위에는 반쯤 남은 토스트 조각과 스프, 그리고 먹다 포기한 소시지 링크와 계란이 놓여있었다.

‘너무 안 드시는 것 같은데…….’

로지에가 남긴 아침 음식을 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건 로지에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로지에는 입이 짧았다.

뭐든지 보기 좋게 잘 먹는 데클란과 달리, 로지에는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

로지에가 아주 갓난아기였을 때 우유를 도통 먹지를 않아 인페르나 남작이 크게 걱정했더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중에 주말이 되면 데클란과 함께 로지에를 위해 맛있는 케이크라도 만들어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내 가방을 챙겨 수업에 나갔다. 

수업은 확실히 재미있었다. 여름 동안 데클란과 함께 열심히 선행 학습을 한 보람이 있었다.

비록 로지에가 듣는 수업의 질보다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제법 흥미로웠다.

귀족 자제들과 달리, 평민들로 구성된 반에서는 귀족을 섬기는 입장에서 유용한 것들을 배웠다.

귀족을 대할 때 갖춰야 하는 예법, 대리로 편지를 쓰는 법, 장부 정리하기, 초대장 관리하는 법, 응급 처치 기술 등등.

‘인페르나 남작님 말씀이 맞았어.’

평민들을 위한 수업에는 학문적인 기초가 깔려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로만 가르쳤다.

예를 들어 산수의 경우, 딱 장부를 정리할 수 있을 정도만 수업을 진행했다.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 따윈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나 데클란이나 딱히 이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괜히 머리 복잡해지는 것보다 낫지, 뭐.’

그리고 수업 중 가장 재미있는 수업은 뭐니 뭐니 해도 검술 수업이었다.

검술 수업은 매일 오후에 진행되었다.

날씨가 쨍쨍하든, 비가 죽죽 내리든, 아니면 눈이 펑펑 오든.

학생들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검술 수업에 나가야 했다.

‘로지에 도련님이 귀족 자제들은 비 오면 실내에서 수업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확연히 느껴지는 신분의 차이에 나는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아무리 같은 아카데미에 진학 중이라고 해도, 로지에를 비롯한 귀족 자제들은 나와 데클란 같은 평민들과 전혀 다른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귀족 자제들은 우리가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고 추상적인 학문들을 배웠으니까.

예를 들어 논리학이라던가, 철학이라던가, 예술사라던가.

가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나는 몰래 로지에의 교과서를 가져다가 읽곤 했다.

그러면 말똥말똥 뜨여진 눈이 절로 스르르 감겼다.

내게 로지에가 배우는 교과서는 수면 마법이 걸린 마법서와 같았다.

내가 로지에에게 수업 때 졸리지 않느냐고 묻자, 로지에는 이렇게 답했다.

“졸릴 틈이 어디 있겠어, 사샤 양. 매일 매일 쪽지 시험을 보는데.”

귀족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페르나 남작가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목검이 아닌 진짜 검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첫날, 나와 데클란은 묵직한 검의 무게를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무겁네.”

“응. 그래도 반짝반짝거리는 게 멋져.”

데클란은 딱 그 나이 때의 남자아이가 할 법한 말을 하며 검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손에 잡힌 검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의 입가에는 햇빛처럼 찬란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데클란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내 입가에도 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았다.

그 외에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원초적인 기쁨이어서, 그래서 더 행복했다.

“왜 쳐다봐?”

내 시선을 감지한 데클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상상만 해도 멋져서.”

“뭐가.”

“네가 나중에 커서 훌륭할 기사가 될 걸 생각하니까.”

“사…… 아니, 엔리.”

주변에 다른 학생들이 있는 걸 의식한 데클란이 나를 가명으로 불렀다.

“넌 왜 자꾸 내가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하는 거야?”

“응? 그야 넌 충분히 그럴 아이니까.”

“그렇지만…… 만약에 내가 기사가 되지 못하면 어떡해?”

데클란의 입에서 사뭇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을 하는 데클란의 입가는 웃음기 하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만약에 내가 네가 원하는 멋진 기사가 되지 못하면? 미래에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어 있으면? 그래도…… 그래도 내 옆에 있을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데클란.”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넌 이미 내 마음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기사님이야.”

“……그게 뭐야.”

데클란은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아무렇게나 지껄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입장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진짜라니까?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그래, 그건 맞네.”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회피한 데클란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앞으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도록 내가 더 노력해야겠네.”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읊조린 데클란은 입가를 손등으로 쓸었다. 마지 입가가 간지러워 견디기 어렵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 데클란은 검술 수업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데클란 군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검술 담당 교사가 침을 튀겨가며 데클란을 칭찬했다.

“제가 이곳 오스첸스 남학교에 부임한지 10년 차가 다 되어 가는데, 데클란 군처럼 감각이 뛰어난 학생은 처음입니다!”

“과찬입니다.”

데클란은 이런 칭찬이 낯간지러운지 머쓱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1학년 학생들의 질투와 선망이 섞인 시선이 뒤따랐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검술 교사가 말을 이었다.

“만일 데클란 군이 마력을 운용할 수 있다면 손쉽게 기사 임용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데클란 군의 부모님의 마력 혈통에 대해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마력 혈통?

낯선 단어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마력 혈통’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리에 모인 학생들의 이목이 전부 데클란을 향해 집중되었다.

“제 어머니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시는 평민이십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떠올린 듯, 데클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아버지도 같은 위치의 평민이셨습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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